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 마음이 부서진 인형의 노래 (上)
* 모든 설정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실제 그것들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 한국경찰과학수사팀(한국 CSI : KPSI) 수사과
제 2지부(경기) 팀장 : 김종현(30)
주 팀원 : 최민호(29) 김기범(27) 이태민(26)
* 국립과학수사연구소(NISI)
검시관 : 법의학자 겸 외과의 이진기(32)
* 영국의 민속 동요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을 인용, 임의 개사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Lady's body is falling down, 아가씨의 몸이 무너진다네,
Falling down, falling down, 무너진다네, 무너진다네,
Lady's body is falling down, 아가씨의 몸이 무너진다네,
My fair lady! 나의 아름다운 아가씨여!
My heart is falling down, 나의 사랑이 무너진다네,
Falling down, falling down, 무너진다네, 무너진다네,
My heart is falling down, 나의 사랑이 무너진다네,
My fair lady! 나의 아름다운 아가씨여!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falling down...falling down..."
달그락.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My fair... lady......"
짜르륵... 톡.
"My, fair, lady."
덜컥.
"안 자고 있었구나? 안녕 지연아, 오늘은 기분이 어떠니?"
"......"
"응?"
"......의사선생님..."
"그래, 지연아."
"......방금 선생님 옆에서 아가씨가...... 목을 매달았어요."
Lady's body is falling down, My fair lady.
"도대체 몇 번째예요, 선생님. 그 아인 더 이상 병원에 있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니까요."
"그런 말이 어디있나, 정 간호사. 그럼 그 아일 길에 내치기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 지연이가 환각을 보는 건 마음의 병을 앓아서 그런 것 뿐이야. 함부로 말하는 거 옳지 않네."
"지금 진통제와 항생제, 식비, 세탁비로만 드는 돈이 얼만지 아세요? 제대로 잡히지도 않는 예산에서 빼서 충당하느라 골치라구요. 그 애 어머니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건지... 아예 버리고 간 게 맞다니까요. 그리고 마음의 병 뿐이라뇨, 그 아이는 몸 상태로도 얼마 안 있으면...... "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지연이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 신경쓰지 말게. 원래 지연이 사정이 어쩔 수 없었던 거 아닌가. 이미 원장님께서도 허락하신 일이니 그렇게 야박하게 굴지 마."
XX대학 병원의 신경외과 소아뇌종양 전문의인 김학준 박사는 자신의 진료실로 돌아와 쓰러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50대 중반에 들어선 그의 머리는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상당부분을 덮고 있었다. 학준은 머리를 감싸쥐고 책상에 팔꿈치를 기대었다.
"......후우."
그는 깊은 한숨을 펼쳐 둔 카르테 위로 쏟아내었다. 그의 한숨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카르테의 종이가 몇 장 팔랑거렸다. 방금 마지막으로 회진을 마친 아이는 올해 9살이 되는 지연이라는 여자아이였다. 지연인 악성 뇌종양으로 이미 손쓸 시간을 놓쳐서 두 손 놓고 죽음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있었다. 게다가 지연이는 오랜 시간 외로움에 시달려 자페증과 환각 증상까지 보이고 있었는데, 그것이 종양이 악화되면서 더 심해지고 있었다.
가끔씩 저렇게 아무도 없는데도 누가 보인다는 말을 하곤 했으며, 6인용 병실을 쓰면서는 한밤중에 오싹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함께 있던 환자들의 항의가 빗발치곤 했다. 결국 지연이는 병원 측의 조치로 독방으로 옮겨졌다. 아이의 유일한 혈육인 어머니는 그녀가 입원을 할 때 한 번 모습을 보이고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벌써 3개월 하고도 보름. 모두는 병원에 아이를 버리고 간 것으로 암묵적인 단정을 지었고, 차마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이를 길바닥에 내 놓을 수도 없어 병원에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게 하고 있었다.
"돈 문제를 떠나서, 이대로 눈을 감기 전에 제 어머니 얼굴이라도 한 번 보여줬으면......"
학준은 그런 지연이를 도와주는 은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 병원에서는 병원장을 포함하여 지연이를 안쓰럽게 여겨 여러 방향으로 도와주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따뜻한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원장의 지시니 어쩔 수 없이 병원에 두는 식이었다. 학준은 하루빨리 지연이의 어머니가 한 번만이라도 병원에 와서, 아이의 남은 시간 동안 함께 있어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계속 고민을 해 봐도 이렇다 할 답은 나오지 않았다.
"큰일이네, 지연이는 이제 오래 살아봐야...... 하아..."
Morality EP.6 마음이 부서진 인형의 노래(上) written by. Rosetta
"민호 씨! 기다려줘요, 나......!"
"여기까지 따라붙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올 손님도 있으니, 이제 돌아가주시죠."
"왜... 왜 그래요, 내가 마음에 안 들어요?"
"안 듭니다."
민호는 짜증이 그대로 묻어나는 얼굴로, 오피스텔 오토락에 손을 올린 채 여자를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타이에 윗 단추가 풀린, 수트를 입은 그의 모습은 정말로 멋졌으나 차갑게 내려앉은 눈만큼은 누군가를 죽일 것 같은 날이 서 있었다. 헝클어진 갈색의 펌은 이지적인 그를 더 흐트러지게 만들었다.
"나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남자 없었어요, 민호 씨는 정말 놓치기 싫어요! 우리 계속 만나면 안 될까요? 원나잇 상대로 만났지만, 분명 만나보면......!"
여자는 봄에 입기에는 좀 춥다 싶은 블랙 미니드레스 차림이었다. 하지만 드레스의 핏은 그녀의 볼륨있는 몸매를 드러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길쭉하게 뻗은 두 다리 끝에 신겨진 힐도 그녀와 잘 어울렸다. 길게 웨이브가 들어간 새카만 공단같은 머리카락이 보기에는 좋았으나, 화장기가 거의 사라진 얼굴은 찌푸려져 있어 그 매력을 반감시켰다. 민호는 자신의 팔을 붙잡은 여자의 가녀린 두 손을 떨쳐내며 잘라말했다.
"...분명히 자기 전에 말했을 텐데요. 뒤끝없이 끝내자고."
"민호 씨!"
"시끄럽습니다. 여기 나만 사는 거 아닙니다."
"나랑 왜 잔 건데요? 그 이유나 말해줘요! 나였던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여자는 다시 민호의 팔을 끌어당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민호는 이 조그만 여자를 한 대 때리고 싶은 충동이 울컥 일었지만, 꾹꾹 눌러 참으며 여자를 쏘아보았다. 그 매서운 눈길에 움찔한 그녀였지만 민호의 입에서 한 마디의 말을 듣기 전에는 물러나지 않을 것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민호는 그녀의, 마치 누구처럼 올라간 눈 끝을 차분하게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비스듬히 비틀었다.
"......첫째. 당신이 먼저 짜증나게 매달려왔기 때문이고, 둘째. 당신 눈이 열 받게 생겨서 잤습니다. 이제 이유가 되었습니까?"
민호는 주저없이 몸을 돌려 비밀번호를 눌렀다. 여자는 분한 얼굴로 빨간 입술을 꼭 깨물고 서 있다가, 문을 열려는 민호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민호는 갑작스런 힘에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돌려세워지고 말았다.
