* 모든 설정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실제 그것들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 한국경찰과학수사팀(한국 CSI : KPSI) 수사과
제 2지부(경기) 팀장 : 김종현(30)
주 팀원 : 최민호(29) 김기범(27) 이태민(26)
* 국립과학수사연구소(NISI)
검시관 : 법의학자 겸 외과의 이진기(32)
"좋아하는데, 하면 안돼?"
기범은 말을 잃었다.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넋이 나간 얼굴로, 민호의 조금 찌푸려진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방금 민호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가 제정신으로 한 말일까, 혹시 술김에 아무 말이나 내뱉은 건 아닐까 하는 오만가지 생각이 기범의 비워진 머릿속을 꽉꽉 메워왔다. 한참을 그렇게 쳐다보고만 있자, 민호가 인상을 펴고 한숨을 내쉬었다. 멍해진 기범의 팔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다리가 저린지 작게 투덜거렸다. 기범의 팔을 끌고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민호의 걸음은 후련해보이기도 했고, 좀 무거워보이기도 했다.
"뭐해, 계속 거기 서 있을거야?"
오피스텔은 메탈 느낌의 가구 위주여서 그런지 민호처럼 서늘하고 깔끔했다. 거실과 통해있는 작은 주방과 벽걸이 TV, CD와 스포츠 잡지가 잔뜩 꽂혀서 한 쪽 벽을 차지한 진열장, 시어터가 있는 거실에 함께 있는 싱글 침대 하나. 그의 오피스텔은 발코니 없이 호텔처럼 한 쪽 벽이 유리였다. 그 덕에 밖은 유리를 부수지 않는 한 절대 나갈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 곳에 놓인 침대에서 보는 야경이란, 호텔 부럽지 않았다. 욕실과 다용도실이 있는 원룸 형태의 그의 오피스텔은 마치 민호처럼 자주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괜찮았다.
현관에까지 들어섰는데 여전히 그 상태인 기범에게 민호가 무뚝뚝하게 말하고 욕실로 들어가버린다. 넋나간 얼굴로 기범이 신발을 벗고 깔려진 러그 위로 올라서자, 민호가 욕실에서 나와 다시 그에게 다가갔다. 큰 수건을 들고 나온 민호는 그걸 기범의 머리 위에 덮어씌웠다. 조심스레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는 민호의 옷 앞섶을 기범의 찬 손이 움켜쥐어왔다. 움직이던 민호의 팔이 뚝, 멈췄다. 기범은 민호의 허리에 팔을 감고 그의 가슴께에 얼굴을 푹 묻었다. 민호는 잠시 그렇게 있다가, 그를 끌어안아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선배."
"......어정쩡한 놈이라 미안한데, 나도 이제껏 살아온 나를 벗어나기 힘들어서 그랬다. 그래서 감정을 저울질하고 있었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
"내가 옛날부터 정해 온 길을 벗어나는 게 어려워서 한참 고민했어. 그런 불확실한 상황에서 좋아한다고 덜컥 말하면 후일이 심각해질 것 같고, 아니라고 하면 나중에 내가 후회할 것 같아서 널 상처입힌 것 같은데... 그건 미안하다. 네가 상처받는 걸 두려워해서 내 감정에 대한 확실한 결론이 필요했거든. 근데 그게 다가 아니었던 것 같아."
민호의 손이 조금 멈칫하는가 싶더니 기범의 머리에 안착했다. 젖은 금발을 손가락으로 흐트러뜨리며 민호는 말을 이었다.
"그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널 생각 못했다. 넌 어떨지 모르겠는데, 난 이제까지 연애를 머리로 해서, 난생 처음 여기로 하려니 무서워서 회피했어. 결국 좋...아한다고 깨달았을 땐 넌 이미 상처를 입은 상태더라. 그래서 나한테 화내고."
"...화 안 내게 생겼어요?"
기범이 꿍얼거리며 대꾸했다. 민호는 수건으로 다시 기범의 머리카락을 닦으며 말했다. 어째, 기범의 눈에는 민호가 말을 하는 모양새가 불안불안해 보였다. 아, 이거 혹시- 이 사람...
"큼, 어쨌든 네가 솔직한 감정 드러낸 사람 나밖에 없다고 했을 때... 기분은 나쁘지 않았어. ...정말로 잘난 척 하고 싶어지고."
아, 알겠다.
"...완전 얄미워."
"어쩌면 그런 부분 때문에...... 좋아진 걸...지도..."
최민호는 지금, 쑥스러워 하고 있다.
평소에 들으면 소름돋고 간지러워서 자신의 입으로는 절대 못했을 말을 하려니 제가 다 민망한 모양이었다. 애써 담담히 말을 마친 민호는 제 감정을 인정하니 속이 다 후련했다. 하지만 손발이 저릿저릿하고 쑥스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기범은 그런 민호를 다소 놀란 얼굴로 올려다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아 정말, 선배 진짜 귀엽네요. 언제나 무뚝뚝하고 뚱~한 얼굴로 있어서 애인한테도 저렇게 하나, 생각했었는데. 저야 뭐, 선배의 그 시니컬한 모습을 좋아한 거지만."
"...시끄러, 이런 말 하는 거 드물어서 나도 어색해."
"아하하하, 어색하긴, 선배 귀여워요- 지난 애인들한테 이런 거 아니에요? 뭐하냐, 잘자라, 뭐먹을래. 어우, 재미없어 진짜- 선배가 무슨 군인도 아니고..."
"...야...그만하라니까...!"
급속도로 민망해진 민호가 기범을 밀어내고 뒤돌아섰다. 민호는 지금 정말 쪽팔렸다. 좋아하는 건 맞는데, 그 말 하나로 이렇게 놀림받을 줄은. 저런 수줍어하는 그의 모습은 기범에게 거의 신세계와도 같았다. 그래서 푸하하, 하고 웃어대며 민호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를 놀려댔다.
"에에- 빨갛다 빨갛다 빨갛다! 으하하, 얼굴 빨개졌어요, 선배!"
"......"
민호는 기범이 하는 말은 다 걸러들으며 제 페이스를 찾으려 무진 노력을 했다. 그는 지금 엄청나게 창피했다. 김기범이 지금 자신때문에 폭풍이 몰아치는 민호의 마음을 알지는 모르겠지만. 기범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외면한 지 5분 만에, 민호는 평소의 그 무심한 포커페이스로 돌아왔다. 가히 경이적인 자제력과 자기 컨트롤이랄까. 최민호가 사무실에서 '가장 차갑고 이성적인 CSI 요원' 이라 불리는 이유는 여기 있었던 모양이다.
"민호 선배, 너무 부끄러워 하는 거 아니에요? 나 좋아한다면서 이 정도로 부끄러워하면 어떡......으악?!"
탁, 하는 스위치 소리와 함께 오피스텔의 불이 꺼졌다. 그리고 민호를 쫓아다니던 기범은, 서늘한 얼굴로 변한 그의 손에 붙잡혔다. 민호는 기범의 팔을 잡아 끌어,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유리창에 기대 세웠다. 젖은 옷 때문에 더 잘 느껴지는 유리의 차가움이 기범의 놀란 정신을 깨웠다. 허리 아래까지 오는 창턱에 걸터앉은 모양이 된 기범은 멍하니 민호를 올려다보았다. 텅, 하고 유리를 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민호의 남은 한 손이 기범의 머리 옆을 짚는다. 침대 옆 콘솔 위의 취침등의 흐린 빛에 민호의 얼굴이 드러났다. 기범은 그 싸늘한 얼굴에 꿀꺽, 하고 마른 침을 삼켰다. 너, 너무 놀렸나...?
코 앞에서 민호의 얼굴을 본 건 처음이었다. 키스할 때야 눈을 감고 있거나 해서 자세하게 보질 못했었는데, 그의 큰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둥글고 순한 눈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조금 가늘어져 날카로워보였다. 그 안의 검은 동공에 놀란 얼굴의 자신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쭉 뻗은 콧날에서 둥근 입술로 기범의 시선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시선은 벌어진 네이비색 셔츠에 붙들렸다. 민호가 허리를 숙이고 있어서, 그 안으로 아주 살짝 보이는 그의 단단한 몸이 기범을 조금 설레게 했다.
자기들이 쫄딱 젖어있었고, 이대로 두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둘 다 안하고 있었다. 민호는 그저 야스럽게 젖어서 흐트러진 기범을, 기범은 서늘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민호를 바라보고만 있었으니까.
"......왜 쫄아, 너. 내가 뭘 했다고."
기범의 머리를 사이에 두고 두 손을 짚은 채 내려다보던 민호가 말을 툭 던졌다. 기범은 흘긋 뒤 쪽을 보다가, 아찔할 정도의 바깥 모습 때문에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쫄긴 누가 쫄아요? 저 이런 거 꽤 익숙하다구요."
"이런 거......? 저번엔 확실하지 않아서 안 잔거라고 했지. ......그럼, 지금은 안길 수 있겠네."
"......What?"
정말 당황한 모양인지, 기범의 입에서 영어가 튀어나왔다. 기범이 미국에서 오래 살았기에 당황할 때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버릇이란 걸, 민호가 모를 리 없었다. 함께 일했던 3년의 시간 동안 기범에 대해 몇 가지 아는 것들 중 하나랄까. 민호는 유리를 짚고 있던 한 손으로, 좀 물기가 사라진 기범의 금발을 헝클었다. 찰랑거리는 게, 감촉이 꽤 부드럽다.
