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글

[민호/기범] 납량 (納凉) In Morality

Rosetta. 2010. 10. 17. 16:14

 * 모든 설정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실제 그것들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 한국경찰과학수사팀(한국 CSI : KPSI) 수사과

  제 2지부(경기) 팀장 : 김종현(30)
  주 팀원 : 최민호(29) 김기범(27) 이태민(26) 

* 국립과학수사연구소(NISI)

  검시관 : 법의학자 겸 외과의 이진기(32)
      

납량 (納凉) In Morality  written by. Rosetta

     


꿀꺽.

 

기범은 마른침을 목 뒤로 넘기며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찰랑이는 그의 금발 몇 가닥이 땀으로 촉촉히 젖은 하얀 목덜미에 감겨 붙었다. 단아한 턱선 끝으로 맺혀 떨어지는 땀방울을 대충 손등으로 훔쳐내며 기범은 걸음을 빨리 했다. 엘리베이터 문까지 걸어오는 그 차갑고 축축한 돌바닥의 길이가 왜 이리도 길은 것인지, 기범은 그걸 자각할 여유도 없었다. 그만큼 그의 모든 신경은 시각과 청각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어느 새인가 반소매 셔츠 밖으로 드러난 하얀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있었다.

   

"이상해...... 왜 이렇게 기분이 눅눅하지?"

   

웬만한 귀신은 무섭지 않다고 자부하는 기범이 그런 소리를 할 정도면, 지금 상황이 그닥 좋지는 않다는 말이다. 어릴 때 무당인 양어머니의 손에 자라면서 귀신을 보지는 못했어도 들을 수는 있는 능력을 가진 기범은, 지금 그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을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아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누구라도 자신의 귓가에서 들리는 이상한 공명음 따위를 새벽에 듣게 된다면 같은 후회를 할 것이다. 기범은 자기도 모르게 오싹함에 얼어 붙으려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였다.

   

"선배랑 잔 지가 오래 되서 그런가...... 심신이 허해졌나 봐?"

   

그래도 진심이 듬뿍 섞인 헛소리는 얼어 붙지 않았다. KPSI 퇴근 후 귀찮은 티 팍팍 내면서도 제 집 앞까지 차로 데려다 준 민호와 헤어져 자신의 오피스텔로 향하는 길을 즐겁게 가고 있었던 기범은 분명,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이상한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오피스텔의 유리문을 통과하자마자 갑자기 싸늘한 냉기가 자신의 등으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유리문 부터 엘리베이터 문 앞까지 오는데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건만, 기범은 몇 시간이 걸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유리문을 통과하자마자 아주 미미하게 들리던 공명음은 조금 더 커져 있었다.

   

"이...이번에는 또 뭐야, 누가 죽었어? 내일 팀장님 데리고 와서 여길 파보기라도 해야 하나......"

   

기범은 태연히 혼잣말을 하고 있었지만 이미 혀 끝은 달달 떨리고 있었다. 귀신이라면 여유있게 말 붙이기까지 시도할 기범이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달랐다. 어떤 말도 들리지 않고 그저 알 수 없는 음산한 공명음만 계속 들리지 않는가. 이게 몇 분을 계속되니 슬슬 기범도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안 되겠다. 빨리 집에 올라가야지."

   

기범은 뻣뻣한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급하게 검지 끝으로 올라가는 버튼을 마구 눌렀다. 9층에 멈추어 있던 엘리베이터가 서서히 빨간 전광을 빛내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전광판의 숫자가 바뀌기 시작했는데도 불안감과 초조에 기범의 검지는 계속 버튼을 눌러대고 있었다.


 

8. 7. 6. 5. 4. 3. 2. 1.

 

땡-

 


엘리베이터의 배가 갈리자마자 기범은 누구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듯 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형광등 빛이 하얗게 밝혀진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기범이 타고 난 뒤에 누군가 더 타지도 않았다. 지금 시간이 새벽 2시를 향해 가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범은 작게 숨을 몰아쉬며 10층 버튼을 꾹 누르고 닫힘 버튼을 눌렀다. 스르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기범의 하얀 얼굴을 삼켰다.


