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07. 01. 축설 - [민호/기범] Korean top model (from. 콜라스타)
[밍키] Korean top model
w. 콜라스타
명쾌한 셔터소리와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플래쉬는 언제나 쾌감으로 다가온다. 당당하게 런웨이를 걸어나온 모델들은 그 쾌감에 몸을 맡긴채 도발적이고 당당한 포즈로 쏟아지는 찬사를 흠뻑 들이마쉰다. 마약과도 같은 그것은 사고를 마비시키고 모델들로 하여금 미친듯이 빠르게 돌아가는 패션쇼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초인적인 능력을 부여한다. 실루엣까지 완벽하게 무대 뒤로 모습을 감추는 그 시간,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기위해 주어진 시간은 3분 여. 전쟁이랄 것이 없는 전쟁터속에서 가장 많은 찬사를 받게될 오늘의 승자는 누구일까? 조금은 감상적인 생각을 하면서 고혹적으로 보일 만큼만 턱을 든다. 몸에 벤 감각, 각도, 포즈. 평소의 십수배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생각이란 부질없는 것이 된다.
*
평소보다 다소 늦게 일정이 잡혔었던 밀라노의 프레타포르테가 끝나자 자유로워진 모델들에게는 여러가지 패션 관련 요청이 쇄도한다. 소위 '잘 나가는' 모델에 속하는 민호에게는 패션쇼 일정 이전부터 에이전시를 통한 계약건이 끊임없이 들어왔었기 때문에 고된 런웨이 일정을 마치자마자 채 하루도 온전히 쉬지를 못하고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솔직하게 한국행이라는 말을 들었을때는 좀 불쾌했다. 물론 자신역시 한국인이지만 이미 세계 정상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자신이 세계 레벨에 미치기에는 아직 모자른 한국에서의 런웨이라니! 단순히 돈 문제인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확인이 필요했다. 톱모델 최민호를 단 하루도 쉬지 못하게 한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정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민호야, 불카 쏘지말고 빨리 눈 붙여. 한국에 도착하면 일해야 하잖아."
"한국에는 왜 가는 건데?"
"스케쥴이라니까? 아, 좋다~. 두부 잔뜩 들어간 된장찌개 먹고싶어! 오랜만에 한국 갈 생각하니까 왜 이렇게 좋지? 너도 그렇지 민호야."
"얼마짜리인데?"
"응? 된장찌개? 글쎄.... 백반집에서는 한 4000원?"
"아니, 대체 얼마짜리인데 내가 이 난리를 치면서까지 가야 하냐고."
동화속 왕자님같은 외모와 함께 민호를 스타덤에 올린 또 하나의 매력이 바로 불꽃 카리스마, 통칭 '불카' 되시겠다. 강렬하다못해 꿰뚫어버릴 듯한 그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순진한 아이마냥 꿈뻑꿈뻑 바라보던 민호의 진기는 3분 여간 지속되는 불카에도 아랑곳하지않고 느릿하게 기내용 담요를 끌어올리고는 잘 준비를 마저 마쳤다. 제가 좋아하는 말캉한 두부같은 이 남자가 3개국어 동시통역이 완벽하게 지원되는 엘리트라는 걸 전혀 예상도 못하게 만드는 그런 동작으로 말이다. 이렇게 눈치없이 굼뜨기만 할 때는 솔직히 짜증도 나지만 함께한 세월도 그렇거니와 진기가 얼마나 유능하고 좋은 사람인 줄 알기에 최대한으로 눌러참아보는 민호다. 사실 진기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눈치가 17%쯤 모자르기는 하지만(이건 민호가 관찰을 통해 뽑아낸 정확한 데이터이다.) 그건 개인적인 일 한정이고 맡은 바는 무서울 정도로 확실하게 처리를 해낸다. 민호의 취향을 잘 알고 있다는 점도 민호로서는 좋았다. 가끔 이렇게 속터지게 할 때도 있긴 하지만 민호의 취향에 맞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서 잘 추려주는 편이었으니까. 상황이 이러니 이렇게 화가 끓고는 있지만 진기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들어준다면 금방 고개를 끄덕일 것임은 사실 민호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욱하는 성격 때문에 귀찮게 그를 닥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태민씨 프로모션."
"이태민?"
"응. 네가 좋다고 했던 그 더블 하프코트 디자이너야. 에스모드에서도 이미 유명인사였다고 하더라고. 월반해서 나이도 굉장히 어리데. 말 그대로 천재지."