"뭐가 What, 이야. 못 알아들었어?"
"......선배, 남자 처음이잖아요."
"......그럼 언제까지 안 할건데?"
"선배...... 진짜 나 좋아해서 하자는 거죠? 술기운에 누구라도 상관없어, 뭐 이런 건 아니죠?"
정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도 커져선 재차 물어온다. 답지않게 주저하는 기범을 보던 민호가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이런 거 익숙하다더니... 왜 이렇게 떨어. 그리고 술기운? 지금 취한 게 누군데... 오히려 떨리는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남잘 안는 자신이 아닐까 생각했다. 기범이 여자 뿐 아니라 남자와의 관계도 몇 번 가져왔었다는 걸 그의 입으로 직접 들었던 민호는 갑자기 속이 꼬였다. 이 불편한 기분도 이 녀석을 좋아해서일까. 그리고, 저런 생각을 하는 기범이 밉다기 보다는 자신이 저 정도로 믿음을 주지 못하는 존재였나 회의가 들었다.
"누구라도 상관없으면 너랑 하겠냐, 색시집을 가지."
괜한 마음에 다시 툭툭거리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기범은 오히려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우와... 나 지금 좋아해도 되는거죠? 아하하하, 선배가 나 좋아해서 남자를 안게 될 줄은 몰랐네. 첫 상대는 아니어도, 첫 남자는 될 수 있는 거니까 영광이네요-"
이 자식이... 남은 지금 심각하게 진지한데 웃어? 민호는 어떻게 봐도 자신이 손해보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고백했더니 기쁨의 눈물은 고사하고 배가 터져라 웃어대고... 누구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노멀에서 게이로)에 서 있는데 저런 팔랑팔랑 가벼운 말이나 하고... 게다가, 여자는 몰라도 남자랑 여러 번 잤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민호는 갑자기 자신이 창피해졌다. 이건 무슨 추질한 뒤끝...
그런 민호를 아는지 모르는지 쿡쿡 웃어대는 기범을 싸늘하게 내려다 본 그는 심사가 비틀렸다. 내 덕분에 웃고 즐겼으니, 너도 내 창피함을 겪어봐야 공평하잖아?
나름대로의 논리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걸 마친 민호는 유리에 기대 서 있던 기범을 홱 낚아채 돌려세웠다. 여전히 민호를 보며 웃던 기범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혔다. 마주보게 된 유리창에 기범의 놀란 얼굴이 비쳤다. 기범의 눈이 자신의 얼굴에서 슬며시 위로 올라갔다.
"......선배...?"
창에 비친 민호의 얼굴은 표정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몸을 돌리려 민호의 손에서 제 팔을 빼내려는 기범이, 놓아주지 않는 그를 긴장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왜 그래요, 무섭게. 에이, 설마 좀 놀렸다고 삐진 거 아니죠? 그건 그냥 너무 좋아ㅅ..."
"......너무 좋아서 웃었어?"
"왜 그래요, 선배......"
"그럼, ......이제 좋아서 울어봐."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서늘한 웃음이 섞인 말을 내뱉은 민호는 뒤를 돌아보고 있던 기범의 얼굴을 다시 정면으로 돌려놓았다. 민호는 기범의 귓가에 바짝 입술을 가져가 소근거리듯이 말했다. 행위야 간지러웠지만 그의 낮은 목소리는 차갑기까지 했다.
"내일 월차 써라, 김기범."
"...그건 선배도 마찬가지예요."
민호가 진심임을 안 기범은, 태연하게 말을 받았지만 묘한 오싹함에 어깨를 작게 떨었다. 민호는 재미있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짓고 기범의 뒷머리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가 떼었다. 민호는 단추를 잠그지 않고 입은 기범의 셔츠 칼라를 손으로 잡은 채, 뒷목부터 가볍게 입을 맞추며 젖은 셔츠를 끌어내렸다. 기범이 그 녹녹한 느낌에 아, 하고 억누른 탄식을 내며 유리창을 두 손으로 짚었다. 옷 사이로 보이는 뽀얀 피부는, 그걸 무심하게 내려다 보는 민호마저 딴 생각이 들게 했다. 평생 밖에 안 나가고 집에만 있어도 이렇게 하얄 수 있나?
느릿하게 어깨 부근으로 입술을 눌러가던 민호가 허리 께까지 셔츠를 끌어내리고 입술을 떼었다. 한 팔로 기범의 허리를 감싸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자 자연스레 기범의 손이 그의 팔을 잡는다. 티 안으로 손을 넣자, 따끈한 몸이 기분좋게 손에 감겨왔다. 매끈한 배에서 가슴께로 거침없이 손이 올라오자 기범이 몸을 조금 숙였다. 민호는 이제까지 남자 몸을 이런 식으로 만져본 적도, 생각도 한 적도 없어서 이상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그게 기범이어서 그런 건 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맞아요?"
"그냥, 남자도 비슷하게 하면 되는 거 아냐?"
"어디 그 생각 어디까지 가나 보죠... 읏...!"
"...생각보다 빠르네."
데워지는 몸의 열기에 조금씩 단 숨을 뱉는 기범이 그의 손을 잡아내리려다 무력하게 떨어졌다. 촉촉하게 물기가 남은 등으로 느껴지는 민호의 숨을 고스란히 받고 있던 기범이 가슴을 더듬는 그의 서늘한 손에 낮은 신음을 냈다. 이를 악물었는지, 나오는 소리가 눌려있다. 그 억지로 참는 신음에 민호의 꾹 다물었던 입술이 벌어진다. 가슴 위의 한 손은 두고 젖어서 무거워진 진청의 스키니진으로 다른 손을 가져간다. 버클 위를 손가락으로 두어 번 건드리던 민호는 잠시 무거운 숨을 내뱉으며 손을 멈췄다.
"어떻게 해야 되냐."
"......네?"
기범의 눈이 살짝 흐릿해져있다가, 찬물을 끼얹는 말에 다시 초롱초롱해졌다. 아, 설마... 이 다음부터 모르는 거?
"선배... 어떻게 하는지 몰라요?"
"알 리가."
"진짜, 김 빠지네요... 그냥! 여자랑 하던 대로 해요 그럼."
기범이 힘 쭉 풀린 얼굴로 민호에게 기대버린다. 내가 뭘 바래, 저 목석같은 남자한테. 먼저 반한 사람이 지는 거라지만... 그냥 본능으로 하면 되지, 그 정도 센스도 없냐. 등의 푸념을 속으로 꿍얼거린 기범은 이내 작게 웃고 말았다. 정말로 몰라서 물어보는 것 같아서, 귀엽기까지 했달까. 평소의 민호를 생각하면 이런 일은 꿈도 못 꿀 텐데, 자신을 좋아하니까 몰라도 해 보겠다는 게 꼭 어린아이 같아서 더 그랬다.
여자랑 하던 대로, 라면... 민호가 여자랑 잘 때 어떤 식으로 하는지는 모르지만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을거라 생각한 기범은 가만히 제가 여자를 다룰 때를 생각해봤다. 보통이라면, 지금부터 인서트를 할 것이다. 여자는 남자와 달리 앞의 무언가가(?) 없으니까. 민호에게 기댄 채로 기범은 빠르게 머릴 굴렸다.
"아... 맙소사."
중요한 게 있었다. 기범은 전희행위없이 그냥 인서트를 하면... 자신만 죽어날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할 수 없지, 최대한 내가 푸는 수 밖에. 내가 어쩌다 노멀을 좋아해서 이 생고생을... 남자랑 했다면 그 쪽에서 알아서 해 줬을텐데.
"선배, 조금만 기다려봐요."
"......"
기범은 민호의 몸에서 일어나, 제 손으로 버클을 풀었다. 사실 스스로 이러는 거, 남이 보는 앞에서 하려니 창피한 게 당연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저 잘난 얼굴을 와르르- 무너지게 하는데 이 정도야. 민호의 정직하다 못해 금욕적인 얼굴은 묘하게 기범의 승부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해도 지금처럼 무심한 얼굴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과연?
"읏......"
"......"
기범의 손이 제 아래춤을 잡아 몸을 풀어주는 걸 가만히 내려다보던 민호의 미간이 좁혀진다. 기범의 손에 속도가 붙을수록, 그의 신음이 더 거칠고 진득해질수록, 민호의 얼굴이 경직되어갔다. 말간 물기가 맺힐 때 즈음, 기범이 잠깐 손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리가 풀리고 정신이 혼미했지만, 일단 한 번은 끝내야했다. 그래야 자기도 민호도 편할테니까. 누구를 위해 김기범은 X을 치는가... 기범은 그 생각을 하자 고개를 푹 숙이고 오만상을 썼다. 굴욕이다. 잠자리에서는 언제나 여왕님 대접을 받았건만... 이게 웬 망신.
유리창에 한 손을 올린 채 몸을 지탱하던 기범이 숨을 고르고 끝을 내려는데...
"허...ㄱ...! 서, ...선배......!!"
"...내가 가르쳐 달랬지, 니가 다 하랬냐?"