 

쿵......

 


기범을 삼킨 엘리베이터는 서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범이 사라진 엘리베이터 문 앞에 희뿌연 그림자가 어른거린 건 그와 동시였다. 길쭉하게 위로 퍼진 하얀 그림자는 너무 길어서 천장까지 굴절되어 꺾어져 있었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과 넓은 옷자락이 유리문 사이로 불어오는 후덥지근한 여름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림자는 마치 엘리베이터를 놓치기라도 한 모양새로 가만히 그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아, 그런데...... 사람의 그림자가 원래 하얗던가......?

 

놀랍게도 그 그림자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말을.

   

"놓쳤다...... 2층으로... 올라갔네...? 그럼 나는 5층에서 기다려야지......"


 

 

*

  


기범은 무심히 느릿하게 바뀌는 전광판의 숫자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느려터진 엘리베이터가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민호에게 전화를 할까, 했으나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전파가 닿지 않는 구식 휴대폰이라 그것도 불가능했다. 기범은 엄지 손톱을 이로 깨물며 불안한 눈으로 전광판의 숫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안 바뀌는 거야, 아직도 3층이야?

 

기범은 이젠 달달 떨리는 다리 때문에 엘리베이터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곳에 기범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 때문에 더 새하얗게 변한 얼굴이 마치 귀신 분칠을 해 놓은 듯 했다. 기범은 뽀얀 피부가 아니라 백짓장 같은 색에 인상을 찡그렸다. 아, 이런 칙칙한 색은 상큼한 나한테 안 어울린다고. 이마에 흥건한 물기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던 기범의 손이 뚝 멈췄다.

   

"이......이게 뭐...... 으아악!!"

   

거울 안의 자신은 기범이 이마에 두고 있던 손이 아니라, 다른 곳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 손 아래로 시뻘건 피가 주륵 주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핏줄기는 흥건하게 그의 얼굴을 적시며 턱 끝으로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울 속의 기범은 옷의 앞섶까지 핏덩이를 묻히고 서 있었다. 기범은 완전히 공포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을 치다가 반대편 엘리베이터 벽에 쿵, 하고 등을 찧었다. 기범은 거울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자신을 보고 믿지 못하겠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아무것도 묻어나오지 않은 자신의 손을 보고 거울을 다시 보더니 넋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렸다.

   

"아, 아닌데? 이건 내가 아니야, 나는......"

   

그 순간, 땡 하는 소리가 들리며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렸다. 기범은 허옇게 뜬 얼굴로 전광판을 확인했다. 아직 5층인데 왜 멈춘거지? 기범은 기겁을 하며 닫힘 버튼을 마구 눌러댔다. 엘리베이터 문이 느릿하게 다시 닫혔다. 기범은 사색이 된 얼굴로 덜덜 떨고 있었다. 손과 발이 차가웠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닥으로 눌러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엘리베이터의 벽이 금방이라도 기범에게 구겨들어 와 자신까지 함께 구겨버릴 것 같았다. 사방에 둘러진 거울도 피를 흘리며 자신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무서워.

 

너무 무서워.

 

끔찍해.

 

내가 어떻게.

 

내가 어떻게 그런 모습으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5층은 잠깐 비추었던 흐릿한 빛마저 어디론가 사라지고 다시 축축한 어둠이 깔렸다. 계단 쪽에서 스르륵 미끄러지듯 올라 온 하얀 그림자는 엘리베이터 문 앞에 멈추었다. 마치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확인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던 그림자는 다시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조금 날카로워진 소리로.

  



 
"놓쳤다...... 6층으로... 올라갔네...? 그럼 나는 10층에서 기다려야지......"  


*


 

 

기범은 거울 속의 피투성이가 되었던 자신을 보지 않기 위해 아예 쭈그려 앉았다. 너무 무서웠다. 피를 흘리거나 신체 부위가 절단되었거나 배가 갈라진 채 내장을 흘리고 다니는 귀신을 본 적은 없었다. 오직 그 영혼에게서 나는 이러이러한 상태다, 말로 듣기만 했을 뿐. 그렇다 보니 거울 속에서 발견한, 그것도 자신의 피로 난도질된 얼굴을 보니 충격인 것은 당연했다. 기범은 바들바들 떨면서 이미 감각을 잃어버린 팔을 감쌌다. 오슬오슬, 기분 나쁜 여름의 습기와 공포로 인해 돋은 소름이 그의 온 몸을 덮고 있었다.