"......무슨...!"
띵동--
"벌써 생각 끝나셨어요? 왜 여기까지 오라가라......"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리고, 서늘한 목소리로 불평을 뱉던 허스키한 목소리가 뚝 멎었다. 민호는 오피스텔 현관문에 밀쳐져 선 채, 이가 부딪힐 만큼 저돌적이기만 한 여자의 키스를 받고 있었다. 문제는 민호가 그녀와 키스를 하고 있다는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봤어도 그 기가 막힐 광경을, 지금 보고 있는 어떤 사람이 문제였다. 민호는 눈을 크게 뜨고 여자를 한 손으로 밀쳐냈다. 그 힘에 그녀는 힘없이 밀려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민호는 그건 안중에도 없었다. 제 앞에 있는 금발의 청년만이 눈에 들어 올 뿐이었다.
"......김기범..."
"...왜 이렇게 표현을 안 하냐고 투정 좀 했던 게, 나에 대해서 생각 좀 해 보라고 한 게... 이런 식으로까지 해야 했던 거였나봐요? 선배."
"틀려, 이건......"
"그래요, 선배가 여자랑 자든 말든... 내가 상관할 바 아니죠. 애초에 그런 약속 하지도 않았으니."
기범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태연하게 말을 했다. 한술 더 떠, 쓰러진 여자를 일으켜주고 드레스에 묻은 먼지까지 제 손수건으로 조심조심 털어주기까지 했다. 기범은 얼떨떨한 여자에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난 후, 민호를 다시 똑바로 쳐다보았다. 문이 닫힌 채 멈춰 서 있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연 후, 그 안에 오른 기범은 여전히 밝게 웃는 얼굴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럼 나도 그렇게 할게요. 방해해서 미안하고... 좋은 시간 보내요, 선배. 그리고 그 쪽의 아가씨도."
"김기범, 이건......!"
민호가 뭐라 말을 하며 기범을 잡으려 할 때, 그를 비웃듯 엘리베이터 문이 철컹, 닫히고 기범의 모습이 사라졌다. 민호는 짧게 욕을 뱉으며 현관문을 주먹으로 쳤다. 그의 아랫입술이 세게 깨물려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옆에 멀뚱히 서 있던 여자는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민호와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 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민호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쳐들고 여자를 노려보았다. 민호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쨍쨍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겁에 질린 얼굴로 민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민호의 입술이 작게 열렸다.
"......나 여자도 때리는 새끼니까, 알아서 가십시오."
*
"오늘 아침에 별 희한한 사건이 내려왔다. XX대학 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던 시체의 일부가......"
"하하, 하... 팀장님......"
"...태민ㅇ... 왜, 이태민."
"......분위기가 이상해서요..."
"분위기?"
태민의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대답을 들은 종현의 짙은 눈썹이 쓱 치켜올라갔다. 그의 큰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 자신의 팀원들을 훑어보았다. 그는 곧, 태민이 말한 '분위기' 의 의미를 깨닫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종현은 피곤한 얼굴로 서류철을 책상에 던지며 말했다.
"니들 또 왜 그러냐. 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어? 요즘 진짜 많이 나아진 줄 알았더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팀장님. 계속 말씀해주세요, 아하하하."
"웃기시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주말에 싸우기라도 했어?"
기범의 말을 듣지도 않고 시선을 민호에게 붙박은 종현은 잠시 기다렸다.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왜 이러냐는 기범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은 채. 민호는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어 앉아 있다가, 종현의 시선을 빗겨 내리며 짧게 내뱉었다.
"......일 안 합니까."
종현은 예상 밖의 민호의 반응에 놀랐다. 이건... 마치 이 곳에 처음 왔을 때, 아무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무심한 최민호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말도 없고, 표정에 색이 없는 민호는 무서워 보이기까지 했었다. 여기서 일해 오면서 이런 얼굴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어떤 것에 영향을 받아 저 상태가 다시 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계기는 대체......
"너희 진짜, 무슨 일 있었지?"
"......"
"아니에요, 팀장님. 오늘 선배 좀 저기압인 거 같아요. 자자, 한시가 급하잖아요! 설명 얼른 해 주세요!"
기범이 대신 두 손바닥을 활짝 펴 내저었다. 종현은 의심스러운 눈을 거두지 않은 채 둘을 보았지만, 기범의 말대로 중요한 것이 따로 있었기에 다시 설명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다. 종현은 책상에 던진 서류철을 다시 집어들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오늘 아침 7시 30분경에 XX대학 병원에 안치되어 있던 시신이 훼손된 채 발견되었다고 해. 훼손 부위는 양 쪽 눈이야. 적출된 두 안구는 신경외과 병동 1301호, 6인 병실의 비어있던 침대 하나에 올려져 있었고, 그 안구는 시신의 것과 동일하다는 검사 결과가 있었어. 이런 엽기적인 짓도 문제지만, 이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도 문제야."
"처음이... 아니라뇨...? 그럼 벌써 이런 일이 또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래, 민호 말대로 이런 일이 또 있었어. △△신경정신병원 504호 2인 병실과 509호 4인 병실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지. 그 때도 그 병원의 시신이 훼손되었고, 차이가 있다면 눈이 아니라 두 귀와 열 개의 뽑혀진 손톱이었다고 해. 이 사건이 나흘 간격을 두고 차례로 일어났어. 경찰에서 괴이하게 여겨서 수사 중이었는데, 이번에도 또 같은 일이 일어나서 우리 쪽으로 지원 요청이 들어왔어."
민호가 작게 인상을 쓴 채 턱을 괴었다. 일 얘기가 나오자 아까보다는 조금 평소대로 돌아 온 듯한 얼굴이었다.
"범인은 같은 사람이겠군요. 하지만...... 이 사람이 어느 병원을 돌아다닐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너무 광범위해요."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고...... 이번에 시신 확인은 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소, 이하 국과수)에서 알아서 할 일이고 우리는 일단 이 범행을 좀 자세히 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선 민호랑 기......아니, 나는 △△신경정신병원에 가서 이번 사건과 관련한 뭔가가 있는지 조사해 오고 태민이와 기범이는 XX대학 병원으로 간다.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두 병원은 물론 인근 대형 병원의 영안실에 팀원들과 경찰을 배치할 거야."
간단하게 이야기를 마친 종현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번에는 두 군데를 나누어 조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확실하고 효율적인 일처리가 필요했다. 태민도 후다닥 그를 따라 일어나고 기대 앉아있던 민호도 긴 다리를 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기범은 아무 말 없이 제 책상에서 가져갈 것들을 추려내고 있었다. 태민이 기범에게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꾹꾹 잡아당겼다. 기범이 크로스백 지퍼를 닫으며 태민을 쳐다보았다.
"기범이 선배......"
"응? 뭐뭐,"
"그...... 아, 아니예요. 이따가 말씀드릴게요."
"......? 그래, 나도 할 말 있었어. 이태민 너의 끔찍한 잠버릇에 대해서 말이지."
기범은 태민의 어깨에 휙 팔을 걸치더니 예의 아하하하, 하는 웃음을 크게 터뜨리며 사무실을 나갔다. 어느 새 종현은 둘이 나간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민호는 어딘가 풀린 듯한 종현의 얼굴을 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팀장님."