올려진 기범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깍지를 낀 민호는 다른 손으로 기범의 아래를 덥석(기범이 느끼기에) 잡아왔다. 기범이 소스라치게 놀라 민호의 팔을 부여잡았다. 민호는 뒤에서 그를 안듯, 물기가 맺힌 기범을 감쌌다. 자신과는 다르게 식어있던 타인의 손이 닿자, 기범의 몸이 떨렸다. 바닥으로 맺혔던 물기가 툭, 떨어졌다. 민호의 손이 느리게, 하지만 확실하게 기범을 데웠다.
"아...... 으, ㅅ......선배..."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몸이라 그런지, 아니면 그게 민호여서 그런지, 남의 손에 이렇게까지 반응하기는 처음이었다. 기범 자신이 할 땐 의식적으로 눌렀던 신음이, 민호의 손이 닿자마자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다. 민호는 잘 배운 학생처럼 차근차근 기범을 끝으로 몰아갔다.
"이제... 놔요, 선배...!"
"야... 고개 들어봐."
제 몸 상태를 감지한 기범이 민호의 손을 떨어뜨리려 하자, 민호는 생뚱맞은 소릴 한다. 기범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휙 들었는데, 아... 반들거리는 유리에... 하얀 얼굴이 붉게 물든, 더운 열락에 들뜬 한 남자가 있었다. 반쯤 벗겨져내린 몸과, 뒤에서 담담한 얼굴로 있는 민호. 그의 시선은... 유리창 속의 기범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한 방 먹은 얼굴로 멀뚱히 서 있는 기범의 귓가에, 민호의 놀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해, 너."
"...아, 선배!!!"
"그런 얼굴을 해선... 몇 번이나 다른 남자 밑에서 앙앙거렸을까."
"여자 취급 하지 마요! ...아......으응..."
발끈하는 기범이 웃긴 지, 입가에 미소까지 띄운 민호는 이젠 그의 손을 타고 흐르는 미끈한 체액을 내려다보았다. 바르르 떨리는 기범의 몸을 안은 채, 손에 힘을 풀었다. 민호의 손을 흥건히 적시며 바닥에 떨어진 맑은 체액과 동시에, 기범이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휘청거렸다. 기범의 허리를 감싸 안은 민호가 가볍게 혀를 찼다.
"저런...... 벌써 힘든가보네."
"...시끄러워요...... 선배 선수죠... 처음이란 거 다 거짓말이죠...?"
민호는 신경쓰지 않고 늘어진 기범의 몸을 들어다 바로 옆에 있는 침대에 눕혔다. 보송하고 푹신한 이불과 베개 때문에 잠까지 오려고 했다. 민호는 눕혀진 기범의 몸 위로 올라와, 어느새 그의 눈 끝에 맺힌 물기를 손가락으로 쓸어주었다.
"울지마, 벌써부터 울면 곤란한데."
"...완전 낚였어요, 저."
"왜 낚여? 난 정말 처음이라니까."
"가뜩이나 요즘 안 해서 쌓였는데... 선배가 자꾸 괴롭히니까 내가 울기 싫어도 몸이 우는 거잖아요."
"그래, 마음대로 생각해라."
민호는 작게 웃으며, 젖은 기범의 옷을 하나하나 거둬 침대 아래로 내려놓았다. 그 웃음에 또 넋 빼고 있던 기범이 휑해진 제 몸을 내려다보며 이불을 휙 위로 덮는다. 민호는 딱히 제지도 하지 않고 그냥 제 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다.
"선배 몸 처음 보네... 근육 있어요?"
민호는 대답하지 않고 셔츠 단추를 끝까지 풀었다. 상체를 탈의한 민호의 몸은 우락부락 식스팩 뭐 이런 건 아니었지만, 적당히 균형잡힌 마른 근육과 매끈한 배가 보기엔 좋았다. 기범이 쿡쿡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하하하, 나 이런 몸 되게 좋아하는데. 선배 얼굴만 내 취향인 줄 알았더니 몸도 내 취향이네요."
"기뻐할 일인가...?"
"서로 좋은 게 좋은 거 아니에요? 선배도 내 얼굴 진상이면 안기 싫었을걸요?"
"그쯤 하자."
몸 위에 덮인 이불을 치워내려던 민호의 손을 잡은 기범이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쳐왔다. 민호는 가만히 기범의 입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 선배는 후회 안 해요...?"
"......?"
민호가 의아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린가 했는데, 기범의 얼굴은 진지했다.
"따지고 보면, 선배 나 때문에 게이 된 거나 마찬가지인데..."
"...무슨 말이 하고 싶어, 너."
"나중에 선배가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하고, 이래도... 나 좋아했던 거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요."
민호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몸을 숙여 기범의 목과 어깨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기범이 조금 움찔거리다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어떤 식으로든, 난 다른 사람에게 안 좋은 기억으로 남기 싫어요."
"......후우."
"지금까지 날 거쳐갔던 사람들도... 난 좋은 기억으로 웃고 넘길 수 있는 존재로 남길 바래요. 지금도 그렇고... 그건, 선배라서 더 해요."
민호는 자신의 뒷머리에 올려진 기범의 손을 잡아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기범의 바로 위에서 그의 얼굴을 마주 본 그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너는... 가만보면 너무 자신을 움츠리게 해."
"......선배..."
"겉으로는 자신만만하고 당당하면서, 왜 널 대하는 사람에게는 잔뜩 움츠러들어서 좋은 기억으로만 남는 걸 요구하는지 모르겠다."
"......"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둘 다 추억으로 기억에 남아. 네가 그 '좋은 기억' 으로 남기 위해 널 거쳐간 사람들에게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혹여 그 때문에 마음이나 몸이나 다 열지는 마."
"선배......?"
"너 지금 내 기억에 '좋게' 남으려고 몸 주는 거 아니지. 그래서 마음 주는 거 아니지. 너 분명히 나한테 말했어, 지금까지 나만큼 좋아한 사람 없다고. 틀려?"
"...맞아요. 분명히 선배는... 지금까지 선배만큼 내가 좋아한 사람 없었어요. 그래서... 처음에 자는 것도 망설인 거고..."
"그럼 이렇게 말하는 거 나한테 실례야. 마치 내 기분에 맞추려고 몸 내주는 거 같이 들려서, 기분 나빠. 다시는 이런 소리 하지마. 네가 좋은 기억으로 남을지 나쁜 기억으로 남을지는 상대가 판단하는 거야. 니가 멋대로 예측해서 행동하는 건 말도 안돼. 넌 너 답게 행동하면 돼."
"......"
"이젠, 네 얼굴에 만들어진 얼굴 덮어쓰는 거 그만해라. 그거 너도 힘들고, 알고 보는 사람도 힘들어. 그래서 내가 처음에 너 마음에 안 들어했던거야."
기범이 코 앞에 있는 민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무뚝뚝하고, 너무 이성적이고 차가워서 이런 말도 매섭게 할 줄 알았는데... 눈물이 나올 정도로 다정했다. 말 자체야 뚝뚝 끊어지긴 했지만 그 어감이 너무 다정해서, 꼭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좀 쉬라고, 이제 남 의식해서 감추는 거 그만해도 된다고...
미국에 살면서 귀신을 보는 무당 아들이라고, 심하면 주워 온 귀신 자식이란 소리를 들으며 자랐기에, 커 가면서 만들어진 기범의 처세술은 너무 뛰어났다. 그 때문에 성인이 되고 지금 나이가 되도록 기범은 귀신 관련한 이야기에는 일절 입을 다물었고, 미국에서의 그 아이들의 기억에 자신은 최악으로 남겨져 있다는 생각에 그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좋은 기억으로만 남기 위해 노력했다.
기범은 모든 사람들에게 살갑게 대하고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해 사랑받았고, 그들은 그런 기범을 좋아했다. 그 '좋은 기억' 의식은 심지어 관계 중에 상대가 싫어할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고, 여자는 덜 했지만 남자들의 관계 요구까지 제 몸이 힘들어도 받아들이게 했다.
유일하게 그런 기범의 진실을 알아챈 사람이, 민호였다.
민호만이 진짜 김기범을 알았다. 기범이 실제로는 너무 솔직한 성격의 사람이라는 거, 그래서 모든 걸 숨기느라 힘들어한다는 걸. 그 사실을 기범이 알게 되고부터 그는 민호에게 모든 걸 하나씩 털어놓게 되었고,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때문에 기범은 유독 민호에게 '좋은 기억' 으로 남고 싶어했고, 평소에는 알아서 행동했으면서, 절대 물어보지 않았을 '후회' 에 대한 것까지 입 밖에 꺼냈다.
민호는 그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기범에게 '진짜 김기범' 을 잔인할 만큼 정확하게 말해주었을 뿐.
기범은 민호의 큰 눈을 들여다보다가, 그의 목 뒤로 팔을 감았다. 서로의 가슴이 맞닿을 정도로.
"......선배."
아련하게 쳐다보며 민호를 부르는 기범 때문에, 그의 하체로 내려가던 민호의 손은 얻어진 것도 없이, 다시 올라와 버렸다. 막 다음 진도(?)를 나가려던 민호는 아예 체념한 얼굴로 기범을 내려다보며 왜, 했다. 기범의 눈이 좀 젖은 것 같다면, 기분 탓일까. 민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 바람에 기범의 금발이 몇 가닥 붕 떴다가, 가라앉았다.