   

"우윽... 무서워...... 선배......"

   

긴장으로 달아오른 기범의 입술에서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무언가에 대한 공포로 가득 차 버린 그의 머릿속에 마치 한 줄기 빛처럼 떠오른 것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 잘나게 생긴 얼굴을 잠깐 떠올린 것만으로도 몸 전체를 막아버린 공포심을 조금 몰아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범은 바들바들 떨리는 두 손을 부여잡고 휴대폰을 꺼내 전화 할 준비를 했다. 집에 도착하면 곧바로 전화하리라. 당장 와 달라고, 아니면 기범이 민호의 오피스텔로 눈 딱 감고 뛰어 갈 판이었다.


 

그 때, 땡 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범은 앞 뒤 잴 것도 없이 벌떡 일어나서 엘리베이터 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기범을 끔찍한 공포로 밀어넣었던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드디어 자신을 집어 삼킬 듯 했던 공간에서 빠져나왔다는 안도감에 기범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보았다. 아, 그런데......

   

"어? 여기 우리 집 층이 아닌데......?"

   

엘리베이터는 한 층 더 올라가더니 멈추었다. 기범의 집은 10층. 여기는 9층이었다. 기범은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도 너무 긴장한 나머지 10층 버튼을 눌러야 할 것을 잘못해서 9층 버튼을 누른 모양이었다. 하지만 기범은 알까. 만약, 기범이 10층 버튼을 제대로 눌렀다면... 아마 지금쯤 그 하얀 그림자와 정면으로 마주쳤을 것이다. 물론 그가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기범은 어디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민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발 받아라, 받아라, 받아라, 받아줘요, 선배......!"

   신호가 꽤 오래 갔다. 기범의 가슴은 빠르게 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혹시 안 받으면 어떡하나, 이대로 1층까지 달려 그에게 갈 것인가, 아니면 한 층 더 올라가 자신의 집으로 갈 것인가. 사실 기범은 자신의 집에 가서도 아까 피범벅이 되어 거울 속에 있었던 자신이 계속 생각 날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다른 사람의 사지가 잘리고 피투성이가 된 걸 보는 것과, 자신이 그런 모습을 보는 건 확실히 다르다. 기범은 그 차이에서 느껴지는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었다. 차라리 그 혼이라도 있었다면 덜 무서웠을 것이다. 적어도 어떤 이유인지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알게 될 테니까. 그런데 이건,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기이한 공명음만 들리니, 눈과 귀가 모두 막힌 느낌이었다. 

신호가 거의 끊어질 만해서 음성으로 넘어갈 때 즈음, 전화가 연결되는 소리가 기범의 얼굴에 화색이 돌게 했다.

   

[뭐.]

   

대답 한 번 맛깔나게 하신다. 저런 멋대가리 없는 대답에도 기범은 너무 기뻐서 하늘로 날아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새벽이라 한층 내리깔아진 그의 저음을 듣자마자 기범은 둥둥 떠 있던 심장이 다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가급적 그가 와 준다면 올 때까지 전화를 끊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정말로 무서웠기에.

   

"선배?! 선배 나 좀 살려줘요! 오피스텔에 귀신이 있다구요!"

 

[......자라.]

 

"엉? 아, 끊지 마요! 진짜라니까요?!"

 

[무슨 헛소리야, 새벽에. 너 귀신 볼 수 있잖아.]

 

"볼 수 있으면 진작 봤고, 들을 수 있으면 진작 들었죠. 나한테 들리지 않아서 그래요. 이게 뭔가 이상하다니까요...!!"

 

[후우, 진짜...... 야, 나 방금 사거리 지났어.]

 

"선배, 미안해요- 그치만 아우, 저 진짜......! 거울로 이상한 게 보였어요!"