천재가 천재 소개를 한다. 취향이 좀 분명한 편이라 좋아하는 것에는 열렬한 팬이고 싫어하는 것에는 신경도 안쓰는 편인데, 언젠가 보게 된 신인 디자이너의 작품을 민호가 마음에 들어하는 것을 매니저도 아니라 진기가 기억을 해 주었던 모양이다. 진기와 알게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왜 파리가 아니라 한국에서 하는거야?"
"한국인이잖아. 모국에 제일 먼저 컬렉션을 선보이고 싶데."
"기획은 형이 하고?"
"응. 그러니까 너 데리러 왔지. 같이 가려고."
성실한 편이라 자신이 맡은 기획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않는 진기이니 이렇게 민호를 직접 데리러 오기까지 하면서 일을 성사시키는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듣자 큰 틀이 잡힌다. 고개를 끄덕이며 민호도 진기의 요청에 따라 잠을 청했다.
모국에 제일 먼저 컬렉션을 선보이고 싶데.
어린 나이에서 오는 향수병일까, 아니면 자기 나라에 대한 자부심일까?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태민에 대한 궁금증도 더 생겼다. 이번 무대에 정말로 서고 싶어졌다.
*
"축하해! 우리 탬도 이제 데뷔하는 거야?"
태민의 개인사무소까지 찾아온 기범은 이 신예 천재 디자이너와의 친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꽃다발과 함께 태민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얼결에 그런 기범을 힘겹게 받아낸 태민이 천사같은 미소로 기범을 반겨준다. 해외에서 입지를 굳힌 최민호가 단연 대한민국 최고의 남자 모델이라면 기범은 독특한 비쥬얼과 그만의 분위기로 민호를 무섭게 추격하고 있는 국내 최고의 남성 모델이었다. 이제 슬슬 해외에서도 그 이름을 알아주기 시작한 모델계의 이단아. 기범은 생긴 것 만큼이나 존재가치도 독보적이었다. 모델치고는 작은 키. 남성적이지도, 그렇다고 미소년 같은 완벽한 미모를 가지고 있지도 않은 모델. 거기에 동성애자라는 소문까지.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그는 그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그만의 스타일로 패션계에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런 기범이 이제 시작되는 세계무대에서의 활동을 앞두고 한국에서의 고별전으로 선택한 것이 태민의 프로모션이라는 건 태민으로서는 감사한 일이었다. 기범의 숨겨진 연인이라는 같잖은 루머에 또 시달리게 된다고 해도 말이다. 자신의 첫 쇼인 동시에 앞으로 모교와 다른 유명한 디자인 스쿨에서 선보이게 될 쇼 케이스의 출발점. 때문에 태민은 그 누구보다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패션계에 신선한 충격을 줄 한국'을 모토로 한국에서의 쇼 케이스에서는 모델 전원을 한국인으로 선발했다. 덕분에 태민의 디자인을 선보인다기보다는 모델들을 위한 의상을 만드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건 크게 개의치 않는다.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옷'을 만들어낼 재능이 태민에게는 있었으니까. 모델은 물론이고 쇼에 직접적으로 참가하는 스텝들도 전부 한국인이었다. 총 기획은 해외에서도 여러번 큰 행사를 담당한 적이 있는 천재, 이진기가 맡았고 그 유명한 파슨스의 학장이 직접 행차하게 만든 아름다운 런웨이와 파티장은 진기와 파트너쉽을 발휘한 신예 아트 디렉터, 김종현의 디자인이다. 지휘에만 그치지 않고 태민을 위해서 직접 현장까지 뛰어준다는 두 사람 수고도, 노페이라도 태민의 쇼에 참가하겠다는 기범의 제안도 태민에게는 그저 고마운 것들 뿐이었다. 게다가 남성 모델계의 핫 아이콘인 최민호까지 포섭했다니! 진기의 문자를 받고 태민은 정말로 뛸듯이 기뻤었다. 그런러니 기범의 이런 격한 애정표현은 그저 애교로 받아줄만하다.
"고마워요, 기범이 형. 감사는 제가 드려야 하는데 뭐 이런 것까지 다 사오셨어요."
"태민이가 누군데! 앞으로 얼마나 많은 쇼를 할 지 모르는데 미리미리 잘 보여둬야지. 안 그래? 그리고 네 덕에 내 첫 해외계약을 땃잖아. 이건 그에 대한 감사표시야. 프랑스에 가면 내가 유~명한 식당에서 스테이크 쏠게!"
