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밤하늘을 나는 나비부인 (上)
* 모든 설정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실제 그것들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 한국경찰과학수사팀(한국 CSI : KPSI) 수사과
제 2지부(경기) 팀장 : 김종현(30)
주 팀원 : 최민호(29) 김기범(27) 이태민(26)
* 국립과학수사연구소(NISI)
검시관 : 법의학자 겸 외과의 이진기(32)
Morality EP.2 밤하늘을 나는 나비부인 (上) written by. Rosetta
"어라. 뭐해요, 선배?"
한국 CSI 제 2지부 사무실의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사무실 직원들이 식사를 위해 외출해서 본래는 아무도 없어야 하는 게 평소와 어울릴 텐데... 오늘은 비어있어야 익숙할 공간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외에, 지금 막 그 공간에 발을 들여놓은 수사과의 김기범.
민호는 책상에 삐딱하게 몸을 기대고 있다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책상 위로 집어던지며. 기범이 뽀르르 민호의 책상 쪽으로 다가왔다. 민호의 행동을 알아챈 건지, 벌써부터 그의 얇은 입술 끝은 부드럽게 말려올라가 있었다.
"이 시간에 뭐예요, 샤이니시대가 코앞에서 미니스커트 입고 춤을 춰도 밥은 꼭 챙겨드실 분이."
"무슨 상관이야, 네가."
"또또, 왜 이렇게 매정해요. 선배가 걔들 좋아하는 거 알아요. 저도 좋아하거든요."
민호는 아예 제 옆의 의자를 빼 걸터앉는 기범을 보고 짜증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책상 위로 집어던진 걸 다시 손에 쥐어 책상 서랍에 쑤셔넣은 민호는 읽고 있던 잡지를 아무렇게나 뒤적였다. 기범은 바람에 날려 조금 헝클어진 자신의 금발을 꼼꼼히 정리하며, 흘긋 민호의 얼굴을 본다. 시선을 내려 민호가 펼친 잡지 면을 빠르게 훑은 기범이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며, 의외라는 목소리로 말을 건다.
"오... 선배가 언제부터 바람이 불어서, 오페라까지 섭렵하신 거예요?"
"...시비 걸지 마. 너랑 대화하면 골이 울려."
"정말 의외라서 물어보는 건데요? 3년 간 지켜 본 선배는 이런 거 볼 사람이 아닌데? 아, 나도 이거 알아요. 푸치니의 '나비부인' 이잖아요. 아아... 문화예술회관에서 공연중이네요."
언제나 민호의 반응은 신경쓰지 않고 자기 할 말은 다 하는 기범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민호는 이젠 그러려니 하고 무시했다.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결정적인 근거는, 제 할 말 다하는 기범의 성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100% 솔직하다는 사실이다. 받아친다고 사려서 말 할 것도 아니기에 일찌감치 무시하는 게 민호는 편했다. 어쨌든 기범은 민호의 발끈함을 피해 엉뚱한 방향으로 화제 돌리기까지 완벽하게 성공했다. 어느 새 민호 옆으로 다가와 잡지의 글에 정신을 팔고 있다.
"평범한 한 소녀가 사랑을 하며 모성의 희생과 사랑을 경험하는, 여성의 감성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라... 흠, 평범한 오르되브르인데요. 소개글 쓴 사람이 누구지?"
민호가 듣거나 말거나 혼자 중얼거리는 기범의 하얀 얼굴을 찡그린 눈으로 내려다 보던 민호는 슬쩍 책상 서랍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까 기범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이닥쳤을 때 숨긴 건, 작년 10월에 기범이 민호에게 만들어 주었던 '부적' 이었다. 가평 성당에서 건네주었던 쌈지 형태의 그것을, 민호는 용케도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범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져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버리지 못했을 뿐. 일할 때의 그 답게, 기범의 손재주는 상당히 섬세했다. 사실 얼마 전 질려서 헤어진 애인이 어떤 여자가 준 거냐며 다그쳤을만큼. 왠지모를 창피함에 저도 모르게 숨겼다. 눈치빠른 기범이 숨긴 것이 무엇인지 못 볼리가 없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민호는 잠깐동안 괜히 숨겼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다시 기범의 옆 얼굴로 향한 시선이 얼마 전에 약하게 베이비펌을 한 금발로 옮겨갔다. 처음 저 머리로 출근한 날, 종현이 이런 건 이태민이나 하는 짓이라며 타박을 좀 하긴 했으나 나중에 괜찮은 것 같다며 말을 마무리지었었다. 사무실 사람들도 귀엽다고 했지만, 민호는 솔직히 지금보다는 찰랑거렸던 스트레이트가 더 김기범답다는 생각을 했다. 신비스럽기도 하고 뭐랄까, 좀 야스럽다고 해야하나... 미쳤구나, 최민호. 민호는 고개를 두어 번 흔들었다. 어쨌든 그랬다. 하지만 최민호 답게 절대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팩스 온 것 같네요. 선배 다리 기니까 선배가 보고 오세요-"
"야, 잡지 그만 봐."