   

민호는 수화기 너머에서 흘러오는 기범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헛소리를 하나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평소의 김기범 답지 않았다. 지나치게 떠 있는 목소리와 휴대폰으로도 확연히 들리는 목소리의 떨림. 게다가 살짝 울음기도 묻어 있었다. 그나저나 기범이 들을 수 없는 존재의 목소리라면, 대체 어떤 거지? 혹시 숨겨진 시체 따위가 그 오피스텔에 묻혀 있거나 하지는 않겠지? 운전대와 휴대폰을 바꿔 쥐며, 민호는 유턴 지역으로 차선을 옮겼다.

   

"너 어딘데, 오피스텔이냐?"

 

[네, 9층...... 9층이에요...!]

 

"9층? 집은 10층 아니었냐."

 

[아, 그게...! 너무 긴장해서 잘못 눌렀어요...]

 

"...아주 가지가지 하지.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올라갈테니까."

 

[고, 고마워요 선배! 사랑해요!]

 

"......괜한 짓이나 하지 마."

   

민호는 막판에 들린 기범의 사랑 고백에 괜히 민망해져서 대충 말을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와 함께 기범은 끊겨버린 전화를 한동안 계속 들고 있었다. 그만큼 기범은 정신이 없었다. '귀신에 홀렸다' 는 말이 이렇게 잘 실감이 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세상에 원이 남아서, 미련이 남아서 붙어 있는 혼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에게는 일상이 되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다. 만약 지금 자신의 얼을 온통 다 빼 놓고 있는 것이 귀신이라면 차라리 기범 자신에게 아무 말이나 걸었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런 정체 모를 일은...... 정말 싫다.

   

"......!"

   그 생각을 하자마자 기범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한기. 기범은 온 몸을 굳혔다. 아까 1층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진하고, 훨씬 차고, 훨씬 무거운... 그런 한기였다. 순간적으로 엄습해 오는 차가움과 오싹함에기범은 벌떡 일어나 계단을 마구 달려 내려갔다. 목덜미에 뒤에서 바로 뿜어지는 차가운 숨결에 기범은 머리꼭지가 온통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공명음이 계속 귀로 파고들었다.
   

타닥, 타닥, 타닥!



 


"헉, 허억...! 헉!"

   

우웅... 웅...



 

마치 어딜 가든 도망칠 수 없다는 듯이 공명음은 끈질기게 기범을 쫓아다녔다. 제일 견디기 힘든 건,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한기와, 고개를 돌리면 왠지 눈구멍이 검게 뻥 뚫리고 그 구멍에서 검붉은 피를 줄줄 쏟아내고 있는 여자가 있을 것 같다는, 만들어진 공포심으로부터 나오는 환상이 떠 있을 것 같았다.

 기범은 5층까지 어두운 층계를 내려가다 무슨 생각인지 다시 9층으로 올라 왔다. 그는 몸을 떨다가 이내 아랫입술을 꼭 물었다. 아까는 자신의 모습과 자신이 생각한 망상에 놀라서 넋을 잃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 기범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왜... 나를 따라다니는 거야?"

   

응답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한기가 아직 기범의 뒤에 무언가가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몸을 완전히 그 쪽으로 돌린 기범이 다부진 얼굴로 다시 물었다.

   

"거기 있지, 너."

 

"......"

 

"내가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걸 알아서 찾아 온 거야?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니."

 

"......"

   

기범은 여전히 묵묵부답인 무언가가 있을 법한 곳을 노려보다가, 아 정말! 솔직해지라고, 좀! 하면서 인상을 팍 구겼다. 그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있다가 정말로 화가 난 얼굴을 했다. 그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말이지 뜻밖의 것이었다.

   

"나랑 놀고 싶었던 거니?"

   

기범의 물음에, 드디어 계단 쪽에서 희끄무레한 것이 스르르 올라왔다. 아까 그, 하얀 그림자였다. 그 그림자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바닥에서부터 위로 솟아오르더니, 기범의 어깨 정도 오는 크기로 자랐다. 그림자는 점점 형태를 갖춰 가더니, 중학생쯤 되어보이는 소녀로 변했다. 기범은 후유, 하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게 아니라 다행인건가...... 선배 괜히 오라고 한 건 아닌가 모르겠네. 이따 약간의 연기는 좀 해야겠지.