"안 그러셔도 된다니까요. 앉아요. 모델분들은 너무 늘씬해서 서 있으면 불안해보여요."
"보기보다 안 그렇다, 너? 여자 모델들 보면 다 말랐지? 그래도 힘이 얼마나 센데! 속으면 안되, 태민아. 그것들은 다 마녀야."
기범의 거침없는 입담에 태민은 까르르 맑게 웃고 말았다. 자신도 이제 어엿한 사회인이고 성인이건만 아직도 기범은 걱정 일색이다. 패션계가 아직도 좀 문란하다는 둥, 게이도 많으니 조심하라는 둥. 구설수에 자주 오르내리는 기범이 할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나처럼 되지 말라는 거야'라면서 조목조목 챙겨주는 기범이 고맙기도 했다.
"진기 형만 믿어, 진기 형만. 알았어? 나머지는 다 속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니까?"
"알았어요. 참. 진기 형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진기 형이 민호씨 설득했데요. 같이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까..... 늦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도착할 것 같아요."
"오~. 진기 형 능력있네? 그 사람 무지 재수없고 깐깐하다면서."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라고 하셨거든요. 에이전트에 요청을 넣는 게 낫겠다고 말씀드렸는데 확실한 게 좋다고 굳이 직접 찾아가셨나봐요."
"하긴. 진기 형은 철두철미하니까. 여하튼 잘 됬다. 그 사람이랑 작업해보고 싶어했잖아."
태민이 수줍게 웃는다. 실력있는 디자이너라고 다들 인정하고 있는데도 태민은 마냥 순진한 학생같다. 그런 태민이 귀여워서 기범은 태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릴 때 하던것처럼.
"있다 진기 형 마중나갈거면 내가 태워줄게."
"오늘은 시간이 좀 있어?"
"응. 국내 일정은 정리가 거의 다 됬거든. 갈거지?"
"네.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아직 면허가 없는 태민에게는 물론 잘 된 일이었지만 기범의 친절에도 속셈이 없진 않았다. 궁금했다. 현재 남성모델계 최고의 자리에 있다는 최민호가.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땅을 치고 통탄할만한 사건의 시작이었다.
*
태민의 환한 미소가 어쩔줄 몰라 흐르는 땀으로 뒤덮히기까지 걸린 시간은 정확하게 5분이었다. 간단한 자기소개 직후에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저 조그만 차 한대로 네 사람이 가자는 거냐고요."
말투에서는 다행히 조금의 예의가 느껴졌지만 내용의 그게 아니었다. 마치 기범의 자동차는 애초부터 탈 것이 아니었다는 듯한 뉘앙스에 예민하게 날이 선 기범이 결국은 히스테릭하게 대꾸한다.
"그런데요? 마티즈 처음 봐요? 영화에도 나온 유명한 자동차잖아요?"
"영화에 나오면 뭐해요. 편하길 해요 안전하길 해요? 게다가 좁아터진 경차잖아요. 아무튼 난 안 타요. 저 차 타고는 못가요. 어차피 호텔로 바로 갈 거였으니까 전 여기서 그만 헤어지는 걸로 하죠."
"진기 형이 하는 말 못들었어요? 메인이니까 컨셉같은 건 듣고 가야 할 것 아니에요!"
"컨셉이요? 이미 들었잖아요. 코리아라니, 정말 진부하네요. 갑자기 쇼에 서고싶은 마음이 없어졌어요."
"뭐라구요?"
비록 주차장이지만 그 사람 많다는 공항에서 한국의 내로라하는 톱모델 둘이서 마티즈 때문이 싸우고 있다. 이 얼마나 기가막힌 상황이란말인가?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태민은 자신의 쇼케이스의 컨셉이 '진부하다'는 평가절하를 듣고서도 그것에 대한 감흥은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기범이 성격을 죽이지 못해 또 가쉽거리가 되는 것이 훨씬 걱정이었다. 더군다나 민호보다도 기범에게 더 비중을 두고있는 태민이었기에 걱정이 더했다. 이런 식으로 일이 틀어지다 기범이 행여 손찌검이라도 해서 구설수에 오르면 어쩌나, 태민은 간절한 시선을 진기에게 보냈다.