"남자가 치사하게..."
민호는 의자에서 일어나 기범이 보던 잡지 면을 손바닥으로 한 번 눌러주고 종현의 책상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종현의 책상 한 켠에 올려져 있는 팩스기 입에서 쏟아진 종이들을 집어든 민호는 지분을 털며 책상에 기대었다. 종이를 훑어내려가며 책상을 손가락 끝을 따닥따닥 두드리던 소리가 멈추었다. 그의 큰 눈은 느릿하게 굴러 종이에 씌여진 글들을 차분하게 읽어내려가고 있었다. 기범은 여전히 잡지의 글에 시선을 붙박은 채, 소리만 질렀다.
"선배! 종이가 뭐래요?"
그 때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며 점심을 먹으러 나갔던 종현과 일행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뭘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태민의 얼굴이 환한 걸 보니, 고기를 먹었을 것 같다. 종현이 손을 붕붕 흔들며, 정면에 보이는 민호에게 뚱한 얼굴로 말을 건다.
"최민호, 너 뭐 좀 먹었냐? 같이 가자니까 웬일로 안 가고... 어, 김기범이 먹자마자 사라지더니 고작 여기 왔냐? 그리고 야, 이게 돈도 안 내고 튀어? 이걸 확...!"
"김기범."
민호의 낮아진 목소리에 무슨 일이 또 있었나 하는 얼굴로 종현이 입을 다문다. 직원들이 민호와 기범 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제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그들도 좋지는 않은 민호와 기범의 사이를 알기 때문일테다. 태민도 종현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가, 민호를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기범은 잡지를 팔랑거리며, 민호를 가벼운 시선으로 보았다.
"...내 이름 야릇하게 부르지 마요. 나랑 키스하라고 써 있는 건 아닐텐데."
기범의 나른한 말에, 사무실 안에 짧은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가 사라졌다. 민호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닥쳐."
"그니까 뭔데요. 무게 잡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거예요?"
"내가 선견지명처럼 쓸데없이 조잡한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사건이 그 잡지와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으흠... 어떤 식으로요?"
사건이라는 민호의 말에 태민이 꿀꺽 침을 삼키며 자그만 주먹을 쥐었다. 민호는 종현에게 종이 뭉치를 넘겨주고 기범의 옆에 와 섰다. 기범은 민호와 가만히 눈을 맞추었다. 민호의 검은 동공이 그 시선을 피해 잡지로 떨어진다. 기범의 손 아래에 놓여진 잡지를 빼낸 민호는 펼쳐져 있던 잡지의 면을 기범의 눈 앞에 가져가며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이 면이야. 어쨌든 어제 저녁 7시 30분에 경기도 문화예술회관에서 '나비부인' 공연이 있었어. 하지만 9시 10분 경, 2막 2장 공연의 막이 올라갔을 때 관객들의 눈에 보인 건, 새벽에 핑커톤을 기다리며 항구를 바라보는 나비부인의 모습이 아니라 천장에 매달려 와이어로 목이 졸린 핑커톤의 시체였다던데."
민호의 말에 종현이 인상을 구기며 빠르게 종이들을 넘겨갔다. 태민이 긴장한 얼굴로 종현의 옆에서 그것들을 내려다보았다. 기범은 고개를 까닥이며 흠, 하는 소리를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범의 얼굴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그 생기가 흘렀다.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가 의자에 걸려있던 니트를 집어들고, 대강 다 읽은 듯한 종현에게 팀장님, 가는 거죠? 하고 묻는다. 종현의 당연하지, 짐 챙겨. 라는 목소리가 들리자 니트를 걸치고 크로스 백을 둘러맨 기범은 민호에게 웃어보였다.