   

'......네.'

 

"근데 왜 이런 장난을 해, 혼날래? 내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 줄 알어?"

 

'오빠, 죄송...해요......'

   

기범이 이 소녀와 이야기를 하는 건 그렇다 치고,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에 기범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 깍쟁아, 내가 왜 코를 후비다 피를 흘려야 되는 건데!! 난 코를 파지 않았다고!!......이렇게 해서라도 네게 돌아오는 대답이 있기를 바랐어? 그래서 나한테 장난을 친 거야?"

 

'미...안해요, 오빠... 마음에... 안 들으...셨구나......'

 "당연히 마음에 안 들지. 나처럼 완벽한 남자가 코 파다 피 나는 꼴이라니...... 그것도 폭포수처럼 펑펑-! 내가 얼마나 그 추한 모습이 충격이었는데, 울 뻔 했어! 수명이 10년은 준 것 같다. 이건 내가 그런 게 아니더라도 굴욕이야. 너 명예훼손 한 거야, 방금. 야, 웃지마!"   그랬다, 기범은...... 거울에 비친 자신이 코를 파다 폭포수 같은 피를 줄줄 흘리고 있자 그 도를 넘은 추함에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꽤나 자신의 얼굴을 아끼고 있었고, 심지어 민호가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 얼굴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아주 굳게 믿고 있는 기범으로서는 이런 장난은 진정 자존심 기스였다. 게다가 살짝 나르시즘까지 가지고 있는 기범의 얼굴에 그런 장난을 쳐 놓았으니, 기범이 충격을 받은 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소녀는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작게 웃고 있었다. 웃는 얼굴에 뭐 못 뱉는다고, 기범은 어이구, 하면서도 그냥 웃어버렸다.   


*

  


오늘이 49재여서 이 오피스텔에 사는 오빠를 보러 잠깐 온 것이었다는 소녀는, 우연찮게 이 곳으로 들어오던 기범에게서 자석처럼 끌리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고 했다. 기범은 그걸 듣자 제게서 나오던 게 영력(靈力)과 흡사한 기운일 것이라 추측했다. 보통 사람과 다른 기운을 가진 기범을 본 소녀는 신기하기도 하고 혹시 기범이라면 자신을 보아 줄 수 없었던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달래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영이 그리 강하지 못해 또렷한 목소리 대신 공명음을 냈던 것이고, 나중에 기범이 몇 번을 물었을 때 느릿하게 대답을 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어찌되었든 이런 저런 이야기를 소녀와 나누던 기범은 엘리베이터의 전광판 숫자가 점점 올라가는 걸 보고 민호가 왔음을 직감했다. 오빠 잘 보고 가라는 기범의 말에 소녀는 환하게 웃고 사라졌다. 어느 새 시간은 새벽 세 시를 향하고 있었다. 별 일 아닌데, 했다가는 민호한테 한 대 맞을 것 같아서 기범은 잔뜩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땡-

 


하는 소리,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기범은 볼 것도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었다. 정확히는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그 사람' 의 품으로. 민호는 갑자기 품 안으로 뛰어드는 기범 때문에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야했다. 그러다 다리가 꼬여 뒤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건장한 남자 둘의 무게에 엘리베이터가 한 번 출렁였다. 민호는 인상을 찡그리며 제 품에 얼굴을 파묻은 기범의 어깨를 잡았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다시 닫혔다. 그러나 기범은 아까처럼 무섭거나 하지 않았다.

   

"...김 화상아, 좀 떨어져 봐. 살았나 보게."

   

못말린다는 듯 혀를 가볍게 찬 민호는 기범의 어깨를 잡고 몸을 떨어뜨리려 했다. 그러나 기범은 요지부동, 민호의 품에만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뭔가 낯간지러운 행동에 민망해진 민호는 애꿎은 기범의 금발만 손으로 가볍게 헝클어뜨렸다. 가늘고 결이 좋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가는 대로 흐트러졌다. 민호는 멀쩡한 기범을 보고 내심 안도했다. 목소리도 사정없이 떨리고 무슨 일이길래 저런 건지 걱정이 되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도 상태는 괜찮아 보여서 별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어느 새 땀이 식은 하얀 이마를 민호의 가슴에 기댄 채로 기범이 소근거리듯 말했다.