"진짜 손 많이 가네... 이런 쓸데없이 귀찮은 애를 못 알아챈 '너' 의 놈들은 뭐야 대체."
"선배, ......키스 해 달라고 하면, 나 때릴거죠."
언젠가 들어봤던 기억이 있는 대사에, 민호가 살짝 인상을 썼다. 침대 위로 지탱하고 있던 두 팔 사이의 기범을 보던 민호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을 한 그를 잠시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민호의 입술이 슬그머니 벌어지더니, 헛웃음을 짓는다. 엉뚱한 곳에 짚어졌던 민호의 손이 제 자리를 찾아, 기범의 하얀 몸을 가린 이불을 거두어내었다. 그리고 다음에 들려온 민호의 말에, 진지한 얼굴이던 기범마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 이번에는 때릴거야."
Morality EP.4 남겨진 기억에 입맞춤을 written by. Rosetta
"김 팀장님!"
"...왜 그래요, 수민 씨? 아, 설마...... 김기범 아직도 안 왔습니까?"
"네, 아뇨, 그것도 그렇지만요...!"
아직 여름의 더움과, 벌써 가을의 서늘함이 느껴지는 9월.
초가을의 묵지근한 햇살이 사무실로 낮게 파고들어왔다. 그 때문에 사무실은 나른했고, 컴퓨터 돌아가는 소리와 팩스기 소리, 철제 의자 소리마저 푹 가라앉아 있는 듯 했다. 그런 느긋한 공기를 깬 건, 수민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자그만 주먹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종이 한 장이 꼭 쥐어져 있었다. 종현은 그녀 쪽으로 느리게 시선을 주었다.
종현의 앞까지 뛰어 온 수민은 헥헥거리다가,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 종이를 종현의 앞에 내밀었다. 종현이 엉? 하며 받아들었는데, 얼른 읽으라며 수민이 팔랑팔랑 손짓을 한다. 옆에 있던 태민까지 빠꼼히 고개를 내밀어 그 쪽을 본다.
"방금 온 팩스인데, 김기범 선배가 보낸 거예요."
"엉? ......이게 뭐야...?"
종현이 종이를 펴 읽다가, 첫 문장부터 뜨악한 얼굴을 했다. 이게 무슨 소리? 종현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여러 번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봐도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분명 구깃한 하얀 종이에 매끄럽게 인쇄된, 무슨 시 같기도 한 짧은 단문이 그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종현은 입까지 헤벌린 채, 종이에 쓰인 글들을 빠르게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점점 그의 눈이 종이의 하단으로 내려 갈수록 종현의 입은 꾹 다물어졌다. 묘한 긴장감에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며 일을 하던 직원들 마저 하나 둘씩 종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김기범 이게 진짜..."
"팀장님, 왜 그러세요...? 기범이 형 무슨 일 있대요?"
"수민 씨는 가봐도 좋습니다. 고마워요."
"네에, 팀장님... 괜찮겠죠...?"
"워낙에 별종이니... 별 문제 없... 겠죠, 뭐."
태민이 걱정이 되었던지, 수민과 짧은 이야길 하는 종현 쪽으로 바짝 붙으며 그의 손에 들린 종이를 들여다본다. 태민이 그것을 보는 동안에, 종현은 휴대전화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태민은 두릿두릿, 눈을 굴리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죽은 자들의 무도회...? 이게 뭐지? 무슨 노래 가사인가...?"
태민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대고 있는데, 사무실 문이 다시 열렸다. 태민이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들어온 사람은 사라진 기범이 아닌 민호. 오후에 고등학교 은사님의 상갓집을 다녀오는 바람에, 이제서야 막 사무실로 돌아온 민호였다. 아무래도 깊은 사제 관계였기에 밤까지 남아있으려고 했지만, 어제도 다녀왔었기에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검은 슬림수트를 입은 그는 늦은 오후의 햇볕이 좀 더웠던지, 목을 죄고 있던 검은 넥타이를 수트팬츠 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였다. 민호가 이상한 사무실 분위기에 의아해하고 있을 때 마침 전화가 연결되었는지, 종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기 형? 나 종현이."
[뭣 때문에 전화했는지 알 것 같다. 너도 봤지, 종현아.]
"형도? 어... 보기야 봤는데... 걔 지금 무슨 생각하고 이러는 거야?"
[에휴, 나도 모르겠다. 오늘이 기범이 어머니 기일이라 어머니 뵈러 간 건 아는데... 이번에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재작년하고 작년엔 오전에 납골당 가서 오후에 멀쩡히 사무실로 왔는데...]
"그러고 보니... 여태 김기범이 어디 있는 납골당 가는 건지도 모르지 않아?"
[으아아... 맞다! 어디 있다는 것도 안 물어봤고! 기범이가 가르쳐 준 적도 없다! 너 알아, 김종현?]
진기의 울상어린 목소리에 종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인상을 쓰며 머리를 마구 긁적이던 종현이 허탈하게 중얼거린다.
"솔직히, 기범이는 5년 동안 해 온 거라지만... 나랑 사무실 사람들은 그거 안 지 3년 밖에 안 됐고, 이 날 가는 거 본 것도 두 번이 전부잖아. 형 말대로 그 녀석이 가르쳐 주지도 않아서 어딘지는 전혀 몰라."
[그럼 어떡하게? 나 그 팩스 받고 놀라서 바로 전화해 봤는데, 오피스텔에도 없고 전화도 안 받아.]
종현은 잔뜩 인상을 쓰고 있다가, 김기범 이 자식이... 하며 잠깐 신경질을 냈다. 시선을 돌린 종현의 눈에 민호와 태민의 얼굴이 들어왔다. 태민이 건네 준 종이를 읽은 민호도, 민호에게 간단한 상황을 말해 준 태민도 좋지는 않은 얼굴을 한 채 종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기의 한숨이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오자,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떡하기는... 찾아야지, 뭐. 유일한 단서는, 그 이상한 글 하나 뿐이지만."
"하, 김기범 이거... 우리 요새 일 없다고 이런 걸 던져주고 가냐. 그리고 지 이름을 왜 똑바로 안 쓰고 죄다 풀어썼대, 이름 뒤에 2는 뭐고. 어휴, 어디 찾기만 해 봐. 그 머리털을 홀랑...!"
"기범이 선배 원래 오늘 오시는 거죠? 저녁이 다 되어가도 안 오시네요..."
"이거 봐선 걔 작정하고 간 거야. 내가 아는 김기범은 아무 이유도 없이 이런 거 하나 남기고 잠적할 녀석은 아니니까. 목적은 두 가지 정도? 요새 큰 사건이 없어서 심심해했던 우리를 재밌게 해주려고 했던가..."
"아, 팀장님- 농담하지 마시구요."
종현이 한숨을 푹 쉬며 책상 위로 쥐고 있던 종이를 던졌다.
"......아니면 어머니 기일인 오늘... 이번엔 전과 달리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던가."
종현이 말은 그렇게 하면서 걱정이 되었던지, 어두운 얼굴로 잠잠한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태민도 덩달아 말을 잃은 분위기에서, 이제까지 담담한 얼굴로 턱을 괴고 있던 민호가 입을 열었다.
"납치된 것도 아니고, 어디 잘 있겠죠."
정말 남 일이라는 듯 말하는 민호에게 종현이 야 임마, 하고 타박을 준다. 태민도 너무하다며 민호를 야속하게 바라본다. 하지만 민호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죠. 어쨌든 그렇다고 팀장님까지 사무실 비우면 곤란하니까... 제가 찾아올게요."
그러나 그 말에 종현은 더더욱 이상한 얼굴을 했다.
"니가? 니가 찾아오겠다고? 김기범을? 최민호가?"
"...그건 무슨 반응입니까."
인상을 찌푸리는 민호에게 여전히 멍한 얼굴로 종현이 대답했다.
"너무 의외의 님이 납신다고 하니까... 믿기가 어려워서 말이지."
"......"
"너 김기범이의 이 싸이코틱한 암호를 풀 수 있겠냐? 니가 머리가 무지하게 좋은 건 아는데... 나 이건 도저히 모르겠다."
종현이 종이를 팔랑거리며 걱정스럽다는 듯한 얼굴을 한다. 민호가 흰 셔츠 소매를 말아올리며 입을 열었다.
"노래 가사라면서요. 가사 검색하면 노래도 나올텐데."
"그걸 모르겠냐, 그건 아는데... 이게 김기범이 있는 곳을 알아내는 데 도움이 어떻게 되는지가 문제야."
"......그 장소를 가사 안에 숨겨놓았을 것 같은데요, 김기범이라면."
"하지만 이 가사에 어떤 장소가 있...... 혹시..."
태민이 아, 하며 종현과 민호를 본다. 무언가가 생각이 났는지, 땡글한 눈동자가 초롱초롱하다.
"선배는 어머니 기일이셔서 납골당으로 가셨던 거니까요, 그, 납골당의 이름이... 여기 있지 않을까요? 기범이 선배 여기로 오피스텔 구해서 오시기 전에 대구에 사셨으니까, 대구에 있는 납골당 중에서 찾아보면 어때요?"