"멋져요, 선배. '놀라서' 펼친 잡지에 실린 글과 연관된 사건도 선견지명에 해당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랍에 넣은 부적도 챙겨가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역시 다 봤구나... 민호는 미간을 좁히며 가벼운 걸음걸이로 사무실 문 쪽으로 걸어가는, 기범의 잘 빠진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애꿎은 넷북을 가방에 거칠게 쑤셔넣은 민호는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가려다가, 종현의 낄낄거림에 슬그머니 흘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팀장님 어디 두고 보죠.
*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대공연장의 무대 분위기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공연 관계자들과 예술회관 관계자, 출연진 전부는 경찰의 감시 아래 사건 현장에 꼼짝없이 붙들려 CSI와 국과수가 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사건은 어제 오후 9시 10분 경, 국내 HSB 소속 오페라 단원들이 푸치니의 '나비부인' 을 공연하고 있을 때였다. 제 2막 2장의 시작을 알리는 막이 올라갔을 때, 공연장 안에 있던 관객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눈 앞의 광경에 넋을 잃었다. 검붉은 벨벳 커튼 윗 부분에, 핑커톤 역을 맡은 남배우가 힘없이 와이어에 목이 매달려 늘어져 있었다. 그의 복부는 심한 자상으로 너덜너덜했다. 그의 이마에는, 날개에 피가 묻은 흰 나비 한 마리가 얹어져 있었다. 모든 관객들은 비명을 지르며 공연장을 앞다투어 빠져나갔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 공연장은 서둘러 나가려 밀치고 도망치는 사람들로 주차장 밖까지 아비규환이었다.
무대 위에는 대기 중이었다가 그 시체를 본 나비부인 역의 여배우가 기절해 있었고, 조연인 하녀 역의 여배우는 초점이 사라진 동공을 커다랗게 벌린 채,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그 셋이 전부였다. 그 외의 전 출연진은 무대 뒤에서 대기 중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상황과 대기실에 있었던 모든 이들의 증언 등 자세한 정황을 전해들은 종현은 경찰들이 노란 POLICE LINE을 무대 주변에 두르는 것을 확인하고, 연락을 받아 내려 온 진기를 툭툭 쳤다. 진기는 마침 수술용 장갑을 낀 채, 무대 위에 깔아진 비닐 시트에 눕혀져 있는 시체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그런 진기와 종현 옆에는 민호와 기범, 태민도 함께 있었다.
"형은 어떻게 생각해?"
"뭐를?"
"타살일까?"
"자살일지 타살일지는 아직 모르지. 자살로 의심되는 부분도 있고 타살로 의심되는 부분도 있다며..."
종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기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짙은 눈썹을 만지작거리던 종현은 굽힌 무릎을 팔로 감싸며 골똘히 생각했다.
"솔직히 난 타살일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자살일 가능성을 버릴 수가 없는게... 분명 조명 스태프가 조명을 확인하러 막 상단을 보았을 때는 시체가 없었다고 해. 그러니까 2막 1장 후에 확인할 당시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다시 2장의 막이 오르자 시체가 생겼다는 말이지... 와이어는 막의 도르래와 연결되어 있었어. 연결된 채 바닥에 있던 사람이 막이 오르면서 함께 딸려 올라갔단 소리야. 와이어를 도르래에 연결하고, 그걸 제 목에 건다는 건 사람이 자기 혼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
종현의 말에 태민이 덧붙였다.
"그리고 무대가 바뀌는 시간은 매우 짧았어요. 타살이라면 그 짧은 시간동안 성인 남자를 끌고 가 교살하고 자상까지 입힌다는 건 좀 무리가 있을 듯 하네요. 그 남자가 저항을 하지 않을리도 없고... 특별히 약을 먹인다고 하더라도 몸에 약기운이 도는 시간을 계산하면 설득력이 떨어져요. 그럼 흡입형을 사용한 걸까요? 하지만 그렇다 한들, 몸을 옮기기에 쉽지 않았을 텐데..."
