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07. 01. 축설 - [민호/기범] 가식의 가면을 벗겨드립니다 (from. 엠나래)
[민호/기범] 가식의 가면을 벗겨드립니다
(For Rosetta)
W. 엠나래
(재배포, 공유는 허락하지만 2차 가공은 절대 안됩니다.
선물로 드리는 글이니까 공유하시더라도 'For Rosetta' 지우지 마세요.)
“아흐…뜨거…….”
도저히 더 잘 수가 없어!!
나는 그대로 이불을 확 걷어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겨울에는 따뜻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일어나는 게 그렇게 좋더니만, 이제는 이놈의 햇살이 따뜻이고 뭐고, 아주 뜨거워서 잘 수가 없다. 당장 침대 위치를 바꾸던가 해야지. 나는 기지개를 쭉 켜면서 콘솔에 있는 탁상시계를 힐끔 돌아보았다. 11시가 다 되어 간다. 일어날 때 됐었구나. 민호를 깨울까… 아니, 그냥 두자. 어차피 얘도 더워서 곧 일어날 테다. 지금도 표정이 완전 일그러져서 우스운 모양을 하고 있다. 악몽을 꾸나, 더워서 그러나. 아무튼 표정 보니 더 안 잘 것 같다.
그래도 피곤할 테니까 일부러 조심해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욕실에 들어가서 대강 샤워를 끝내고 나왔지만, 민호는 여전히 자고 있다. 이 잠만보새끼…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그 뜨거운 침대에서 자고 싶니. 나는 끙끙 앓는 표정으로 자고 있는 민호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피곤하다는 걸로 십분 먹고 들어간다고 생각하자. 그런 민호를 위해서 나는 아침이나 차려야지. 굶길 수는 없고, 그렇다고 밥을 먹지는 않으니까 식빵과 바게트를 꺼냈다.
민호는 바게트를 싫어한다. 나는 토스트보다는 바게트를 생크림에 찍어먹는 걸 좋아한다. 나는 식빵을 두 장 토스트기에 넣고 바게트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었다. 그 때였다.
“뭐야…….”
차림을 다 마치고 일어나기를 기다릴까, 생각하던 차에 마침 민호가 방에서 나온다. 착 가라앉아서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뭐냐고 묻는다. 영 듣기 싫지만은 않은 목소리다. 워낙 목소리가 저음인데다가 굵직해서 그런가.
“잘 잤어?”
“뭐하냐고.”
아, 무서워. 아침만 되면 텐션이 급격하게 낮아지는 최민호. 내가 져 줘야지.
“아침 식사. 씻고 와서 먹어.”
“…….”
대답도 안 하고 고개만 끄덕거리더니,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욕실로 들어간다. 흰색 면 티셔츠 아래로 다소 까무잡잡한 피부가 비쳤다. 탄탄한 민호의 등을 보고 있자니, 괜히 장난기가 발동했다. 나는 한 입 베어 문 바게트를 내려두고 발소리를 죽여 민호를 따라갔다. 하품을 찍 하면서 느릿느릿 욕실 문을 열 때, 문이 닫힐세라 재빨리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나가.”
“내가 도와줄게.”
“뭘 도와주,”
“이리 와 봐.”
“어?”
아, 빨리빨리. 내가 재촉하자 민호가 허, 하고 웃으며 내 손을 따라 움직였다. 나는 민호를 거울 앞에 세워두고, 쉐이빙폼을 손바닥에 양껏 짰다. 사실 난 면도를 할 만큼 수염이 잘 자라질 않아서 면도를 자주 하지 않기 때문에, 쉐이빙폼의 적당량을 잘 모른다. 그래도 적은 것 보단 많은 게 좋겠지.
“헐, 설마 니가 해주겠다고?”
“응. 있어 봐, 나 잘해.”
“푸핫.”
민호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지만, 나는 진지하다. 나는 하얗고 뭉글뭉글한 크림을 민호의 턱에 조심스럽게 발랐다. 어, 이거 근데. 너무 많이 짰나. 민호의 턱에 난 조금은 귀여운, 짧은 수염에 비해서 너무 많이 바르고 있단 느낌이 든다. 민호도 느꼈는지 거품을 바르는 내 손을 밀쳐내며 투덜거렸다.