"......"
"종현이 형."
"어? 어, 그래...... 가자."
"그게 아니라...... 됐어, 가면서 얘기해요."
민호는 아직도 멍한 상태의 종현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면 제 말을 삼켰다. 민호는 가방을 둘러메고 차키를 집어들었다. 차 필요없으려나. 귀찮다고 투덜거릴 게 눈에 선한데. 민호는 그 생각을 잠깐 하다가,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쩐지, 오늘은 네 명 모두 위태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신경정신병원.
종현과 민호는 시신의 귀와 손톱이 발견되었다는 504호와 509호를 먼저 조사하기로 했다. 원내는 생각보다 조용하지 않았다. 주로 뇌에 이상이 있는 사람들과, 정신 질환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인지 일반 종합 병원보다는 소란스러운 편이었다. 그러나 소리만 그럴 뿐,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번거로운' 일은 없는 듯 했다. 다른 팀원들은 경찰과 함께 종현이 지시한 대로 인근 병원과 사건이 일어난 두 병원의 영안실에 대기토록 하고 종현과 민호 둘이서만 조사에 나섰다.
깨끗한 병원 로비로 들어서서 병원 관계자에게 KPSI 신분증을 보여주었더니, 군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민호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병원 특유의 냄새에 살짝 미간을 좁혔다. 금방이라도 비실비실한 사람들이 쓰러질 것 같은 끔찍하게 청결한 냄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단 병실부터 보고 오자는 종현의 말에 동의한 민호가 그를 따라 병동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그의 다리에 무언가 가볍진 않지만 무겁지도 않은 것이 두다다 달려와 부딪혔다. 민호의 시선은 그대로 자신의 다리로 떨어졌다.
"...헤에......우와, 멋있는 형이다아--"
"......"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창백한 얼굴, 벌어진 입술 밖으로 줄줄 흐르는 침. 한 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안타깝게도 아이의 두 눈동자는 민호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멋대로 놀기는 했지만 누구보다도 까맣고 반짝거리는 동그란 눈동자에 민호는 말을 잃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하다가 아이의 고개가 젖혀질 대로 젖혀진 걸 보고는 느릿하게 다리를 접어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민호의 큰 손이 아이의 조그만 얼굴로 가다가, 엄지를 펴 아직도 입술 밖으로 흐르는 침을 닦아주었다. 민호는 웃는 걸 잊어버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웃지도 않고 그냥 말했다.
"......고마워."
"헤헤헤헤- 헤헤! 혀엉, 머시써어요!"
"......너도 멋있어. 형은 바빠서 이만 갈게, 또 보자."
그제서야, 아주 옅은 웃음이 그의 입술에 번져들었다. 아이는 그걸 봤는지 어쨌는지, 천진난만하게 웃어대고 있었다. 민호는 손을 뻗어 아이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만져주고 몸을 일으켰다. 아이는 숨이 넘어갈 듯 깔깔거리며 민호의 다리를 자신의 온 몸으로 한 번 끌어안더니, 병동 쪽으로 두다다 달려가버렸다.
"별일이다? 최민호."
"뭐가요...?"
종현이 그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다가, 푸학,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민호는 이상하다는 눈으로 종현을 바라보았고. 종현은 잠깐 낄낄거리더니 민호의 등을 팡 치며 병동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야, 말도 안 해 주고. 민호는 아까의 그 웃음은 어디로 치워버렸는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가 종현의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종현은 이미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러놓고 있었다. 정삼각형 모양의 램프에 파란 불이 들어온 걸 확인한 그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바라본 채 입을 열었다.
"너, 변했네."
"...변하지 않았어요."
"아니야, 변했어. 확실해."
민호는 엘리베이터 문에 비치는 종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왜 저래. 종현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변하지 않았다구요."
"아니라니까. 내가 보기엔 너 변했어. 예전의 최민호는 그렇게 웃지 않았잖아. 처음 우리 사무실에 왔을 때도 인상이 어마어마하길래, 아 얘 국과수 거절했다는 건방진 녀석이었지 하고 생각했었는데...그게 옳았어. 완전 인상대로 살길래 얼마나 꼴불견이었는지. 표정이 한 가지였어, 너. 절대 바뀌지도 않고 오로지 한 얼굴. 졸라 잘생기기만 한 인형이 따로 없었던 거 아냐?"
"...병원에서 싸우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너 그거 아냐?"
"뭘 말입니까."
띵동-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안에 있던 환자들과 가족, 하얀 가운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모두 쏟아져 나왔다. 종현은 안으로 들어가서 5층 버튼을 누르며 막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민호 쪽으로 돌아섰다. 종현이 청량하게 웃으며 민호에게 한 마디 했다.
"나중에 김기범 들어오니까 그 표정 변하더라."
종현과 민호는 먼저 504호 2인 병실에 들어갔다. 그 곳은 괴이한 사건 때문에 원래 입원 중이었던 환자들이 다른 병실로 옮긴 상태였다. 종현은 한 쌍의 귀가 잘려져 놓여있었다는 침대로 걸어갔다. 달리 POLICE LINE을 둘러 놓지는 않았으나, 시트 위에 유성펜으로 지점을 표시해 둔 것이 보였다. 사후경직이 일어난 시신에서 잘라낸 것이어서 핏자국 따위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뭐야, 이걸 어쩌라는 거야...... 이 병실을 조사해봤자 나올 건 없잖아. 장갑을 사용한 것 같아 지문도 뭣도 없다고 하고......"
"어떻게 찾아야 하죠, 그 범인을...... 뭔가 연관성이 있는 거 아닐까요? XX대학 병원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동일범의 소행이라고 생각해도 무리는 아닐 듯 싶은데."
민호는 셔츠의 소매를 접어 올리며 말했다. 종현은 침대 난간에 기대어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팀장님, 범인이 시신 조각을 놓은 침대의 환자와 무슨 관련이 있다면...... XX대학 병원의 1301호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죠? 그 곳에는 빈 침대에 놓여져 있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미 직전에 퇴원한 환자와 관계가 있다고 해야 하는 건지..."
"좋아, 사건 현장으로는 범인을 읽어낼 수 없으니, 이 병실들에 입원했던, 그리고 입원한 환자들의 리스트와 담당 의사, 간호사까지 다 조사해보자. 환자들 중 이 범인과 연관성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으로도 범인의 실체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거야."
종현이 주먹을 꾹 쥐고 민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민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둘은 병실을 나가 곧장 병동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여기 있습니다. 1301호의 4개월 전부터 현재까지 입원 환자 리스트와 담당의, 간호사들의 리스트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 그런데... 환자들의 병명도 알 수 있나요?"
"아... 죄송합니다, 그건 환자 개인의 프라이버시이기 때문에 해당 환자가 이번 일의 범인이라는 확정 없이는 병원 측에서도 가르쳐 드릴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기범은 데스크에서 받아 온 자료들을 들고 휴게실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태민이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어린이 만화를 넋 놓고 보고 있다가, 기범이 온 걸 보고 제 손에 들고 있던 음료 한 캔을 내밀었다. 기범은 싱글싱글 웃으며 그걸 받아들었다.