   

"죄송해요, 일부러 오시게 해서......"

 

"됐어."

 

"됐긴 뭐가요...... 선배 피곤하죠."

 

"알면 됐다는 거다."

 

"치."

 

"이게 어디서 귀여운 척이야, 척은."

   

기범은 눈치 꽝인 민호에게 살짝 눈을 흘기고는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어느 새 기범의 턱을 붙잡은 채 촉촉하고 말랑한 기범의 입술 사이를 혀로 파고 들던 민호를 밀어 낸 건, 기범이었다. 민호는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의 가슴팍을 밀어 낸 기범의 손을 떨쳐냈다. 김기범 이게 아주 조련을 하신다.

   

"뭐."

 

"한 층만 올라가면 집인데...... 나 말이죠, CCTV가 지켜보는 가운데 뽀뽀한 것도 민망한데 여기서 허리까지 들 수는 없잖아요."

   

이 여우같은 게 진짜.


 

 

*

   

"......아...... 선배애..."

 

"다 죽어가네. 그나저나 대체 거울이 뭐 어쨌다는 건...... 김기범, 너 이거......"

 

"선배...... 나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아, 이제 살 것 같아."

 

"살고 죽고는 됐고...... 야, 너 손."

 

"네, 네......?"

   

한참 제 벗은 가슴께에서 머물러 있던 민호의 머리가 들리자 그의 뜨거운 숨결에 정신 못 차리던 기범이 고개를 들었다. 민호의 얼굴이 미묘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기범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민호가 잡아 올린 제 두 손목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자신의 손바닥을 제대로 쳐다 본 기범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이럴수가...... 있나...? 손바닥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심지어 비릿한 철 냄새까지도 났다.

   

"뭐야, 이거. 다쳤냐?"

 

"아니...... 아닌데...? 이게 어디서...... 아!"

   

기범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거울을 보았을 때 피를 흘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믿을 수 없어서 손으로 얼굴을 쓸어보았던 것이 생각이 났다. 분명 그 때는 피가 묻어있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건 대체......?!!


 

 이건 말도 안 돼!!

이 피는 사실이었단 말야?! 영은 이런 실체적인 건 만들지 못한다고!

  


패닉 상태에 빠진 기범의 얼굴을 본 민호가 슬며시 한 쪽 눈썹을 밀어올렸다. 기범은 제 손을 멍하니 보다가 기겁을 해서 침대 밖으로 뛰어나갔다. 민호의 손에 반쯤 벗겨진 셔츠는 지금 문제가 아니었다. 빨리 이 꺼림칙한 것을 씻어내야 했다. 민호는 졸지에 침대 위에서 소박 맞은 새색시가 된 채 기범이 나간 문 쪽을 짜증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건 또 어디서 묻혀 온 거야, 너는 오기만 해 봐 어디."

      

그럼 그 피는...... 뭐였던 걸까?

   

"놓쳤다...... 10층으로... 올라갔네...? 그럼 나는 문 앞에서 기다려야지......"


 

     

문 앞에서 소녀가 기다리면, 먼저 말을 걸어주세요. 친절하게.  

                   

 

 

-


여름이 이대로 가는 게 아까워서 정말 병맛인 납량을... 진짜 가볍게 읽으시면 됩니다.

평소 제가 쓰던 글과는 너무 달라서... 이것 참...ㅋ_ㅋ

납량도 진지돋게 쓰고 싶었는데 저도 코믹을 좋아하는 녀자라... 급선회...

그래서 더 병맛이 된 것 같네영...ㅎㅅㅎ

아 그리고 기범이 코 판 거 아니에영... 그 아가가 거울 속의 기범일 코파게 한거에영...

키보마 지못미...ㅋㅋ

오늘이 벌써 입추래요ㅎㅅㅎ 더위 조심하시고 시원한 여름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