“야, 얼굴에 있는 털 다 밀어 버릴끄야? 이게 므야, 병시나.”
턱에 거품 잔뜩 묻히고 불완전한 발음으로 짜증내 봤자, 하나도 안 위협적이거든요. 인상을 팍 쓰고 있는데도 하얀 거품 탓인지 귀여워 보였다. 나는 뭐 낀 놈이 성낸다고, 내 손을 밀어내는 민호의 손을 탁 쳐내고 지나치게 많은 쉐이빙폼에 열중했다.
“아, 있어 봐. 너 자꾸 말하면 거품 입에 들어간다?”
“…….”
내 말에 민호는 눈살을 확 찌푸리며 내게 무언의 협박을 했다. ‘제대로 안 하면 죽여버린다.’
나는 크림이 고루 발린 민호의 턱에 조심스럽게 면도기를 갖다 댔다. 비싼 값을 하는 면도기라더니, 부드럽게 싹싹 잘도 밀려나간다. 자신감이 붙은 내 손은 점점 더 대담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민호의 표정도 시시각각 색이 바뀐다. 섬뜩한 면도기 날이 제 살을 할퀴고 갈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다. 내가 아무리 면도를 잘 안 한다지만, 그래도 남잔데 면도 하나를 못하겠…
“아, 씨발!! 아프잖아!!”
못하는구나.
순식간에 내 손은 주눅이 들어 사려가면서 움직였다. 한우가 생각날 만큼 큰 눈을 부라리고 날 내려다보는데, 지은 죄가 있어서 찔끔했다. 얼굴이 생명인데, 그 얼굴에 그어버렸으니. 나는 최대한 앙큼한(?) 미소를 지음으로써 면도가 어색한 내 손에 대한 사과를 했다. 아, 눈에 힘 좀 풀어. 내가 웃어주잖아, 히. 나는 잘난 척 해놓고 실수한 것이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서둘러 면도를 끝내고 수건으로 얼굴에 덕지덕지 묻은 쉐이빙폼을 닦았다. 그러자 민호가 뭉그러진 발음으로 괴상한 소리를 내기에, 쉐이빙폼을 닦는답시고 민호의 입을 수건으로 마구 뭉갰다. 분명히 더럽다느니, 그걸로 닦는 게 아니라 세수를 해야 하는 거라느니, 하는 등등의 잔소리일 테니까 듣기 싫었다. 나는 흰 거품이 덕지덕지 묻은 수건을 대충 뭉쳐 던져버렸다. 아무리 면도는 내가 해줬다고 해도, 내가 니 얼굴까지 씻겨줄 순 없잖아.
나는 민호의 짜증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의 어깨를 세게 치며 말했다.
“야아~ 멋있다, 최민호. 누구 남잔지, 잘생겼네.”
“까분다, 또.”
“뭐야, 맘에 안 들어?”
“…누가 뭐래?”
쑥쓰러워하긴. 좋으면서. 귀 빨개졌어, 너.
“내가 면도까지 해 줬으니까, 빨리 씻고 나와.”
“어.”
나는 민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고 욕실을 나왔다. 민호가 보답하듯이 내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아, 민호 손이 커서 기분이 좋다. 나는 그 손길이 좋아서 저절로 눈을 감았다. 어린애가 된 기분이다.
“김기범.”
목소리도 좋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막 갈라져 있던 목소리가 그새 원래의 부드럽고 깊은 중저음으로 돌아와 있다.
“응.”
“느끼지마.”
“씨…….”
하여튼 초치는 데는 선수라니까. 잠시라도 좋은 꼴을 못 봐요.
“나가, 샤워할거야.”
“흥, 안 그래도 나가려고 했어.”
자기가 손으로 나 붙들어 놓고.
민호는 보기보다 엄청 능글거린다. 무뚝뚝하면서도 다정하고 말끔할 것 같은 인상과는 달리, 약간 매니악하고 능구렁이같은 구석이 있다. 물론 민호가 그런 면이 있다는 건 나만 안다. 나한테만 그러니까.