"어때요, 선배?"
"병명은 가르쳐 줄 수 없대. 개인 기밀이라서... 동의 없이는 알려줄 수 없다나봐."
"팀장님과 민호 선배도 아마 우리처럼 하고 있겠죠?"
"그럴거야, 병실에서는 어떠한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는 걸 지금 팀장님이나 선배가 모를 리 없을테니까."
기범이 간호사가 넘겨 준 종이들을 뒤적이며 대답했다. 태민이 건네 준 음료 캔을 확인하지도 않고 따서 한 모금 삼킨 기범이 고운 미간을 좁혔다.
"으어엑?!"
"왜, 왜요 선배!"
괴상한 얼굴을 하는 기범을 보고 태민이 덩달아 깜짝 놀라 기범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걱정스러움이 가득 묻은 태민의 얼굴을 보던 기범이 안도의 한숨을 쉬는 흉내를 내며 씩 웃어보였다.
"아니, 이온 음료라서. 탄산인 줄 알았더니......"
"선배! 깜짝 놀랐잖아요! 뭐예요, 이온은 안 드시겠다는 거예요? 칫, 줘요 그럼. 내가 다 마실거야."
"너 물 먹는 하마된다? 뿌우- 하는. 아하하하."
"우이씨, ...선배 미워요."
태민을 보며 키득거리는 기범을 원망스레 보던 태민이, 갑작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는 기범의 큰 손에 깜짝 놀란다. 그러나 태민은 그 뒤에 나온 기범의 말에 놀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몸이 굳고 말았다.
"이래서 종현이 형이 좋아하나?"
"......선배...?"
"왜?"
"선배가......"
"내가 뭐?"
기범은 태연하게 웃음 띤 얼굴로 심하게 흔들리는 태민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웃고 있는 기범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저렇게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천성이 밝은 선배이기 때문에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인 걸까?
"......아까 하려던 이야기도 이거였어요. 왠지 선배는 지금 팀장님과 제 상태를 알고 계실 것 같아서......"
"......음... 그런가? 아하하하."
"웃지 마세요, 저랑 팀장님한테는 심각한 일인데 어떻게 선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럼?"
"네......?"
태민은 더더욱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웃음기를 거둔 기범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울어 줘? 형이랑 네가 그런 상황인 거 아는데, 안타깝다고 울어주기라도 해야 되나?"
"선배, 무슨 말을 그렇게...!"
"제 3자가 끼어들기에 건방진 행동이라는 거 알고, 지금 내 처지에 이런 말 하는 거 좀 웃긴 일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 이제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를 짓는 게 어때?"
"...선배라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그걸 내게 물으면 곤란하지, 네 상황은 네가 더 잘 알텐데. 다만... 여러 사람이 복잡해 보이니까, 네가 좀 그걸 정리를 해 주는 게 어떨까 하고. 너 외에는 그런 용기있는 결정을 하기에 너무 늙었잖아. 영감이라구."
태민은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도 조그만 목소리여서 기범이 조금 머리를 태민 쪽으로 움직여야 할 정도였다. 태민의 미성은 조금 떨리고 있었지만, 또박또박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느껴졌다.
"끝은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지만...... 팀장님, 아니 종현이 형에게 어떤 감정인지 사실 지금도 갈피가 안 잡혀요. 처음엔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잘 지냈고... 형도 제게 같은 감정인 것 같았는데... 아닌 것 같아요, 지금은..."
"지금은......?"
"...모르겠어요. 종현이 형은 처음 봤을 때부터 제 이상형이었어요.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연애 감정 말고 동경하는 롤모델 같은 거 있잖아요. 평소에는 친화력도 좋고 성격도 외향적이신데 일 할때는 진짜 침착하고...... 그런 모습에 반했었어요."
"연애 상대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네. 그런 감정이 그냥 동경인데 그걸 사랑이라고 믿었던 건지...... 정말 모르겠어요. 지금은 형을 동경하는 건지 사랑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여하튼 그래요. 그래서 그걸 깨달은 어느 순간부터 종현이 형을 제대로 못 보겠더라구요. 만약에 형이 정말로 날 좋아하는 거라면... 형에게 못할 짓을 하는 거잖아요. 정확한 제 마음도 모르고 어중간하게 있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기범은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그럼... 진기 형은 뭐지? 어떤 감정으로 종현이 형을 그런 눈으로 바라봤던 걸까.
태민은 아직 종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동경이 사랑으로 바뀌는 건, 어느 한 순간일테니까. 지금 이후 태민이 종현과 같은 감정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둘이 어중간한 상태라면 진기는 지금 어떤 상태라는 건지, 기범은 좀체 감이 오지 않았다. 지금 태민이 말하는 걸 보니, 진기가 종현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종현도 마찬가지고. 기범은 복잡해져오는 머리를 추스리려 애썼다. 사실 지금 민호 때문에 자신의 마음도 엉망이라는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결국에는...... 종현이 형이 그러셨어요. 너무 감정을 속단 한 것 같다구...... 부담주기 싫으니까 일단 사귄다는 거, 하지 말자고. 쉽게 말하면...... 헤어진 거죠. 일단은..."
"...그래서 분위기가 묘했던 거구나. 근데, 형은 아직 너 못 잊는 것 같던데."
"아...... 하지만 지금 이런 애매한 관계에서 말을 꺼내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말을 안 하고 있자니, 이런 상태로 가면 이 긴장을 제가 못 견뎌서 형을 좋아한다고 착각할까봐 두렵기도 하고...... 그것만큼 둘 다에게 상처되는 일은 없을 거 아니에요..."
기범은 캔을 다 비운 뒤, 태민을 쳐다보았다. 손을 뻗어 그의 등을 툭툭 쳐 준 기범이 싱글싱글 웃었다. 태민은 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반은 의아한 얼굴로 기범을 바라보았다. 소파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댄 채 기범이 가볍게 말했다.
"걱정이 많아서 탈이구나, 너. 그냥 평소대로 지내 봐. 그런데도 지금과 같이 고민이 된다면...... 그건 어쩌면 동경일지도 몰라.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어느 한 쪽으로 결론이 내려지지 않는 거, 그것도 사랑은 아닌 것 같다, 난. 종현이 형이 좀 견디기 힘들겠지만, 너무 오래 걸리지 않게 네가 확실히 말을 하면 형도 이해하고 마음을 접겠지. 형이 어린애도 아니고, 내년에는 30을 넘기는데 그걸 못 할까. 네가 어떤 식으로든 빨리 결론을 내는 게 둘에게 가장 필요한 일인 것 같아."
"선배......"
멍한 얼굴로 기범을 바라 본 태민이 무의식적으로 든 생각은, 저렇게 간단한 거였나? 였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기범은 가볍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무거운 방법을 태민에게 던져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든 생각은, 역시 김기범이라는 생각이었다. 저 정도로 간단하게 해결 방법을 주는 사람이 또 있을 수 있나? 태민은 갑자기 가벼워지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비식 나왔다.
"고마워요, 기범이 선배."
"난 천사거든. 근데 어차피 그걸 하고 말고는 너한테 달린 건데 뭐."