종현은 시선을 들어 태민을 보다가, 으흠...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리는 있다. 약물 사용에 대한 건, 약물 검사가 끝나면 확실하게 밝혀지겠지. 그렇게 된다면 타살 쪽으로도 가능성이 생길테고. 우선 자살이라면 본인의 의지로 목을 매달았다는 건데, 그렇게 따지면 태민이 말마따나 시간상으로 설득력이 생겨. 반대로 타살로 생각해볼까. 분명 2막을 시작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나비부인 역의 여배우는 그를 보았다고 해. 그리고 그녀가 무대 뒤로 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부터 약 1분 30초 후, 다시 막이 올랐지. 그 알리바이를 입증할 수 있는 목격자도 있어. 그녀와 지나쳐 들어온 그의 모습을 본 대기실의 사람들이었지. 보는 눈이 많은 상황에서, 그 찰나의 시간에 살인이 이루어지기는 힘들어."
"1장과 2장 사이의 무대 세팅 시간이 총 얼마 정도 되나요?"
"약 2분. 짧다면 짧은 시간이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 일식 가옥 뒤의 배경 세트를 바꿔야 하니까."
태민의 물음에 짧게 답해준 종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무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배우는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가 없었겠지. 무대 뒤, 막의 도르래는 커튼 사이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들어가는 뒷모습은 몰라도 그가 죽는 모습은 여배우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어쨌든 시간과 방법을 따져보았을 때 이렇게 깔끔하게 자살로서 끝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만......그렇게 되면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한 가지 생기지."
민호가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종현의 말을 마무리했다.
"......세상에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자기 배를 스물 일곱 번을 찌르고 목을 매달겠습니까."
"게다가, 자상을 만든 도구는 무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어요. 와이어를 목에 감고 배를 찔렀다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긴 아니지만 한 두번 찔러도 정신이 혼미할 텐데 약 서른 번을 찌를 수 있는 정신이 남아있었을까요. 그 도구를 처리할 시간이 있었는지도 의문이네요."
가만히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던 기범이 민호의 말에 덧붙였다. 가라앉은 기범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기범이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정신이 어떻게 된 상태에서 배를 찔렀다면 뭐, 할 말은 없지만요. 아하하하."
"도르래가 있는 바닥, 무대 의상이 두꺼워 핏방울이 바닥에 튀지 않은 것 같아. 그걸 감안한 거였다면 정말로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철저히 계획된 타살일거야. 사실 개연성으로 보자면 타살이 맞는 듯 보이지."
진기가 시체의 의상을 찢어내고 자상을 살피며 말했다. 동공과, 입술, 혀를 비롯한 구강을 확인한 진기는 장갑에 잔뜩 묻은 피를 대강 털어내었다. 시체의 가발을 조심스레 끌어내린 그는 가발을 검시용 비닐 주머니에 넣었다. 시체의 짧은 스포츠 형 머리를 이곳저곳 살피던 그가 살짝 인상을 쓴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물을 복용하거나, 흡입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아. 그런데... 머리카락이 있는 경계선이 색이 변해 있어. 확실한 극약 중독인데... 뭐야, 머리에 독이라도 발랐나?"
진기의 그 말에 모두의 안색이 변했다. 머리 쪽에 독이 발견되었다면 자살의 가능성이 희박해진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가발 등에 독을 발라두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죽어가는 배우를 끌어 와 자상을 입히고 교살을 했다, 로 잠정적인 가설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팀장님, 아무래도 타살인 것 같은데요."
민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종현을 보았다. 말이 없는 종현 대신, 태민이 놀란 눈으로 탄식했다.
"머리에 독이 발라져 있었다니요, 그럼 정말로 타살이란 말인데...!"
"그렇다면 범인은 공연 관계자들 중에 있을 것 같은데."
"그와 대기실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 장면이 바뀌는 동안 그를 본 사람이 없었나요? 그 부분이 더 이해가 가지 않아요. 타살이든 자살이든, 그가 많은 사람들 시선을 피할 수 있었을만한 시간적 여유가 필요해요. 그래야 막 뒤에서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테니까요."
태민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기범이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크로스 백을 고쳐매며 환하게 말했다.