나는 바게트를 입에 물고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재미없는 것만 한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채널을 위로 쭉쭉 올렸다. 빠르게 넘어가는 화면 중에서 순간적으로 내 눈을 사로잡은 얼굴이 있었다.
“민호다.”
나는 도로 채널을 내렸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 2년 전 쯤에 찍었던 영화가 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질리도록 재방송을 해주고는 한동안 뜸하더니, 잊을 만하니까 다시 재방송을 해준다. 나는 벌써 열 번은 본 것 같은 그 영화에 다시 시선을 고정시켰다. 2년 전의, 다소 어려 보이는 최민호가 숨 쉬고 있었다. 아, 어려 보이는 건 머리가 짧아서 그런걸까.
『우리… 사랑해볼래?』
“우리… 사랑해볼래? 큭큭.”
나는 민호의 억양과 목소리를 흉내내보았다. 하도 많이 본데다가, 이 장면은 특히 하이라이트라 대사까지 알고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었다. 민호가 여자에게 고백하는 장면인데, 민호의 표정과 억양, 그 눈빛이 어색해서 좋아한다. 어색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내 느낌에서 그의 연기가 어색하다는 거다. 민호는 저런 말투로 저런 대사를 뱉을 위인이 아니라서 내가 볼 땐 어색하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오그라든다는 거지. 그래서 나는 그를 만인의 연인으로 만든 저 진지한 장면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난다. 푸흐, 귀여워. 무슨 생각하면서 찍었을까.
“또 보냐?”
“응? 아하하. 그냥. 재밌는 것도 안하고, 오랜만에 보니까 재밌는 거 같아서.”
“코미디 영화도 아닌데 뭐가 재밌냐?”
“웃기잖아.”
뭐야, 얼마나 진지한 영환데. 내 말에 민호가 중얼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저를 무시하는 것으로 들었나보다. 아닌데. 그냥 진짜 웃겨서 그런거야.
“민호야.”
“왜.”
“너 저 장면 찍을 때 무슨 생각하면서 연기했어?”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진짜? 그래서 좋았어?”
“질문이 뭐 그래?”
민호는 내 질문이 몹시 어이없다는 투로 되물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어이없는 질문을 퍼
부었다.
“사랑한다고 생각하면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게 돼? 나 생각 안 나?”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거냐.”
“응? 응?”
나는 발딱 일어나서 그의 바로 앞을 가로 막고 섰다. 나보다 반뼘 정도 큰 민호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까치발까지 들었다. 민호는 놀랐는지 약간 흠칫하며 고개를 뒤로 뺐지만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민호의 또 다른 버릇이다. 언제나 내 눈을 본다는 것. 내 눈 속에 있는 자신을 똑바로 본다는 것. 그래서 나도 그를 함빡 내 눈에 담는다. 가까이서 보는 민호는 또 다른 모습이다.
“니 생각이 왜 나?”
“…진짜 안 나?”
어, 이게 아닌데. 장난으로 시작한 질문이 섭섭함으로 마무리되는가, 싶은 순간. 최민호는 내 마음을 들었다 놓는다. 아니, 아예 날 쥐고 흔들었다.
“저 년이 너무 못생겨서 니가 얼마나 예쁜지 생각 못했어.”
우와. 난 그대로 민호의 목에 매달려 키스를 퍼부었다. 키스를 좋아하는 민호가 나를 밀어낼 정도로.
* *
민호와 함께 산 지 벌써 5년은 넘었다. 그 시작이 뭐였는지 가물가물하다. 다만, 우리는 친구였다는 것. 그것만 확실하다. 지금은 친구라기엔 무리가 있다. 우린 친구나 동거인 그 이상의 관계라고, 아무튼 이렇게 정의해본다.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연인이라고 하기엔 닭살 돋는다. 그냥 서로 없으면 안 되는 사이…가 연인인가? 아, 몰라.