"그래두요......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해 주는 사람이 선배 밖에 더 있겠어요? 에헤헤."
"진기 형한테 가면 아마, 밤을 새서 말해줄 걸? 결국 내 얘기로 결론이 나겠지만. 아마 진기 형은 훨씬 위로가 되게 말해 주겠지만...... 난 성격에 안 맞아서. 으하하하. 아우,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얼른 이거 봐야지!"
기범이 호들갑을 떨며 인쇄물을 뒤적이자, 태민이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털어놓으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게다가 기범이 이미 종현과 자신의 일을 알고 있었다고 하니 더 그런 것도 같았다. 어쩌면 기범같은 누군가에게 이 답답함을 털어놓고 싶었던 걸지도....
"그래요, 선배! 헤헤, 감사합니다."
"아우우- 욱! 아, 피곤하다...... 뭐냐 대체...... 뭔 상관이 있는 거야? 당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으니 원..."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기범이 하품을 하느라 눈 밖으로 삐져나온 눈물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태민과 한참을 환자와 의사, 간호사들의 목록을 보고, 시신 조각이 있었던 침대의 환자들과 이야기를 해 보느라 진을 쏙 뺐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환자들과 이야기를 해 봐도, 이렇다 할 건 나오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단서도 없이 수사에 뛰어든 거나 다름이 없었다.
기범은 잠깐 바람을 쐬러 나온 원내 공원의 벤치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올 때만 해도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는데, 어느 새 날이 저물어 밤이 되어 있었다. 저녁도 서둘러 먹고 수사를 계속 했던 터라 속까지 더부룩한 기분이었다. 태민은 뭔가 더 생각할 것이 남았는지, 휴게실에 남아 있었다.
"졸라 나쁜 놈."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던 기범이 툭 내던진 말이었다. 4월의 밤바람은 지나치게 포근해서 짜증까지 날 정도였다. 부드러운 바람이 기범의 옷자락과 가는 금발을 흔들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몸을 맡기고 있던 기범이 또 중얼거렸다. 살짝 내려간 얇은 셔츠 속으로 푸근한 바람이 기범의 하얀 목을 파고들었다. 꼭, 키스라도 하는 듯이.
"......그걸 못 참아서 여자랑 자다니. 쪼잔하고 치사하고 더럽다, 흥. 누구는 못 자서 안 자는 줄 알어? 나도 잘 거야, 치사한 자식아! 여자 뿐이냐? 남자도 끌어들일테니 어디 잘 먹고 잘 살어라!"
발까지 동동 구르는 기범을, 지금이 늦은 밤이라 공원에 아무도 없어서 보지 못하는 게 다행이었다. 누구랑 자겠다는 얘기를 야밤에 발까지 구르며 외치는 걸 다른 사람이 본다면 미친 사람으로 볼 게 뻔했으니까. 게다가 공원은 13층에 있는 환자들을 위한 옥외 공원 정도였기에, 지금쯤 취침 시간인 터라 아무도 없는 게 옳았다.
"......사람이 어떻게 그 정도로 표현을 안 하냐... 먼저 키스해 오는 것도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꼭 나만 좋아서 매달리는 거 같잖아, 젠장맞을."
기범은 벤치 위로 다리를 끌어올려 얼굴을 묻었다.
솔직히 기범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포옹도 키스도 섹스도 모두 기범이 먼저 손을 내밀지 않으면 하지 않는 민호가 야속한 게 당연했고, 민호가 먼저 해 오면 그 날은 계라도 탄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 민호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말할까 생각했지만, 왠지 그 말이 끝나고 돌아올 그의 시선이 걱정되서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결국 폭발한 게 이맘 때였다. 왜 이렇게 표현을 안 하냐고, 진짜 좋아하는 건 맞냐는, 지금 생각하면 다소 애정에 목마른 사람처럼 한바탕 쏟아내고 뒤돌아섰었다. 서로 조용히 생각 좀 해 보자고.
그래서 한 2주 지났나 -사실 2주도 심했다. 보통 사흘 안에 연락이 와야 정상이라고 기범은 생각했다- 드디어 연락이 오길래 내색은 안 했지만 내심 들떠서, 친히 민호가 와도 모자랄 판국에 먼저 좋아한 사람이 지는 거라며 자신을 다독이고 그의 오피스텔에 몸소 찾아갔건만......
기범의 눈에 보인 건, 민호와 모르는 여자의 키스 장면.
드라마도 이런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다. 그 '꼴' 을 보자마자 머리 끝에서부터 치솟는 열에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었다. 더 볼 것도 없다, 고 생각했다. 그 다음에 나올 말이 무서워서, 그의 말을 더 듣고 있을 자신도 없고.
"...하 씨...... 왜 이렇게 약해졌냐, 김기범... 너 김기범 맞냐? 어휴, 진짜 남자 하나 때문에 마음 졸이고 전전긍긍...... 꼴사나워."
기범은 왠지 생각할 수록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처음에 왜 받아주는 듯 행동해서 지금 이렇게 자신을 힘들게 만드는 민호가 그저 야속했고, 그가 자신을 욕심내는 것보다 자신이 그를 욕심내는 게 더한 것 같아서 분했다. 기범은 고개를 팍 무릎 사이에 묻은 채 사납게 파도치는 제 마음을 추스렸다. 지금 수사 중인데, 이런 거에 흔들리면 안 된다, 남자는 또 만나면 되지, 여자도 있는데 왜 그에게만 얽매이나 하는 생각이 마구 한데 섞였다.
갑자기 태민이 내심 부러워졌다. 자신을 그렇게나 좋아하는 종현이 있는데...... 왜 그렇게 고민을 할까. 하지만 그게 종현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또 이해가 되어서, 더 부러웠다. 결국 둘은 서로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면 진기가 안타까워지지만. 만약 기범이 생각하는 진기의 마음이 정말이라면, 복잡도 보통 복잡한 게 아니었다. 기범은 거기까지 생각하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치미는 짜증에 한 손으로 마구 금발을 헝클었을 때였다.
"......어디 있었나 했더니."
낮고 서늘한 중저음. 종현과 이 병원으로 온 모습이야 아까 봤지만, 여긴 대체 언제 온 건지. 듣고 싶었지만, 지금은 최악으로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이 때 만큼은 푸근한 봄바람이 그리워지기까지 했다. 왜 지금은 불지 않을까, 하고. 기범은 잠시 그 목소리에 몸을 굳혔다가, 이내 다리를 풀고 벤치에서 내려왔다.
공원과 병동 사이의 유리문에 훌쩍 큰 키의 남자가 수트 팬츠 주머니에 한 손을 찌른 채 기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다소 피곤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차곡차곡 접어 올린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적당히 그을린 팔이 괜히 마음을 설레게 했다. 기범이 젠장맞게 핏도 좋네, 하는 생각을 하며 그의 옆을 지나쳐 다시 병동으로 들어가려는데, 그의 팔을 민호가 잡아끌었다.
"태민이 아직 휴게실에 있어요?"
"......그것밖에 할 말이 없는 거야, 아니면 나한테 할 말이 없는 거야."
"둘 다요. 모르시면 놔 주세요."