"그만들 하자. 컨셉 얘기는 어차피 아트 디렉터가 있을때 같이 하는 게 정식이고 지금은 브리핑이었으니까 건너뛰지 뭐. 시차 적응이 안되서 민호도 나도 좀 피곤해. 마중나와준 건 고맙지만 오늘은 그냥 인사한걸로 치고 일단은 푹 쉬자. 아니면 호텔에서 저녁이라도 같이 할래?"
"그럼 전 진기 형이랑 택시타고 갈게요. 두 분은 천천히 오세요."
"가면 같이 가는 거지 정말 이러기에요?"
"먼저 가서 샤워라도 하고 기다리겠다구요. 경차는 사람이 많이 타면 연비가 떨어지잖아요. 그쪽한테도 이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걸 걱정할 정도로 거지는 아니거든요!!!"
태민의 데뷔가 어째 많이 불안해졌다.
*
메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두 사람의 신경전은 최종미팅까지도 이어졌다. 디자이너와 기획자의 설명을 들을때까지는 괜찮았다. 삐그덕대기 시작한 건 컨셉에 대한 아이디어 수렴때부터였다. 의욕적으로 제시하는 여러가지 의견들을 민호가 비꼬기 시작하자 기범이 '가짜 한국인'은 모르는게 당연하다면서 정면으로 맞부딫힌 것이다. 그리고 절정에 달한건 당장 리허설부터 시작됬다.
"디자이너님 여기 의상이 잘못 나간 것 같은데요. 남자 모델은 캣워크를 하지 않아요."
전반적으로 모델들은 곧은 자세의 바른 걸음을 걷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캣워크, 그러니까 다리를 교차하여 걸음의 동선이 일직선이 되는 워킹법은 비주류다. 말이 캣워크지 경보와 비슷한 걸음걸이이기 때문에 예쁘게 보이기도 어렵다. 간혹 있기는 해도 골반이 넓은 여성 모델 중에서나 간간히 볼 수 있을 뿐이지 남성 모델 중에서는 확실히 기범이 유일한 케이스였고 말이다. 여하튼 여기서 중요한 건 민호가 기범의 워킹을 비꼬았다는 데에 있었다. 모델은 외모, 워킹, 포즈가 장사밑천이나 다름없는 직업이다. 그러니만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높다. 당연지사 그런 부분을 지적당하면 기분도 많이 상한다. 아직 미숙한 모델이라면 정상에 있는 민호의 배려없는 평가에 눈물을 뚝뚝 떨구었을지도 모르겠다. 기범이 안 그랬다는 것이 아니다. 쌓인 관록만큼 설움에 내성이 생긴 기범은 끊는 속을 포커페이스로 감추다가 돌연 고혹적으로 웃어보였다. 민호가 비꼬았던 그 워킹으로 당당하게 민호의 앞까지 걸어가기까지했다. 연습실이 순간 비명에 휩싸였다. 하얀 나비를 연상시키는 손동작으로 민호의 턱끝에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뿥여 갖다댄 기범이 민호의 얼굴을 살짝 들어올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우리 자기, 나한테 반했구나?"
코끝이 닿을 듯이 얼굴이 붙더니 부드럽게 촉,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진다.
"얘길 하지 그랬어. 나도 사랑해~♡."
민호의 얼굴이 보기좋게 일그러졌고 기범은 언제 비음을 섞었냐는 듯 시원한 목소리로 한참을 웃어재꼈더랬다. 혹시 민호가 쇼 케이스를 그만 둘까봐 조마조마한 분들을 위해 미리 말씀드리자면, 그날의 승자는 민호도 기범도 아니라 불카보다 더한 카리스마를 뽐냈던 한마리의 티라노사우르스였다.
*
"미친놈."
얼음만 남은 글라스를 거칠게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민호는 이를 사려물었다. 짜증냈다. 짜증이 실체화 될 수 있다면 커다란 손이 되어서 민호를 양쪽에서 짓누르고 있을 터였다. 열받았다. 그런데 그걸 해소할 거리가 마땅찮자 더 열받았다. 하룻밤을 청하러 왔던 여성 모델들은 제 손으로 내 친지 오래였다. 입술이 아깝냐고? 그건 아니었다. 어차피 쇼가 있을때마다 적어도 한두번씩은 모델들과 난잡한 잠자리를 가졌었으니 입술도 닳을만큼 닳아서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럼 남자한테 당해서 더러운 기분이냐고? 자랑은 아니지만 이미 이것보다 몇십배는 진한 키스도 남자랑 해봤다. 알다시피 이 바닥에는 게이도 많고 괴짜도 많아서 술마시다 슬슬 다가와서는 찐한 스킨쉽을 하고 킬킬대는 정신나간 놈들도 한두번 본 것이 아니다. 그럼 이유가 뭐냐? 지금 여기 서 있는 미친놈이 문제였다.