나와 민호는 중학교 때부터 쭉 학교를 같이 다녔다. 중학교 때는 바로 옆집에 살아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고등학교까지 함께 진학했고, 정말 신기하게도 2년 연속으로 같은 반이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거의 5년 이상을 붙어다닌 셈이었다. 그렇게 같이 다니면서 모든 것을 같이 하다가 유일하게 같이하지 못한, 아니 하지 못한 것이라기보다는 받지 못한 것이 바로 ‘길거리 캐스팅’이다. 분명 같이 길을 걷고 있었는데 명함을 받은 것은 민호뿐이었다. 말로만 듣던 길거리 캐스팅을 바로 앞에서 본 순간이었다. 워낙 키도 크고 얼굴도 조각같이 빚어놓은 얼굴이라 민호가 더 먼저 눈에 띈다는 것쯤 이해할 수 있었지만 사실 좀 서운했다. 나도, 민호보다 키가 좀 작다 뿐이지 잘생겼단 말 듣고 컸는데. 키도 민호랑 같이 있으니까 작아 보이는 거지, 작은 키는 절대 아니다.
민호가 받은 명함에 누구의 연락처가 적혀있는지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명함을 건네주고 간 남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매니지먼트사 중 한 곳의 포토그래퍼였다. 민호는 무뚝뚝하게 그 명함을 버리려고 했지만 내가 극구 말려 그 길(?)로 밀어 넣었고, 그 결과가 바로 오늘에 이르렀다. 내가 민호를 밀어 넣은 이유는 단지 멋있는 모습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민호는 아직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민호는 연기 따위 못할 성격이라는 주위의 예상을 보란 듯이 깨버리고 순식간에 톱배우의 지위에 올랐다. 인기를 얻고, 점점 자기 관리의 중요성이 커지자, 안 그래도 눈에 띄게 완벽한 외모였던 민호의 페로몬(?)이 더 짙어졌다. 확실히 꾸미고, 자기 관리에 철저해지다보니 멋있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거였지만, 난 불안했다. 민호가 연습생으로 들어가서부터 그와 동거를 시작했던 나는 민호가 완벽해지면 질수록 더욱 큰 불안감에 시달렸다. 괜히 밀어 넣었나, 후회까지 했다. 이유가 뭐냐. 그야 당연히 한 마디로 민호는 예전부터 ‘내 꺼’였기 때문이다. 사실 민호에게 이런 내 심정을 말했다가 “니 꺼 어디 안 가니까 그딴 생각 말고 집이나 지켜.”라는 가슴 찡해지는 대사를 들은 후로는 불안함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도 아직 좀 불안하다. 적당히 잘났어야 말이지.
그러고보면 나도 참 웃기다. 내 손으로 연예인 하라고 등 떠밀어 놓고 인기 많아지니까 질투하고 말이다. 이런 나를 보고 민호는 아이돌에 미치는 계집애들 같아진다고 했지만 난 납득할 수 없다. 내 문제가 아닌 걸. 지가 그만 멋있어지던가.
나는 문득 민호가 처음 연예계에 발을 들이던 때를 떠올리며 tv 채널을 돌렸다. 영화가 끝나니까 그냥 갑자기 예전이 생각났다. 그러고보니 내가 민호와 관계가 깊어진 것도 그 무렵이다. 민호가 데뷔하기 직전부터 동거를 시작했고, 우리는 친구라기엔 지나치게 야릇한 관계가 되었지.
스케줄이 없다던 민호는 갑작스럽게 걸려온 매니저 형의 전화를 받고 나간 상태였다. 간만에 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고 잔뜩 계획을 세웠었는데 그 전화 한 통으로 물거품이 되어버려 기분이 몹시 우울하다. 아침까지만 해도 둘이 기분 좋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건만… 오늘 하루는 이런 식으로 지나가는 구나. 아깝다. 오랜만에 요리도 해주려고 했는데, 쳇.
할 일이 없다. 민호가 있었으면 지금쯤 뒹굴뒹굴 할 일 없이 놀고 있었을 텐데. 바보상자나 보는 신세라니. 민호 나오는 프로그램도 없… 어?
“민호다.”