기범이 그의 손을 뿌리치고 병동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민호가 다시 손목을 잡았다. 다시 뿌리치려던 기범은 잡아당기는 그의 힘에 끌려 공원 벽에 밀쳐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취침 시간에 맞추어 병동의 불이 꺼지고 복도의 희미한 등만이 켜졌다. 흐릿한 불빛에 비친 민호의 얼굴은 서늘하게 굳어있었다. 기범은 벽에 기대어 선 채, 벗어나지 못하도록 앞을 막아 선 민호를 노려보았다. 미미한 신장 차이로 좀 올려다 보기는 했으나, 날선 눈의 기세만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왜 이래요. 그 날 다 마무리 된 거 아니었어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간 건 너야. 멋대로 오해하지 마."
"오해였다 하더라도, 지금 선배 태도는 좀 웃기네요. 이런 식으로 막 다루지 마요. 내가 선배를 먼저 좋아한 건 사실이지만, 이런 식으로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까지 허락한 사실은 없어요."
"무례......?"
민호의 한 쪽 눈썹이 쓱 밀어올려졌다. 무언가 듣기 싫은 말을 들은 듯. 기범은 그런 반응에 속으로 조금 긴장을 했으나, 어차피 꿀릴 건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민호의 손에 잡힌 제 손목을 빼낸 기범이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설마 이게 예의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저번의 그 아가씨하고는 잘 되가요? 제가 그 때 방해한 느낌이 들어서 상당히 죄송했는데...... 아가씨에게는 그렇게 무반응 보이지 말아요. 정 떨어지니까."
민호가 설령 원해서 그러지 않았다고 해도, 기범은 지금 그렇게 몰아부치고 있었다. 괜한 속앓이가 억울해서, 여전히 무뚝뚝하고 자신을 감싸 줄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민호가 야속해서. 그리고 그 여자가 기범이 우려하는 상대가 맞다면, 더 볼 것도 없었다. 기범은 제 할 말만 속사포처럼 쏟아내고 유연하게 그 자리를 벗어나버렸다. 민호가 예상치 못한 기범의 반응에 어이가 없어서 서 있다가, 기범을 다시 잡으려 했을 때였다. 민호가 병동에 들어섰을 때, 얼마 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멀뚱히 서 있는 기범을 보았다.
"서서 뭐 하는......"
민호는 말을 멈췄다. 멍하니 멈춰 선 기범의 시선이 향한 곳은, 복도 안 쪽이었다. 어둠이 집어 삼킨 듯 어두운 복도 한 쪽에서, 드문드문 켜진 희미한 불빛 아래로 무언가가 오고 있었다. 슬리퍼 소리가 차박, 차박하고 들리는 중간에 가느다란 목소리도 함께 들리고 있었다.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falling down...falling down..."
달그락, 달그락, 차박, 차박.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My fair... lady......"
달그락, 달그락, 차박, 차......박.
"......!!!"
복도 저 편에서 온 손님은, 어린 여자아이였다. 밝지 않은 등의 빛에 드러난 아이는 퀭한 눈에 창백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양갈래로 묶은 머리가 조금 헝클어져 있었다. 너무 마른 체구여서 가장 작은 사이즈의 환자복을 입혔지만, 여전히 헐렁했다. 노래를 부르며 걸어 온 아이는 너무 작고, 어린아이 특유의 높은 목소리 때문에 오싹하게까지 느껴졌다. 아이의 작고 마른 손에는 주목으로 만든 인형이 들려있었다. 구슬 목걸이를 한 그 인형은 크지 않았고, 부드러운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그 아이에게는 그마저도 무거워 보였다.
"London Bridge is falling do......"
"꼬마 숙녀님, 이 시간에 자지 않고 어딜 가요?"
"......"
기범이 그 아이에게 다가가 쭈그려 앉아 눈을 맞추며 물었다. 기범의 눈은 곱게 휘어져 있었고, 얇고 붉은 입술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이는 의아하게 기범의 뽀얀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무 늦은 시간인데, 예쁜 숙녀님은 그만 꿈나라로 떠나야죠. 오빠가 데려다 줄까요?"
"......누구...세......요?"
"으응, 여기 잠깐 아야한 사람 보러 온 오빠예요."
"......잠이... 안 와요......나... 엄마...... 찾아야 되요......"
"그래요? 으음... 어쩌지... 그럼 오빠랑 놀까요? 엄마는...... 내일 날이 밝으면 더 쉽게 찾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하도록 할까요? 오빠가 같이 찾아줄게요."
기범이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아이의 안색이 환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잔뜩 침울한 채 어두웠는데, 그 말 한마디에 변한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오빠가요?"
"오빠가요."
"노래도...... 불러 줄 수 있어요......?"
"그럼, 불러 줄 수 있지요."
"키키(Keykey)하고도 놀아 줄 거예요...?"
"키키? 키키가 누군데요?"
아이는 머뭇거리다가, 들고 있던 주목 인형을 조심스레 기범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그 피에로 인형은 누가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서툰 솜씨긴 해도 상당한 애정이 묻어있어 보였다. 둥글게 깎아진 인형의 얼굴이 빙긋이 웃고 있었다. 털실로 붙인 머리카락 위에는 피에로의 방울 모자가 씌워져 있었고 눈에는 빨간색 눈물 방울이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피에로의 목에 아이가 만든 듯한 구슬 목걸이도 걸려 있었다. 헝겊으로 자투리 천을 이어 만든 옷이 제법 그럴싸했다. 기범은 그 인형을 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우와아, 멋진 남자친구네. 그래요, 키키도 같이 놀아요."
민호는 뒤에서 가만히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주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기범이 내민 그의 하얀 손을 붙잡은 아이는 공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민호는 옆으로 비켜 서 주다가, 무심코 아이의 얼굴을 보고 뒷머리 쪽에 서늘한 기운을 느끼고 말았다.
"......어째서 눈에... 초점이 없지......?"
민호는 기범과 아이가 공원에서 노는 동안, 종현과 태민이 있는 병실에 들어왔다. 병원 측에서 빈 4인 병실을 내 주어서 거기서 수사를 하기로 했었다. 병실에 들어오자 안의 불은 켠 채로, 둘은 자고 있었다. 창가 쪽 침대에 이불이 대강 덮여있는 걸 보아하니 종현이 틀림없었고, 대각선으로 놓인 침대에 얌전히 올라 온 언덕을 보니 태민일 것이다. 민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종현의 옆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 커튼을 치고 불편한 수트를 벗고 워싱진과 미색 셔츠로 갈아입었다.
"아무래도 좀......불안한데."
아까 보았던 초점이 없는 여자아이의 눈이 마음에 걸렸다. 설마 아이 하나도 못 당해내겠냐는 마음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불안했다. 민호는 수트를 걸어 옷장에 넣고 컨버스화를 구겨신었다. 그가 병실의 불을 끄고 복도로 나왔을 때였다.
"꺄아---악!!! 거기 누구 없어요?!!!"
"......?!"
때 아닌 비명소리가 병원을 뒤흔들었다. 그 비명에 놀란 종현과 태민이 벌떡 일어났고, 순식간에 웅성대는 소리가 복도를 메웠다. 어슴푸레하던 복도가 환하게 켜진 형광등 덕에 한쪽 끝에서 반대쪽까지 다 보였다. 민호는 안에 있다가 오른쪽 복도로 나와 뒷걸음질치며 털썩 주저앉은 간호사를 발견했다. 그는 무작정 그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당직을 서던 의사와 간호사들도 난데없는 소란에 뛰쳐나와 곧 민호가 간 쪽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입니까!"