종현과 민호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종현은 다시 가사가 적힌 종이를 펴들며 말했다.
"납골당이 대구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는 않아. 그렇다면 그 중의 한 곳에 녀석이 있을거야. 하지만 저녁이 다 된 시간에 여전히 납골당에 남아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아마 그 근처 여관이나, 모텔같은 데 있을지도 모르고 죽고 못 사는 쇼핑하러 그 주변을 돌아다닐지도 몰라. 그런 것까지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해지지만... 어쨌든 태민이 말도 일리가 있다. 아마 이 가사에 녀석이 있는 장소까지 나와있을지도..."
"그럼, 문제는 이 가사의 내용이네요. 선배가 따로 표시해 둔 부분은 없을까요?"
태민이 신난 얼굴로 종현이 보고 있는 종이로 시선을 옮겼다. 꽤나 난처한지, 그 부분에서는 종현도 쉽게 답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민호 역시 가만히 글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재미있게도,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담담했다. 마치 반드시 찾게 될 거라는 확신을 하듯.
"눈에 보이게 표시를 한 부분은 없지만... 찾아보면 나오겠지."
민호의 말에 태민이 종이에 박고 있던 고개를 반짝 든다. 정말요? 하며 민호에게 되묻는 태민에게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현까지 눈이 동그랗게 커져선, 민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야, 근데... 그 '찾아보면' 의 기준이 정확하지 않잖아."
"그거 주세요, 오늘 밤에 대구 내려갑니다. ......쓸데없이 귀찮은 일 만드는 김기범 찾아야죠."
"야, 무턱대고 가 봤자 걔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아?"
"그래요, 선배. 선배 혹시 팀장님이랑 제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계세요?"
"아직은 알아낸 게 없어서. 나중에 알려줄테니 기다려봐."
민호는 말없이 종현의 손에서 종이를 빼내 챙기더니, 제 책상으로 가 앉았다. 종현은 멍하니 서 있다가, 실없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참 나... 철저한 계획 없으면 움직이지도 않는 놈이 저렇게나...... 설마, 쟤가 그럴리가..."
"네?"
"아냐, 아무것도. 뭐하냐, 이탬. 일해야지, 퇴근 시간 얼마나 남았다고."
태민은 미소 띤 얼굴로 의자에 앉는 종현과 민호 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진짜 이상하네...... 민호 선배 정말 기범이 선배랑 무슨 일 있었던 건가?"
*
밤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민호는 그 늦은 시간에 차를 끌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조수석에는 무언가가 잔뜩 쓰여져서 시커먼 종이 한 장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내일이 토요일이라 차가 밀릴까봐, 저녁에 출발했더니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뻥 뚫려있었다. 그러나 대구까지의 거리도 거리인지라, 근 네 시간을 달려 구마 고속도로를 지나고 있을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빠르게 휙휙 지나가는 도로 표지판에, 대구(Daegu) 라 적힌 하얀 글자를 확인하자마자, 민호는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기범이 진기와 종현에게 보낸 팩스에는, 그에 대한 것이 전부 들어있었다. 사무실 책상에 붙어앉아, 세 시간 정도를 그 종이와 씨름한 민호는 사무실 사람들이 모두 퇴근하고 나서야 빠르게 움직이던 펜을 내려놓았었다.
"무슨 목적으로 이번에 안 하던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찾기만 해 봐."
민호는 미간을 좁히며 액셀러레이터를 힘주어 밟았다. 요새 좀 느슨해 보였던 기범이 -물론 평소에도 충분히 느슨하다- 이런 돌발행동을 한다는 건,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다. 이건 종현이 내린 판단이었고, 민호와 태민, 그리고 사무실 직원들까지 긍정을 한 부분이었다. 어머니 기일인 건 알았지만, 지난 두 번 모두 오전에 대구에 다녀와 오후에는 얼굴을 비추고 갔던 기범이 그러지 않았다는 건 역시 좀 이상했다. 게다가 전화도 받지 않고 연락두절 상태라니. 아니길 바라며 사무실에서는 태연하게 말했지만, 민호는 대구에 가까워 올 수록 조금씩 불안했다.
무슨 일이 생길 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제껏 수사를 해 오면서 항상 느낀 거지만,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건데.
"...멍청한 짓만 안 하길."
민호는 중얼거리며 몇 시간 전 일을 떠올렸다.
태민이 말했던, 기범이 대구에 있는 납골당이나 그 주변에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토대로 일단 대구의 납골당을 찾았다. 웹 상에 올라와 있는 납골당은 5개였다. 만약... 웹에 검색되지 않는 곳이라면 그냥 기범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게 더 빨랐다. 하지만 민호는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다 할 생각이었다.
대구시립납골당, 민기원, 현유공원, 시의공원과 인여 납골당.
몇 개는 이름이 왠지 모르게 꺼림칙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 다섯 중 한 곳에 기범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다음 문제가 바로 기범이 타이핑한 노래 가사였다. 기범은 가장 위에 제 이름을 써 두었는데, 종현이 투덜거린대로 '김기범' 으로 적지 않고 자모를 모두 풀어놓았다. 그리고 그 아래 자우림의 '죽은 자들의 무도회' 가사의 일부를 적은 다음 마지막에 노래의 제목을 적어두었다.
기범이 남긴 글은 간단했다. 물론 글만 간단했지 텍스트 하나로 패턴을 알아내느라 세 시간동안 민호의 뇌는 온갖 고생을 다 했다. 세로로 앞 글자를 따서 읽어보기도 했고, 대각선 방향 등으로 바꿔가며 문장을 만들어 봤지만 문장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홀수 줄, 짝수 줄만 따로 떼어 보았어도 역시 맞지 않았다. 일정한 글자 수를 건너뛰어 조합해 보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동원한 갖은 방법이 실패한 뒤 민호는 자신의 뇌를 열면 주름 한 두개 정도는 더 늘어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런 민호가 신도 가상했는지, 민호는 우연치 않게 펜을 놀리다가 생각해 보지 않은 쪽에서 그 수수께끼를 풀어냈다.
민호는 풀리지 않는 가사의 내용 때문에 지쳐있다가, 아무 생각 없이 종이에 인쇄된, 기범의 풀어 쓴 이름만 그 위에 줄창 덧쓰고 있었다. 그렇게 덧쓰다가, 그 바로 아래에 기범의 이름을 적어가기 시작했다.
김기범. 기범. 기범이(이건 써 놓고 괜히 창피해서 두 줄을 박박 그었다).
기ㅁ기버ㅁ. ㄱ...ㅣ...ㅁ...ㄱ...ㅣ...ㅂ...ㅓ...ㅁ...
민호는 잠시 이 가사를 다 저렇게 풀어써야 하나, 하는 고민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절대 답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김기범' 을 이룬 글자의 갯수는 모두......
8개.
김기범은 8개의 한글 자모로 이루어진 글자였다.
민호는 퍼뜩 스쳐간 생각에 눈을 부릅뜨고 책상에 바로 앉았다. 왠지 기범이 제 이름을 죄다 풀어 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민호는 아까 시도했었던, 일정한 글자 수를 건너뛰어 조합하는 방법과 비슷하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는 가사를 훑어내려가며, 김기범을 이루는 자모의 수와 같은, 여덟 글자씩을 사이에 두고 바로 다음 글자마다 소괄호를 그려나갔다. 민호는 집중하느라 아랫입술이 굳게 깨물려있었고, 펜을 쥔 손은 미세하게 땀이 배어있었다.
차가운 대리석의 무(도)회장 음울한 음악이 (흐)르네
회색 먼지와 회(색) 드레스 낡아빠진 옛 (얘)기
흔들 흔들 흔들 죽(은) 자들의 무도회
영원(한) 것은 무엇도 없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죽(음)을 향해서 달리네
다(시) 먼지는 먼지로 허무(한) 생의 종막으로
짧은 (입)맞춤에 긴 이별 축제(에) 안녕을 고하네
시간(이) 멈춰 버린 무도회장 (우)울한 어둠이 흐르네
(망)각의 강을 떠다니는(건) 흔해빠진 무용담
흔(들) 흔들 흔들 죽은 자들(의) 무도회
죽은 자들의 무도회
민호는 괄호 속의 글자들을 다시 나열했다.
'도흐색얘은한아음시한입에이우망건들의'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민호는 실망한 얼굴을 하다가 풀어 쓴 기범의 이름 바로 뒤에 붙은 숫자 '2' 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민호는 아, 하더니 다시 볼펜을 들고 한번 더 같은 방법으로 괄호를 그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저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지르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찾았다!"
'도흐색얘은한아음(시)한입에이우망건들(의)'
'시의'
'시의공원' 이 틀림없었다. 이게 맞다면, 김기범은 지금 대구 시의공원 납골당에 있을 것이다.
민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종이를 말아쥐었다. 그는 벗어두었던 수트 자켓을 낚아채듯 손에 들고, 사무실 문을 서둘러 잠갔다. 그의 빠른 구두 소리가 조용한 복도를 울려대었다.