뭐야, 언제 녹화한 거지? 저 토크쇼에 나갔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나는 잠시 민호의 스케줄을 되새겨보았다. …아, 지난주에 갑작스럽게 하나 잡힌 녹화가 있었다. 그게 저건가. 아무튼 나는 화면 속 민호에게 집중했다. 무슨 얘기 중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화기애애하다. 여자 얘기 중이었군. 문득 민호가 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찌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 요즘 너무 외로워요.」
「아하하! 민호씨가요?」
토크 내용도 맘에 안 들고, 민호 대답도, 저렇게 말하는 표정도 맘에 안 든다. 외롭다고? 나는 당장 민호의 어깨를 잡고 짤짤 흔들며 ‘너 진짜 외로워?!’ 라고 묻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뭐가 외로워, 뭐가! 내가 자기 모니터링 다 하는 거 알면서 저런다. 나 들으라고 한 소리지, 저거.
“흥, 진짜 외로운 게 뭔지 모르는구나, 최민호?”
놀아주나 봐라. 섹스 하자고 해도 안 해버릴라.
웃는 거 봐. 사회자는 물론 방청객들까지, 만인의 사랑을 받는 최민호가 ‘외롭다’고 한 것이 재밌다는 듯이 크게 웃어버리는데, 나는 전혀 웃음이 안 난다. 거기다가 민호는 뭐가 좋은지 미소만 짓고 있다. 속을 알 수 없는 그 미소에 나는 약이 올랐다. 그렇게 웃지 말라니까. 다 넘어간다니까.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고 다 넘어간다고. 애가 탄다.
「그럼, 혹시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뭐 저렇게 케케묵은 질문이 다 있담. 다 아는 질문을 하다니. 근데도 나는 채널을 돌리려고 들었던 리모컨을 내려놓지 못했다. 뭐라고 할 지 궁금했다. 내가 아는 이상형대로 말할 지, 아니면 방송용으로 포장해서 말할 지. 최소한 내가 아는 민호는 방송이랍시고 말을 지어내는 재주는 별로 없다. 나는 민호의 입술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뭘 하든 섹시한 사람이요.」
풉. 웃기고 있네. 나는 헛웃음이 났지만, 방청객들은 ‘어우~’ 하고 내숭떠는 여자 같은 목소리로 리액션을 했다. 설레냐? 너네보고 하는 말 아니거든?
‘뭘 하든 섹시한 사람’ 이라. 말을 좀 바꿔야 될 것 같다. 그는 나에게 ‘난 야한 사람이 좋아’ 라고 했었다. 섹시한 사람이나, 야한 사람이나, 둘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는 나로써는 별 차이를 못 느끼겠다만, 어쨌든 방송이라고 말을 바꿨다는 게 우습다. 제 아무리 제 잘난 맛에 사는 민호라고 해도 역시 방송에서는 말을 달리 할 수밖에 없다는 게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세요. 정확히 어떤 순간 ‘아, 섹시하다’라고 느끼세요?」
「음…….」
민호는 즐기는 듯한 얼굴로 웃으며 고민하는 척,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턱을 괴고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 질문은 내가 답을 모르는 질문이다. 민호의 대답을 기억해놨다가 써먹어야겠다. 외롭다니까, 말 들어줘야지.
「샤워하고 머리를 털면서 나올 때 제 와이셔츠만 입고 있는 거요.」
「아~ 그거 좀 위험한데요?!」
…샤워하고 머리 털면서 나올 때 자기 와이셔츠…
"풉… 푸하하하!!!!"
난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터져서 배를 잡고 구르며 웃어댔다. 하도 웃어서 배가 땅기고, '억억'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웃었다.
"아, 최민호, 정말…못 말린다니까. 큭큭큭…!!"
민호가 말한 섹시한 사람의 조건은 얼마 전 그가 내게 요구했던 거였다. 물론 난 들어주지 않았다. 미쳤냐고 욕했지. 매니악한 최민호 병이 또 도졌나, 싶어서.
“큭… 그렇단 말이지?”