"제, 제 침대...! 제 침대에...!!! 아악, 살려주세요!!!"
간호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옆으로 달려 온 민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동공이 열려있었고 온 몸이 오한이 난 사람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방 쪽은 아예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민호는 공포에 질려 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 그녀를 간신히 떨어뜨려 옆의 다른 간호사에게 맡겼다. 그리고 문제의 그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 방에 들어가면서 켠 전등에 의해 드러난 무언가를 보고 놀라서 뛰쳐나온 듯 했다.
"선배!"
어느 새 따라들어온 기범이 민호를 부르다 말을 멈추었다. 기범 역시 민호와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붙박힌 듯 서 버렸다. 간호사의 침대에는 붉은 피로 범벅이 된 헝겊 인형이 던져져 있었다. 인형의 가슴 한가운데를 꿰뚫은 요리용 칼이 침대 시트까지 뚫고 박혀있는 채였다. 헝겊과 실로 조악하게 만든 그 인형은 검은 털실로 꿰메어진 입가를 비튼 채 소름끼치게 웃고 있었다.
"이게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일단 모두 나가주십시오."
"민호야!"
곧 종현이 방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도 곧 이 광경을 보고 멈칫하다가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다. 놀란 환자들과 의사, 간호사들을 추스려 다시 돌려보낸 후, 절대 병실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지시를 했다. 인형을 처음 발견한 간호사는 일단 병실로 옮겨져 의사와 간호사들과 함께 있게 했다. 그리고 넷은 이 근처가 집이어서 올 수 있다는 진기를 부르고 이 당직실에 모여있었다.
"아...... 자다가 기절해서 뛰쳐나왔네......"
종현이 조금 부스스해진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기범은 물끄러미 침대 위의 헝겊 인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민은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정신이 아직도 몽롱한지, 침대 기둥에 머리를 기댄 채 졸고 있었다.
"시체를 잘라다 뿌려놓더니...... 영안실을 지키고 있으니 이번엔 피 묻은 인형?"
"확실히 정상은 아닌 거 아닙니까? 어떻게 사람의 시신을 그렇게 훼손하고...... 경찰이 지키고 있어 그게 힘들어지니 이런 짓을...... 뭐 흑마술이나 오컬트 따위를 믿는 사람인 걸까요? 누군가를 이런 짓을 할 정도로 미워한다던가......"
종현이 꾸벅꾸벅 조는 태민을 잠깐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맙소사...... 그런 놈들이 제일 골치아픈데... 아우 씨, 대체 뭐야 이건?"
"태민이 가서 재울까요? 아까도 내내 자료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진기 형 온다고 했으니까."
기범이 인형에게서 떨어지지 않던 시선을 태민이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어, 그래. 진짜 피곤한가보네. 이런 걸 보고도 눈이 감기는 게......"
"재우고 올게요."
민호는 태민의 팔을 잡아 일으켜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푹 쓰러지려는 그의 허리를 단단히 붙든 채로 민호는 숙직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예 잠이 든 상태인 태민은 그가 이끄는 대로 숙직실을 나갔다. 기범의 시선은 이제 태민이 아닌 민호의 등으로 향해 있었다. 민호가 태민을 데리고 나간 뒤, 종현이 기범을 불렀다. 종현은 아직 피곤한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김기범이."
"왜요, 팀장님."
"너 이제 좀 솔직하게 말해보면 안 되냐."
"뭘요......?"
종현이 어깨를 으쓱하고 기범을 다시 쳐다보았다. 사실 뭘요, 하며 대답을 피하기 했으나, 기범도 이미 종현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최민호와의 관계를 묻는 거겠지. 종현은 아직 민호와 기범이 무슨 사이인지 몰랐다. 워낙에 티를 내지 않는 민호와 포장에 능한 기범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막연하게 무슨 일이 있어서 친해진 줄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또 어떻게 빠져나가야하나 머리를 굴리며 화제를 돌리려는데,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기범의 머릿속을 치고 들어왔다.
"솔직하게? ......그래요, 팀장님. 사실 이 침대가 여자 침대라서 그런지 괜히 오밤중에 마음이 동하네요. 막 특유의 향기도 나는 것 같고... 어떻게 아셨담, 역시 팀장님도 30대 아저씨지만 남자였네요. 아직 건강해서 다행이에요, 팀장님."
"...헛소리 하지 말고, 너희 잤냐?"
"......네?"
기범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떻게 저런 질문을, 남자 둘을 두고 할 수 있는 거지? 애써 엉뚱한 소리를 하며 넘어가려고 했더니, 절대 그냥 넘어가질 않는다.
"아니, 뭐... 크흠, 그렇게까지 표정 굳히지 마, 진짜인줄 알겠네. 아니, 요새 좀 친해졌나 했더니 완전 찬바람이 쌩쌩 불잖아. 난 또 최민호 저게 너 어떻게 한 줄 알았지."
"하, 선배가? 저를요? 팀장님...... 선배를 그렇게 모르세요? 제발 해달라고 부탁해도 안 할 사람이 무슨...... 엄한 상상마세요. 소름끼치네요. 그리고 대체 무슨 이유로 선배가 저를......"
"민호가 너 좋아하니까."
"팀장님!"
기범은 종현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종현은 가만히 기범을 보고 있었다. 그의 큰 눈은 어느 새 졸음기가 가신 깨끗한 눈이었다. 좋아한다고? 최민호가? 그건 뭔가 잘못된 것 같네요, 팀장님. 그렇지 않으니 이미 쫑 난거죠. 쫑쫑.
"김기범 네가 그걸 못 느꼈을 리 없을텐데...... 야, 답답해. 둘 중 선택해라. 너희 사귀냐, 그냥 잤냐."
"......"
엄연히 따지면 둘 다가 맞거늘, 기범은 차마 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태민이 재우러 간 최민호는 왜 이런 상황에 오질 않는가, 아예 같이 자기라도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숙직실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얘들아!"
"진기 형!"
기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어 온 듯한 진기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진기는 민호와 함께 있었는데, 아마 그의 연락을 받고 진기를 데리러 갔다 온 모양이었다. 어쨌든 제 시간에 도착한 진기에게 마음 속으로 백팔배를 하며 기범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피할 수 있었다. 진기는 얼마 전에 새로 했다던 보슬보슬한 펌을 한 머리를 흔들며 눈이 없어지도록 환하게 웃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웃음이 오늘따라 더 눈에 들어왔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걸까.
"얘들아 안녕! 이 밤중에 수고들 한다. 이상한 게 발견되었다며? 뭔데?"
"어어, 형 왔구나. 침대에 있어."
진기는 걸치고 있던 미색 카디건을 벗어놓고 푸른 반소매 남방 차림으로 종현이 가리킨 침대에 다가섰다. 박힌 칼을 보고 흠칫 놀라던 진기는 이내 검시용 장갑을 끼고 몇 번 당겨서 정돈했다. 민호는 기범을 보다가, 무심하게 한 마디 던졌다.