"제길."
테이블에 내리쳐진 뒤에도 민호의 손에서 깨질듯한 압박을 견뎌야했던 유리컵은 결국 바닥에 내쳐져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생생한 파열음에도 민호의 속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이상하게도 자꾸 떠올랐다. 살살 눈웃음을 치던 고양이눈도, 느릿하지만 경쾌하고 유혹적인 걸음걸이도 눈앞까지 다가왔던 새하얀 피부와...... 달콤하고 촉촉하던 입술의 감촉까지도. 과즙이라도 머금은 듯 상큼하게 붉은 입술이 떠오르자 다시 견딜 수 없어져서 애꿎은 테이블을 또 세게 때렸다. 여자를 그렇게 후리고 다녔는데 취향은 김기범이라... 제가 생각해도 환장할 노릇이었다. 기범이 알면 분명히 코웃음을 치며 신랄하게 비꼬아줄 일이다. 사납게 머리를 긁어대다가 샤워나 하기로 했다. 머리를 식히고 술 한잔 더 한 다음에 자야겠다.
*
한국. 쇼 케이스를 담당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숙제처럼 주어진 이번 테마는 명료하긴 한데 쉽지는 않았다. 태민이 바라는 건 '한국인이 보여주는 한국'인데 한국 사람으로서 살아왔기 때문인지 느낌으로 풀어내려니 쉽지가 않았다. 모국에 대한 애정이 부족한 민호에게 한국은 그렇게까지 자랑스러운 존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싫다고 잘라 말할수도 없는 무언가가 있다. 진부하지만 바로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이 수도없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감정선을 잘 못잡고 있는 건 다른 모델들도 마찬가지였다. 태민이나 진기는 어떤 생각이 있었던 게 분명하지만 '한국 답게 표현해 주세요'라는 부탁은 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너무 난해했다. 스케치만으로 감동을 선사했다는 그 런웨이를 보면 조금 감이 올까? 제발 그러기를 바라며 오전시간에는 워킹과 포즈연습에 주력했다. 핏은 어제 체크가 끝났으니 런웨이를 보기 전까지는 사실 그닥 할 일도 없었다.
"민호씨, 어디 불편해요?"
"저한테 반하셨데요~."
"그거 말고 발이요."
표정도 걸음걸이도 거울속의 민호에게선 눈에띄게 이상한 점을 모르겠던데 과연 보통내기가 아닌건지 묻는 질문이 구체적인데 정확하다. 누가 먼저 그만두냐로 경쟁하려던 둘을 찍 소리 못하게 만들었던 어제의 티라노사우르스군이 은근한 눈웃음을 치는 기범을 무시하고는 민호의 오른발을 가리켰다.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일인데 짜증이 먼저 솟구쳤다. 안그래도 짜증이 나는 상황에서 제가 던진 유리잔의 파편을 고스란히 밟고 지나가는 실수를 범한 민호는 그 당시에도 아프다고 소리조차 지르질 못했다.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여우같은 사내놈한테 이렇게까지 휘둘릴줄이야. 단순히 휘둘리고 있는게 아니라는 사실에는 더더욱 짜증이 났다. 그러니까 어제 일은 무덤까지 가져갈거다.
"워킹이 느리잖아요. 무릎은 맞는데 조금씩 멈칫하는 게 보여요."
"죄송합니다."
"죄송한 게 문제가 아니라 어디가 아프거나 신발에 이상이 있으면 얘길 하라구요. 신발 줘봐요 가끔 굽을... 헐, 이봐요, 괜찮아요? 런웨이 설 수 있는 거에요?"
".....문제없습니다."
문제없다고는 말했지만 질척한 느낌과 뒤잇는 역한 냄새에 민호도 미간을 좁혔다. 이정도인지는 몰랐는데 구두 바닥이랑 스타킹 밑바닥이 새빨갛다. 밴드는 피떡이 되어서 붙어있는지조차 눈으로는 확인이 안될 정도였다. 멋모르는 여자 모델들이 저쪽에서 높은 소리를 내며 자지러졌고 동료 남자 모델들은 급하게 민호를 부축해서 자리에 앉혔다.