민호야, 빨리 들어와라. 외롭다는 말, 방송에서 거짓말로라도 못하게 해주마.
.
.
.
.
민호는 생각보다 늦게 들어올 거라고 했다. 무슨 대본 리딩을 이렇게 늦게 사람을 불러내서 시켜. 나는 조금 짜증이 났지만 곧 있을 서프라이즈를 위해서는 조금 늦는 게 좋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참았다.
나는 민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타이밍이 안 맞으면 구리니까. 내 전화는 그래도 재깍재깍 받는 민호. 두 번쯤 신호가 가자, 바로 전화를 받았다.
“민호야.”
―어, 왜.
“언제 와?”
―지금 가는 중이야.
다행이다. 늦게 온대서 새벽까지 깨 있어야 하나, 걱정했는데. 난 새벽 2시가 한계다.
“들어오기 전에 문자해.”
―들어가기 전에?
“응. 엘리베이터 내릴 때.”
―왜.
“하라면 해.”
―뭐야… 아무튼 알았어.
나는 전화를 끊고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대충 시간을 맞춰야지. 어디쯤 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느긋하게 씻어도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어차피 문자도 해 주기로 했으니까. 나는 느긋하게 샤워를 즐겼다. 몸으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좋아서 그냥 맞고만 서 있었다. 그 때였다. 물줄기의 감촉에서 벗어나 이제 막 샤워볼을 집어든 순간, 수납장에 둔 휴대폰에서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난 물소리에 섞여 내가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설마, 하고 휴대폰을 확인했는데. 이런 젠장.
“뭐 이렇게 빨리 와?!”
제기랄. 나는 물만 잔뜩 뒤집어써서 찝찝한 기분을 뒤로하고 샤워를 접어야 했다. 샤워볼을 집어던지고 샤워기를 껐다. 뭐, 언제 오든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얼마 전에 새로 산 바디 클렌저의 쿨워터 향이 몸에 남아있으면 기분이 더 좋을 텐데. 아무튼 나는 몸을 닦은 뒤, 옷을 입었다. 그리고 굿 타이밍. 도어 락을 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지금이다!
“나 왔,”
“왔어?”
흰색 네 와이셔츠 입고 흠뻑 젖어 물이 똑똑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흰 수건으로 탈탈 털면서 나왔다, 민호야.
“뭐해, 안 들어오고?”
나는 일부러 물에 젖은 목소리를 냈다. 모르는 척 해야지. 나 니 토크쇼 못 봤어요, 민호야.
내 질문에 민호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처음에는 벙 찐 표정이더니, 지금은 아주 섹시하게 일그러졌다.
“…씨발, 김기범.”
“응?”
어흥. 민호 짐승이 포효했다. 난 몰라. 괜히 여우짓 했나 봐. 오늘 잠은 다 잤다. 민호는 정말 말 그대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아, 이 와이셔츠 비싼 건데. 찢겨 나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
.
.
.
“야, 여우야.”
…여우래. 표정만 보면 여우 물어 죽일 기세네.
“야.”
“내가 왜 여우야?”
“다 알고 그랬지.”
아, 찔려. 콕콕. 이 귀신같은 자식.
“내, 내가 뭘?”
“아님 말고.”
민호는 시선을 회피하는 나를 보며 빙글빙글 웃었다. 능구렁이 같은 놈.
“야.”
“왜, 또.”
“와이셔츠 말고 슬립도 좋아하는데.”
슬립이라 하면, 여자들이 남편의 애정이 식었다 느꼈을 때 밤을 불태워 보고자 장착해 본다는 그 아이템? 그 얇고 매끈매끈한 소재로 된, 안 입느니만 못한 천 쪼가리?
“…죽어, 이 변태 새끼야!!!”
“크하하.”
얼굴이 확 달아올라서 쿠션을 집어 던졌지만 민호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쿠션을 쳐냈다.
“이쁘니까 봐준다.”
흥. 누가 봐 달래?
…멋있으니까 나도 봐 준다. 흥.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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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래누나 감사합니다! 달달한 밍키가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생일 축하해주셔서 감사드리고 누나 사랑해영>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