회상을 끝낸 민호는 잠시 후 출구를 통해 고속도로를 빠져나갔다. 네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대구의 시의공원을 찾아가고 있던 민호는 운전을 하다가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도 우리가 못 찾아서, 설마 먼저 올라간 건 아니겠지. 그러면 절대 가만 안 둔다, 진짜."
민호는 이를 악물고 휴대전화를 들어 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종현이 후딱 전화를 받는다. 퇴근해서도 내내 기범이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민호냐? 어떻게 된 거야! 그 글은 풀었어? 기범인?]
"아, 하나씩 물어봐요. 일단 그거 풀었습니다. 어떻게 한 건지는 올라가서 말씀드릴테니까 나중에 얘기하고, 지금 저 대구에 있는데 김기범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납골당으로 가고 있어요."
[진짜? 와, 최민호 진짜- 역시 니 머리가 말로만 좋은 머리가 아니구나. 알았어, 수고했어! 기범이 찾으면 바로 연락해라, 태민이한테는 내가 말해둘게. 옆에 있......아니아니아니!]
민호는 조용히 한 쪽 눈썹을 밀어올렸다. 옆에 있다고? 이 시간에? 급당황한 종현의 우렁찬 목소리도 충분히 의심스러운 그였다. 민호는 피식 웃으며 백만년만에 제 역할을 한 눈치를 이용해 종현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십쇼, '이 야심한 시각에 팀장님 옆에 있는' 태민이한테 꼭 좀 전해주세요."
[야, 최미...$^!$%$!!!^%#!!!!!]
뚝.
산뜻한 기분으로 폴더를 닫은 민호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적한 동산 위에 환하게 불이 켜진 건물을 발견했다. 꽤 큰 납골당이어서, 멀리서 보면 거의 작은 전시관을 연상케 할 정도로 규모는 컸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민호는 일교차가 큰 가을 밤이라 쌀쌀한지, 제 팔을 몇 번 쓸며 걸음을 옮겼다.
※ 보통 납골당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은 17시까지입니다. 명절 등 성묘 기간에만 20시 정도로 연장하고, 실제로 이렇게 늦은 시간에는 납골당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참고해주세요.
"......추운데 잘도 있겠네. 그나저나 모텔 같은 데 들어갔으면 곤란한데."
입술 사이에 담배를 문 채 작게 투덜거린 민호는 수트 자켓을 껴입었다. 입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를 흘리며, 민호는 납골당 입구로 향했다. 상아와 대리석으로 만든 납골당의 하얀 건물은 지나치게 깨끗해 보여서, 오히려 이질감이 들었다. 납골당 내부로 들어가기 전, 민호는 아, 하고 안타까움이 섞인 탄식을 뱉으며 담배를 비벼 껐다. 금방 불 붙인건데.
납골당의 관리소에는 순찰을 나간 건지, 경비원은 보이지 않았다. 민호는 그냥 피우고 있을 걸, 하는 생각을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잘 닦인 구두가 대리석 바닥과 닿아 뚜벅뚜벅 소리가 났다.
'아주 옷까지 제대로 입고 온 셈이네. 국화라도 사 올걸 그랬나.'
상갓집에 다녀오느라 입은 자신의 검은 수트를 한 번 내려다 본 민호의 생각이었다. 민호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며 납골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유리문 안에 들은 비슷한 모양의 분골 단지들을 보며, 민호는 담담히 그것들을 지나치고 있었다.
아마 이 중에는, 기범의 어머니가 잠들어 계실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버려진 기범을 키우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 아들이 다 자랄 때까지 또 품어주고, 한국에서 생을 마친 그의 어머니가. 기범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대학 공부를 했다. 한국에 돌아온 건 미국의 P대학 물리학과에서 조교로 있던 그에게 한국 CSI에서 트레이딩 요청이 들어왔을 때였다.
어쨌든 기범을 낳은 것은 아니지만, 보다 훨씬 더한 사랑과 정으로 기범을 키웠을 그의 어머니가 이 곳에 있다는 생각을 하니 민호는 기분이 묘했다. 갑자기 인천에 계실 민호의 부모님도 생각이 났다. 그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넣었던 넥타이를 다시 목에 둘렀다.
"그나저나, 어디 있는 거야, 대체..."
민호는 맨 타이를 바로잡으며 미간을 좁혔다. 그의 걸음이 좀 빨라졌다. 그리고 다섯 번째 장을 지났을 때, 민호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유리문에 기대어 있는 익숙한 머리통 때문에.
"......후."
기범은 기대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고, 허리에는 혹시라도 뻐근할까 제 가방을 대서 받쳐놓았다. 그는 고개를 젖히고 다리를 쭉 편 상태로 잠이 든 듯해 보였다. 이 추운데 셔츠 한 장 위에 좀 두툼해 보이는 아이보리 색의 니트 차림이다. 하긴 죽고 싶으면 무슨 짓인들 못하냐고들 하지만... 어쨌든 기범은 민호가 짜증이 날 정도로, 상당히 편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마른 다리가 회청색 스키니진에 싸여 편하게 늘어져 있다. 하얀 얼굴로, 목덜미로 곧게 펴진 반짝이는 금발이 흘러내려 있었다.
그 말간 얼굴과 찬 공기에 살짝 붉어진 뺨을 본 민호는 일단 화가 치밀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안 하던 짓을 해서 여러 사람들을 죄다 걱정을 시키는 건지, 왜 이번에는 제때 돌아오지 않았던 건지, 오고 싶지 않으면 그렇게 말할 것이지 왜 알 수 없는 종이만 덜렁 던지고 사라진 건지, 왜 전화는 꺼 놓고 받지를 않았는지.
그리고, 왜 자꾸 심장이 덜컹거릴 정도로 걱정을 시키는지.
"......야."
"......쿠..."
"야, 일어나."
민호는 기범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못 만질 걸 만지는 듯 검지로 기범의 이마를 꾹 눌렀다. 기범은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르는 무감각 구조상 여전히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었다. 다시 불렀어도 조금 뒤척이기만 할 뿐, 눈은 뜨지 않았다. 민호는 한 대 쥐어박을까 하다가 이러고 자는 게 불쌍해서 그만두었다. 민호는 비몽사몽인 기범의 한 쪽 팔을 쭉 잡아당겼다. 그러자 기범이 휙 딸려오다가, 인상을 찡그린 채 다시 기대버린다.
얼씨구, 이것 봐라.
민호는 허, 하고 기가 찬 헛웃음을 뱉었다. 민호는 정말 귀찮다는 얼굴을 하고, 기범의 어깨를 한 손으로 휘덕휘덕 흔들며 잔뜩 가라앉은 저음으로 말했다. 물론 이 목소린 본인이 원한 건 아니었다. 밤이라 그런 것 뿐.
"빨리 안 일어나지."
"......아...씨... 아저씨이... 좀만 더 있다 간다니까요...... 기다리는 사람... 있단... 말......"
"...아, 씨?"
"......쿨."
민호는 인상을 팍 쓰고 기범의 어깨를 턱 잡았다. 고개를 조금 틀어, 기범의 귓가로 바짝 다가간 민호는 그 상태로 입을 열었다.
"...당장 눈 안 뜨면 버리고 갈 줄 알아."
"......"
"......"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길게 내려앉아있던 기범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들어올려진 속눈썹 아래로, 그의 고동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기범은 가만히 코 앞에 있는 민호의 얼굴을 보았다. 눈만 끔벅거리고 있던 기범이 쳇, 하며 제 어깨를 잡고 있던 민호의 손을 떨쳐냈다.
"...난 또, 안 일어나면 키스해버린다,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역시 선배가 그런 걸 해 주길 기다리기보다, 팀장님이 내게 1년 휴가를 주는 게 더 빠르겠네요. 그쵸?"
"......"
할 말을 잃은 듯한 민호를 내버려두고 자리에서 으차, 하며 일어난 기범이 제 엉덩이를 툭툭 턴다. 민호는 한숨을 쉬며 다리를 폈다. 기범에게서 등을 돌리고 한 걸음을 내딛은 민호를, 기범의 말이 잡았다.
"선배가 올 것 같았어요, 아니... 선배는 올 것 같았어요."
민호는 휙 뒤돌아섰다.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민호에게, 기범은 예의 그 나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가사, 봤죠? 엄청 빨리 풀었네... 선배라도 한 하루는 걸릴 줄 알았는데."
"......무슨 저의였어."
"저의라뇨, 너무 무섭게 말하지 말아요. 선배 알고 있었어요?"
민호가 옅은 미소까지 띤 기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 쪽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민호는 계속 말해보라는 듯한 얼굴을 했다. 기범은 헝클어진 매무새를 대강 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 다음에 나온 기범의 말에, 민호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여진이 이장된 곳... 여기라는 거."
"...뭐...?"
"한달 전인가... 재개발 문제 때문에 시신이 이장되었다고 수진 씨한테 들었어요. 병원에 찾아갔을 때."
재조사 후 실족사로 판명되었던 여진의 묘가 이장되었다는 말은 민호도 들었다. 하지만 묘를 다시 쓴 게 아니라 아예 그 시신을 화장해 둔 곳이 기범의 어머니가 있는 납골당이었단 사실은 모르고 있었던 거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여진이 이장된 곳에, 그녀가 먼저 있었다는 걸. 민호는 굳어있던 얼굴이 저도 모르게 풀린 상태로, 멍하니 되물었다. 기범은 그런 그를 보고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몇 마딜 덧붙였다.