"세상에, 이럴 때까지 두면 어떻게 해요! 뭐에 다친 거에요? 저쪽 발은 괜찮아요? ...엄마야...... 여기! 소독약이랑 휴지랑 솜 좀 갖다주세요! 디렉터님! 그냥 구급상자 채로 가져와요."
놀랍게도 제일 먼저 민호의 발 상태를 살피고 치료를 시작한 건 기범이었다. 반대쪽 신발도 벗겨보더니 같은 상태라는 걸 안 기범이 말라붙어가는 피 때문에 벗기는 것도 어려운 스타킹을 거의 뜯어내고는 제대로 붙어있지도 못하는 반창고를 떼 버리고는 불고 소독약을 들이부어 발을 씻기듯이 문질러주었다.
"세상에.. 이게 반창고 정도로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한 거에요? 깊게도 베였네... 아파도 좀 참아요."
말나오기 무섭게 쓰라림과 약냄새가 동시에 확 끼쳐왔다. 들 다 족히 좋은 기분으로 받아들일 건 아니라 이것 때문에 치료를 자처했나 싶었는데 발바닥에 코가 닿을듯이 하고는 신중하게 꼼꼼히 약을 바르는 게 악의가 있는 것 같지 않아서 불평없이 그냥 두었다. 치료가 능숙한데다가 여자 못지않게 꼼꼼하다. 다시 생각해보면 발이라는게 선뜻 손대기 어려운 부분인데 먼저 나서서 치료해 주는 게 고맙기도 했다. 솜으로 다시한번 상처 주위를 닦고 다시 연고를 바르고 하더니 호호 불고는 거즈로 잘 감아준다. 티나지않게 발목 선에서 딱 끊어주는 철두철미함에 역시 한국의 톱모델이구나 싶으면서도 마음 씀씀이는 참 고맙다. 무엇보다도 기범이 자신을 걱정해준다는 게 기분이 좋았다. 이 순간에도 말이다.
"계속 한다고 할 것 같아서 이렇게 해 주긴 하는데, 너무 아프면 그냥 그만둔다고 해요. 병원도 다녀오구요."
이미 심장이 민호의 제어를 벗어난 모양이다.
*
갖은 사고와 난해한 주제로 애를 먹였던 이번 쇼케이스의 해답은 의외로 기범이었다. 기범의 신선함과 따뜻함이 민호에게는 한국에서 가장 좋은 것이었고 그 이미지를 살려냈다. 엄청나게 근사한 표현은 못될 지 모르겠지만 태민의 계획에는 이 편이 더 잘 맞지 않았나 싶었다. 과연 천재라고 할까...... 무시 못할 꼬마다. 디너타임이 시작되자 발바닥이 좀 쑤시는 것 같아서 칵테일 한잔을 하면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혼자 결정을 했다. 남성복 라인에서는 나름 유명인사니 오래 쉴 수는 없지만 계속 서 있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칵테일을 가지러 가기도 귀찮아서 결국은 담배를 태웠다. 디자이너가 알면 화를 내려나?
"괜찮아요?"
여태 신경쓰고 있었던건지 디너타임이 시작되자마자 자신을 찾아온 기범이 그렇게 물었다. 그게 기특해서 민호는 슬쩍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듣자하니 이제 큰물 맛보러 온다면서요?"
"네?"
"유니크하긴한데 그쪽은은 아직 멀었어요."
"자고싶으면 그렇다고 얘기하라니까요?"
"난 지젤 번천 정도 되지 않으면 같이 안자요. 비싸거든요."
명함을 건네는 손은 거만하게 집게 손가락과 중지의 사이에 끼운 채로.
"이건 비밀인데 이번에는 기범씨가 도움이 됬으니까. 뉴욕에 오면 말해요. 최고급 호텔로 모실테니까."
제 할말한 하고 사라지려는 민호를 흘겨보던 기범이 갑자기 멱살을 잡듯 민호의 넥타이를 잡아 끌어당겼다.
"난 비싼 척 하는 남자 별로거든요?"
두근두근했다.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는 감각이 전류처럼 짜릿하게 신경을 타고 흐른다.
"근데 이건 비밀인데 사실 제가 당신이 좀 궁금하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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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누나... 콜라누나 사랑해여ㅠ_ㅠ 누난 진짜 여시닌가바여ㅠㅠㅠ잉여의 생일에 콜라스타 누나께서 주신 섹시훈훈한 밍키입니다!누나 감사해용>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