"넌 나랑 얘기 좀 하자. 이건 일에 대한 얘기니까 조용히 따라오면 좋겠다."
"......"
저건 제안도 아니고 부탁은 더더욱 아니고... 협박이냐? 기범은 달갑잖은 얼굴로 몸을 돌려 나가버리는 민호의 등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곧 한숨을 내쉬고, 그 뒤를 따라나갔다. 그는 나가면서 종현과 진기를 돌아보았다. 저 둘도 만만찮게 복잡한 것 같은데......
민호와 기범이 나간 뒤 진기는 조용히 인형과 칼에 묻은 핏자국을 채취했다. 종현은 그 옆에서 더 이상의 혈흔이 없는지를 확인하려 루미놀(특수한 빛을 비추면 혈흔이 보이게 하는 화학약품)을 뿌리고 있었다.
"다 했어, 형?"
"응, 거의 다 되가. 왜, 불 끄려구?"
"엉, 다 하고 불러. 채취 중에 끄면 왠지 형이 '멀쩡히 박혀 있는' 칼에 다치기라도 할 것 같아서. 으하하."
"야, 너 그거 내가 평소에 덤벙대니까 놀리는 거지. 이게 형을 뭘로 보고...!"
"자자, 이진기 씨. 피곤하실텐데 어서 끝내고 자러 갑시다. 언제까지 그 소름끼치는 인형을 만지고 있을 건데요? 이러다 사랑에 빠지겠네, 하하하하."
진기가 짐짓 토라진 얼굴을 하고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옆에서 지켜보는 종현의 팔을 툭 쳐냈다. 종현은 낄낄거리며 계속 진기를 놀리고 있었다. 진기의 일이 끝나자 종현은 방의 전등을 껐다. 어두워진 방 안을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바닥에는 추가로 떨어진 혈흔은 보이지 않았다. 원래 혈액이 떨어져 있다면 그 안의 헤민과 반응하여 청백색의 빛을 발해야 하지만, 그런 부분은 없었다.
"흠, 아무래도 인형에 직접 피를 묻힌 다음 가져 온 것인가 본데. 그럼 그 피를 묻힌 장소는 또 어디람. 아후, 이건 진짜 그림자를 잡는 것 같네."
"일단 채취한 혈액을 가져가서 검사를 좀 해 봐야겠어. 사람의 피일 확률이 높지만, 동물의 피를 묻힐 경우도 있으니까. 여기 임상병리실(Lab) 사용할 수 있나? 병원이라 여기서 하면 편ㅎ...... 우왁!"
"아, 형! 또또!"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 침대에서 내려오던 진기가 휘청, 발을 헛디뎠다. 종현이 깜짝 놀라서 그를 덥썩 붙잡았다. 조금 적응된 어둠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에 주변이 보일 때라 진기는 아고고고, 하면서 바닥을 보며 몸을 가누었다. 진기는 무심코 고개를 들다가 깜짝 놀랐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안기다시피해서 그에게 의지하고 있느라 종현의 두 팔이 그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바로 코 앞에서 보이는 종현의 얼굴은 그도 좀 놀랐는지, 아무 말도 없이 진기를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뜻밖의 것을 보았다는 듯 살짝 멍해져 있었다. 잠시 그 상태가 유지되자, 시간이 흘러도 자길 놓지 않는 종현이 이상해서 진기는 그를 조심스레 불렀다.
"......종현아...?"
"......아, 미안."
진기를 붙들고 있던 종현은 자신이 그를 아직도 안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급히 손을 떼고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진기는 야속하게도, 제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그 아이요?"
"어."
"그냥 놀아줬어요, 그 애와도, 그 인형과도."
"이상한 기색이 전혀 없었어? 좀 여느 어린애와는 다른 분위기라던지......"
"분위기라...... 글쎄요, 제 나이 또래 아이들에 비해서 좀 우울한 기색이긴 했어요. 그게 병원에 오래 입원한 아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어릴 때 정신적인 충격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일에 대한 이야기라길래 그러려니 했는데, 진짜로 일에 관한 이야기만 하는 민호에게 기범은 내심 안심했다. 이 밖의 다른 이야길 한다면 그 자리에 서 있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호는 희한한 걸 물었다. 아까 일과 상관이 없는, 복도에서 만난 아이에 관한 이야길 꺼냈던 것이다. 기범은 비명소리가 들린 뒤, 복도 불이 환하게 켜지는 걸 보고 급하게 아이를 데리고 병동으로 들어왔었다. 아이는 병실이 1310호라길래 거기까지 데려다주고 민호가 있는 곳으로 왔던 것이다. 1310호는 어린아이 한 명이 쓰기에는 너무 넓다 싶은, 독실이었다.
"너 그 아이의 눈에 초점이 없었다는 거 못 봤어? 그렇게나 가까이 있었는데?"
"......초점이 없었다구요...?"
"그래, 아까 너와 공원으로 갈 때 분명히 그 아이의 눈엔 초점이 없었어. 뇌성마비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도 초점은 잘 맞지 않지만, 그 아이는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도 아예 눈에 빛이 없었어."
"정말요? 아니 잠깐...... 저는 왜 못 본 거죠?"
"그걸 나한테 물으면 답이 나오냐."
민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혀를 찼다. 기범은 조금 당황한 모양이었다. 초점이 없었다니...... 분명히 아이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민호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길 할 리는 없었다. 원래가 그런 사람이니까. 분명히 뭘 보고 저런 말을 하는 것일테지. 기범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아, 하며 엄지와 중지를 부딪혀 딱 소리를 냈다.
"선배,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한 게 있었어요. 초점이 있고 없고는 잘 모르겠지만...... 그 아이, 혼자 1인실을 쓰고 있었어요. 만약 1인실을 쓸 정도로 집이 잘 산다면, 그 시간에 부모님이나 간호인이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 아이의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죠. 환자를 위한 꽃도, 어떠한 장난감도, 먹을 것도 전혀 없었어요. 그 아인 혼자일 가능성이 있어요. 게다가 처음 절 봤을 때, 엄마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구요. 그리고 노래를 부르면서 밤중에 어두운 복도를 돌아다니는 것도......"
"그 아이도 조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건가... 되도록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생각해도 그 아이는 뭔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그럼 내일 그 아이에 대해서 좀 알아보도록 할게요. 우리가 찾지 못했던 게, 또 그렇게 조사하다보면 우연히 발견할 수도 있겠죠."
민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범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민호는 입꼬리를 미미하게 올린 채 어딘가 꼬인 게 눈에 훤히 드러나는 기범을 보고 있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자기가 화났다는 걸 그대로 내보였던 아까의 기범이 좀 재미있기도 했다. 아까의 일을 잠시 머릿속 저 구석에 밀어넣을 정도로. 아마 일이 끝나는 대로 또 찬바람이 쌩쌩 불겠지.
"일 얘기 할 때는 성질 안 내네."
"......일은 일이고 그 얘긴 달라요. 선배가 선호하는 태도 아니에요? 일할 때 일하는 거."
"......그 아이 이름이 뭐야?"
"이름이요? 아...... 지연, 한지연이래요. 올해 9살이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