"아하하, 그렇게까지 멍한 얼굴 할 필욘 없잖아요. 뭐... 어쨌든 그래요. 우리 엄마가 있는 곳에 여진이도 함께 오게 되었더라구요. 원래 태어난 곳이 대구라나 뭐라나..."
"설마, 그것 때문에 이 일을 벌였다는 건 아니겠지."
"그럴리가요. 전 그냥... 죽은 자들의 무도회에 산 자로 참석했을 뿐이에요. 어디까지나 관객이니까. 그래서 선배도 초대한 건데."
"......후우."
또 놀리고 있다. 기범이 내고, 민호가 푼 문제를 가지고.
기범은 싱긋 웃으면서 제 뒤에 있던 유리문에 천천히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물론 농담이구요...... 우리 엄마예요, 선배."
"......"
민호는 처음 보는 기범의 얼굴에 섬찟하게 들던 느낌을 지웠다. 유리 너머 분골 단지를 바라보고 있는 기범의 얼굴은, 전과 다르게 가라앉아있었다. 슬프다기엔 담담하고... 아무렇지 않다고 하기엔 아련한. 찬 유리 위에 단지의 윤곽을 따라 그리던 기범이 손가락을 떼 고 민호를 돌아보았다.
"우리 엄마 예뻐요. 여기 사진도 넣어뒀는데."
"......자라면서 어머니 좀 닮지 뭐 했냐. 너 못생겼어."
민호가 기범의 옆으로 와 그녀의 사진을 들여다보더니, 툭 내뱉는다. 기범은 전혀 개의치 않고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어머니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민호의 퉁명스러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는 거다. 민호는 그런 기범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그 묘한 얼굴로 안을 들여다보는 기범을 보던 민호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처음엔 화가 나서 왜 이런 건지 모두 따지고 싶었는데, 막상 이런 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해져버렸다.
"......너..."
기범을 보던 민호가 그를 부르려다가, 말끝을 흐렸다. 기범은 빨간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어머니의 분골 단지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비록 차고 딱딱한 유리가 사이에 있었지만, 기범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진중한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아주 잠깐, 그렇게 입술만 대고 있던 기범이 얼굴을 떨어뜨린다. 촉, 하는 소리와 함께 떠진 기범의 눈이 잠시 단지에 머물러 있었다.
"......엄마, 여기 여진이란 애도 있으니까... 딸처럼 아껴 줘. 그럼 엄마도 여진이도... 적적하지 않을테니까."
기범은 제 앞에 어머니가 있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을 했다. 민호는 어쩌면, 기범의 귀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기범이 민호 쪽을 한 번 보더니,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두었다.
"엄마, 엄마 아들이 좋아하는 사람 왔어. 되게 잘생겼지? 머리도 엄청 좋아. 엄마 스타일인데... 내가 선수쳐서 어쩌지? 아하하하."
민호는 잠자코 기범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기분나쁘게 그런 소리하지 말라느니 하는 말은 전연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민호는 그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기범이 어머니에게 그에 대해 말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었다.
"엄마, 올해는 깜빡하고 돈을 안 가져와서... 멋있는 남자 데려왔으니까... 내년에는, 맛있는 거 사 가지고 올게요. 알았지? 엄마...... 너무 보고싶다. 엄마, 사랑해."
흐흐, 하는 맥빠진 웃음소리를 내던 기범이 유리문에 가만히 손을 올리고 있다가, 툭 떨구었다. 민호는 그 옆에 서 있다가, 고개를 숙여 목례를 했다. 절까지는 그렇고, 그냥 편히 쉬시라는 말만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한동안 그렇게 서 있던 기범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민호 쪽으로 돌아서서 그에게 웃어보인다. 민호는 의외로 멀쩡하네, 하는 생각을 하며 납골당 출구 쪽으로 먼저 향했다. 오래 운전을 해서 피곤한 것도 있지만, 기범을 어머니와 둘이 있게 해 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민호는 이제 드문드문 불이 켜진 공원 밖으로 나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아까 다 피우지 못한 담배 몫까지 깔끔하게 두 개비를 태운 그는 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지고, 다시 담뱃갑을 툭툭 손등에 털었다. 쌀쌀한 날씨도 담배 앞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못했다. 피우니 콧속까지 알싸한 것이, 저절로 몸에 열이 붙는다.
......지난 여름밤의 김기범처럼.
민호가 다시 새 담배를 입에 물고 지포라이터를 켰는데, 하얀 손이 물려있던 담배를 휙 채어간다. 그의 낙을 방해받은 게 불쾌했는지, 민호의 미간이 구겨진다.
"내놔."
"그만 피워요, 저 뒤에서 계속 봤는데 무슨 담배를 그렇게 많이 피워요? 그러다 폐 홀랑 숯덩이 되면 어쩌려구. 선배는 흡연의 심각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폐는 간이랑 달라서 재생도 안 되고, 아니 선배는 그렇다치고 나까지 병 생기면 곤란하다구요. 그러니까......"
폭풍 잔소리 크리. 아주 엄마 한 명을 더 둔 것 같다. 예절교육 담당 엄마. 민호는 다다다다 쏘아대는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귓구멍에 검지를 넣었다 빼며 기범에게서 돌아서버렸다. 갑자기 잔소리가 뚝 끊기길래, 민호는 뭔가 하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너 뭐 하냐?"
"나도 피울 줄 알아요, 내 몸 때문에 끊은거지."
기범은 민호의 입에서 빼내 간 담배를 제 입에 물고 있었다. 물론 라이터가 없어서 불은 못 붙이고 있었지만. 민호는 어디 건방지게 윗사람 담배를 뺏어 피우냐며 도로 가져가버렸다. 필터 부분이 조금 구겨진 담배를 담뱃갑에 다시 쑤셔넣은 민호가 벽돌길을 따라 동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며 기범이 오나 볼 필요는 없었다. 기범은 같이 가자며 투덜대면서도, 곧잘 잘 따라왔기에.
*
"타."
"엥?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요? 대구까지 와 놓고? 우와, 기름 값이 아깝다!"
민호가 운전석 문을 열며 그렇게 말하자, 기범이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그를 쳐다본다. 민호는 그런 기범의 반응을 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기범을 홱 끌어당겼다. 주르르 끌려간 기범은 조수석에 자신을 밀어넣은 민호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그가 문을 닫기 전 가까스로 손을 뻗어 그걸 막았다. 그러자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찡그려졌다.
"손 치워."
"진짜 가요? 네?"
"아, 진짜. 귀찮게 하네."
"지금 올라가면 새벽 3시 다 될 텐데 가게요?"
"문에 손 끼우고 고속도로 한 번 탈까?"
기범의 물음은 귓구멍 솜털로도 안 듣는 민호는 문 닫게 손 치우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기범은 더 버틸까 하다가, 점점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걸 보고서야 투덜거리며 손을 내렸다. 절대 차 문에 손 끼우고 고속도로 타자는 민호의 말이 진심으로 들려서가 아니었다.
기범의 부어터진 얼굴은 보지도 않고 운전석에 앉은 민호는 일절의 망설임도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민호는 정면만 응시하며 운전을 하고 있었고, 그런 잘나빠진 얼굴을 구멍이 뚫어져라 노려보던 기범은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오만상을 쓰며 무릎에 놓여있던 크로스백을 뒤적여 립밤을 꺼내더니, 검지로 찍어 바르기 시작했다.
"내가 이래가 살겠나...... 어쩌다 저런 인간한테 꽂혀서..."
"야."
"왜여, 기름 값 아까울 줄 모르는 선배님."
기범은 자정이 다 되가는 시간에, 설마 민호가 그대로 올라가자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분명 세 시간 내내 대구까지 달려왔으면 피곤할 법도 한데, 그냥 돌아간다니. 참 독한 남자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혹시 다시 제가 싫어졌나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건 둘째치고, 일단 민호와 불 같은(?) friday night, 아니라면 달콤한 주말을 내심 기대했던지라 기범의 불만은 더했다. 아니 좀, 같이 자면 안 돼? 거시기한 일도 딱 한 번 하고 말았으면서. 대체 몇 달이야, 한 지가... 남자가 말이지, 옆에 나 같은 애가 하나 눈 앞에서 왔다갔다 돌아다니면 아무리 남자라도 동하는 게 정상 아니냐고.
물론 일반적인 건 아니다.
어쨌든 자신의 속마음은 눈꼽만큼도 모르는 듯 보이는 민호에게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생각한 기범은, 한껏 비꼬아 대답했다.
"할래?"
기범은 아랫입술에 몇 번이고 덧칠하던 검지를 뚝 멈췄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기로 했다. 저 '할래' 라는 말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수많은 의미가 있겠지만... 이 상황에서 과연 무슨 의미로 말했을까. 기범은 검지를 입술에 댄 채로 패닉이 섞인 생각에 빠졌다.
뭐지. 뭐지. 뭐지. 뭘까. 뭐지?
기범은 생각할수록 복잡한 머리를 일단 정지시키고 민호에게로 고개를 휙 돌렸다.
"......여기서요?"
기범은 그렇게 말해놓고 속으로 헉, 하고 숨을 삼켰다. 뭔 소리야, 저 뜻이 아니면 난 뭐가 되는 거지? 이번엔 제가 내뱉은 말을 수습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민호가 여전히 정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못하겠어? 호텔 갈까?"
"......선배 왜 이렇게 적극적이에요...?"
"그 빌어먹을 종이만 남기고 사라진 거, 내가 찾아줬음 해서 그런 거 아니었냐."
엄마 아들 애인 천잰가봐.
"맞는데요."
기범은 정말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이 나오자마자 민호는 한 손으로 잡고 있던 핸들을 갑자기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잠시 말이 없던 민호가 손으로 펌이 풀린 자신의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너 정말 솔직하다."
"아하하하, 나 원래 그래요. 선배 놀랐어요?"
"아니, 좀... 허무해서."
민호의 말엔 아주 옅은 웃음이 섞여있었고, 기범이 그걸 놓칠 리 없었다. 금세 기분이 풀린 기범이 하하, 웃는다. 립밤을 정리해 가방에 넣은 그는 문득 뭐가 생각났는지, 민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선배, 잠깐 차 좀 세워봐요. 갓길 있으니까."
"걸리면 니가 벌금 내라."
"아, 또또 못된 말 한다. 잠깐이면 되는데."
민호는 그러면서도 도로 옆 갓길에 차를 세운다. 비상등을 켠 민호가 기범을 돌아보며 왜, 한다. 민호는 그 다음에 기범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 빨갛고 얇은 입술이 민호를 덮어버려서. 민호는 갑자기 당해서 좀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는 바람에, 안 그래도 피곤해서 뻑뻑한 눈에 더 물기가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립밤 때문에 미끌거리는 감촉이 이상하긴 했지만, 달큼한 체리 향과 섞인 기범의 향이 나쁘지만은 않아서 그냥 있었다. 꼭 감긴 기범의 속눈썹이 미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홧김에 덮쳤건 어쨌건 매번 민호가 먼저 시작했던 키스라서, 받는 느낌이 생소했다. 물론 처음 잤을 때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는 바람에 지금같은 느낌이 없었다. 그 때가 뜨겁고 축축하고, 진했다면 지금은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달큰하고 폭신폭신한 그런 느낌. 가슴께가 간질간질하고 묘했다. 그렇게 입술을 맞대고 있다가, 민호가 먼저 머리를 뒤로 뺐다. 기범은 입술을 살짝 혀로 핥으며 떨어졌다. 립밤과 타액에 젖어서, 가로등 불빛에 반짝거리는 것도 같았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 보이는 민호에게, 기범이 먼저 웃으며 말했다.
"...선배 입술이 튼 거 같아서요. 고맙죠?"
"......"
말이 없는 민호에게, 기범이 계속 말했다. 아니, 말하기보단 속삭이는 편에 가까웠다. 누군가 듣고 있기라도 하는 듯이. 오렌지 빛의 가로등 빛 때문에 기범의 머리가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곱게 빗어져 내린 금발이 단아한 이마 위로 내려앉아 서늘한 눈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선배, Morality의 뜻이 뭔지 알죠."
"......도덕. 갑자기 왜?"
"그냥, 전부터 생각하던 건데... 우리는 '이성(異性)의 합치' 까지 어겼으니까, 당연히 도덕적이지 않은 거네요."
"이 세상에 도덕적인 인간이 있어? 강도, 살인, 강간, 사기가 난무하는 세상에 도덕은 무슨......"
"우와, 그거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해가 되는 말인데."
기범이 민호의 신랄한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때 벌어지는 붉은 입이, 꼭 토마토를 물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말인데요, 선배."
"어."
"우리, 지금부터 안녕, 할 때까지 Morality를 버리는 게 어때요?"
민호는 그 말에, 그냥 웃어버렸다. 기범의 하얀 얼굴을 손으로 감싸 끌어당긴 민호는 고개를 틀어 조용조용히 속삭였다.
"......이미 나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할 때, 버린 거 아니었어?"
"헐."
기범이 민호의 손에서 벗어나더니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한다. 민호는 이건 또 무슨 반응, 하며 그런 기범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배시시 웃더니, 민호의 뺨에 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춘다. 민호의 긴 손가락이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다.
"아하하하, 그러네요."
"아."
"에, 왜요?"
민호가 갑자기 낮은 탄식을 내서, 기범까지 의아해했다. 민호는 기범의 머리카락 속의 제 손을 빼지 않은채로 느긋하게 대답했다.
"아니. ...진기 형한테 전화하는 걸 잊었어. 팀장님보다 심하게 걱정하시던데."
기범 역시 걱정된다는 투로 말을 했다. 어디까지나, 어투만.
"음...... 그러게요. 진기 형 성격에 보통 걱정하는 게 아닐텐데...... 그러니까, 오늘은 자고 내일 해요."
민호와 기범을 태운 차는 갓길을 빠져나와, 매끄럽게 유턴을 했다. 정말로 그 길로 호텔을 갔는지는 그 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깊은 밤, 그들의 차가 떠난 한적한 도로에는 서늘한 가을 바람과 일정한 간격으로 오렌지 빛을 쏟아내는 가로등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Morality EP.4 남겨진 기억에 입맞춤을 結
Morality Epilogue
Rrrr...... Rrrr......
"...으음...... 누구...야......아침부...터......"
"......더 자."
Rrrr...... Rr,
".......네, 형."
[야, 민호야앍!!!]
"......제 휴대폰 멀쩡합니다."
[기범이 찾았다면서 어째 한 마디도 없어!!! 종현이한테 전화해서 겨우 들었다 임마! 으허엉엉 진즉 알려주지 왜 나한테는 말 안 했어!]
"...죄송합니다. 어제 너무 늦게 찾아서, 오늘 전화 드리려고 했어요."
[종현이한테만 말하구! 나한테는 말도 안해주고!]
"그러니까, 확실하... 크흠, 확실하지 않았어요, 그 때는. 장소가 맞는 건지 아닌 건지... 확실해지면 전화 드리려고 했죠. 팀장님이야 그렇다 치고 어떻게 형한테 불확실한 말씀을 드릴 수 있었겠어요, 아니면 실망하실텐데."
[뭐야, 그랬던 거였어...? 난 또... 어쨌든 기범이 찾아서 다행이다! 근데...]
"......네."
[너 목소리가 왜 그러냐? 완전 최홍ㅁ... 아니, 스몰뱅의 석가 탑 같다?]
"......"
[어, 어쨌거나 수고했어 민호야! 푹 쉬고, 국과수에 놀러와!]
"네, 쉬세요 형."
탁.
민호는 폴더를 접고 콘솔 위에 던져놓았다. 3시간 운전의 피로가 풀리지 않았고, 늦게 잔 데다, 새벽에 힘까지 써서... 매우 피곤했다. 어차피 토요일이고 해서 아예 한 오후 2시까지 잘 생각이었다. 몸을 반쯤 일으킨 침대에 다시 털썩 쓰러졌다. 끄응, 하고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푹신한 흰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민호는 머리를 느릿하게 돌려 제 옆을 보았다.
"......잘도 주무시네."
기범은 이불을 한 품 가득 끌어안은 채, 침대 끝자락에서 아슬아슬하게 자고 있었다. 근육이 뭉치면 원래 자면서 온 침대를 돌아다니기 마련이어서, 기범 역시 새벽 내내 자면서 뒤척였었다. 민호는 온통 헝클어진 기범의 노란 머리통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 왜 저렇게 웃기냐.
민호는 가만히 기범을 보고 있다가 팔을 뻗어 이불에 말리다시피 한 그의 몸을 끌어당겼다. 매끈하게 빠진 허리를 끌어안자 그럭저럭 품에 들어온다. 안고 있으니 마냥 달달하지만은 않은, 살짝 새콤한 향도 난다. 뽀얀 어깨에 얼굴을 묻으니 부드러운 피부가 와 닿았다.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어떻게 이렇게 하얗지.
"......남자가 허여멀겋기는."
민호는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잠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기범을 인형처럼 끌어안은채 있으니 잠이 빨리 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빳빳함을 잃어버려 부슬부슬해진 그의 흰 셔츠는 보는 사람의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기범의 몸에 감겨 있었다. 분명 기범에게 가운을 넘겨주고 셔츠에 수트 팬츠 차림이었던 민호였는데... 지금 가운은 이미 침대 아래로 낙하. 민호의 셔츠를 기범이 입고 민호는 팬츠만 입은 채였다. 아무렴 어때, 라는 생각으로 잠을 청하는 민호였다. 그만큼 그는 피곤했다.
제 다리에 닿는 기범의 맨 다리가 좀 신경쓰이긴 해도.
커튼을 투과해 약하게 들어오는 햇빛이 둥그렇게 둘의 머리를 물들여갔다. 가을 하늘답게 새파랗고 구름 한 점 없는, 좋은 날씨의 토요일 아침이었다. 이런 아침을 못 보고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이유는 지난 밤, 이 둘이 다른 의미로 (상당히) 좋은 밤을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EP.6 마음이 부서진 인형의 노래 (上) (0) | 2010.1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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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 비틀린 우정 (0) | 2010.10.17 |
EP.3 어두운 지하철 아래에서 (下) (0) | 2010.1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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