"이탬, 아까 관계자들 이야길 들어봤는데 말이지... 분명 그 배우 아저씨가 대기실로 들어오는 것까지는 봤다고 하는데, 잠깐 무대 조명이 꺼지면서 암전 상태가 되었대. 그리고 다시 탁, 하고 불이 들어왔을 때 이후로... 그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했어. 그럼 그 사이에 어디론가 휙- 납치라도 당한 게 아니겠어?"
"에에-? 정말요?"
"범인은 그 안에 먼저 숨어있었던 거지. 대기실에 있었던 사람들의 숫자는 그 아저씰 빼면 암전 전과 후가 같았다고 했으니까."
"죽이기 위해 먼저 숨어있었다... 확실한 타살인데요, 그럼."
"그리고, 피해자의 이마에 있었던 피 묻은 나비 말이지. 아무리 봐도 배추흰나비인 것 같은데... 나비는 날개도 더듬이도 모두 정상인 상태로 붙어있었어. 온전한 나비에 피를 묻혀서 놓아둔 것 같은데 그게 뭘 뜻하는 것일까?"
종현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아, 하고 탄성을 냈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네요. 그 나비 지금 어디 있나요?"
"감식반이 가져갔어. 날개에 묻은 피는 아무래도 피해자의 것인 것 같은데, 인위적으로 묻힌 건지 아니면 살인 중에 묻힌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마에 붙어있다시피 한 걸로 봐서 범인이 남긴 듯 해."
"그렇다면 이번 사건과 관계가 깊을 것 같네요. 더불어 이 오페라와도."
기범이 흥미롭다는 어투로 말했다. 종현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다가, 엄지와 중지를 맞부딪혀 딱, 소리를 냈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종현은 단호한 눈으로 또박또박 지시를 내렸다.
"우선 대기실에 있었던 출연자들의 말을 더 들어봐야겠어. 전 출연자가 그 곳에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일부는 다른 곳에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들에게 확실한 알리바이가 존재하는지. 그리고 이 나비도 함께 관련시켜서 생각을 해보자. 살인 패턴은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으니, 진기 형은 가발과 머리카락에 묻어있다는 극약에 대해 조사 좀 해줘. 그 극약의 소지자도 찾아야 하니까."
"알았어. 최대한 빨리 결과 보낼게. 자상도 더 살펴봐야할 것 같다. 흉기가 뭐였는지 알아야 하고."
진기가 간단한 검시를 마치고 시체를 국과수로 옮길 준비를 했다. 같이 왔던 국과수 연구원과 처리반이 시체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종현은 민호와 기범, 태민을 돌아보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나랑 태민이, 팀원들- 그니까, 이강민 씨까지 다섯 명은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만나서 연관된 모든 걸 알아볼테니까, 최민호랑 김기범, 니들은 현지우 씨까지 해서 사건 현장 좀 자세히 조사해. 피해자와 관련된 모든 것들과 현장에 남은 세세한 흔적들도 모두."
종현의 말에 민호의 얼굴이 오만상으로 구겨졌다. 기범은 어느 새 이어폰을 귀에 꽂고 아이팟의 휠을 돌리고만 있었다. 둘의 눈치를 보던 민호와 기범 쪽 팀원들이,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민호는 이제 됐지? 시작합시다- 하고 매정하게 몸을 돌리는 종현의 팔을 쭉 잡아당겼다. 앞으로 발을 내딛다 다시 뒤로 끌려온 종현이 인상을 쓰며 버럭, 짜증 아닌 짜증을 낸다.
"아, 왜-"
"제가 왜 또 김기범이랑 조사를 해야합니까? 저번에도 했잖아요."
"뭐, 가평 성당? 야, 그걸 내가 시켰냐? 알아서 니들 둘이 손붙잡고 갔으면서... 그런 의미로, 이번에도 부탁해-"
"누가 손을 잡아요? 싫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저번엔 그렇다고 해도... 팀장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 있으세요. 다 아시는 분이."
민호가 쉽게 물러서질 않자, 다른 팀원들과 태민을 먼저 보낸 종현은 그에게 바짝 다가서서 단호하게 못박았다.
"니들 사이 안 좋은 건, 전적으로 둘 문제야. 이건 공적인 일이니까 싫어도 해. 이런 일까지 사사로운 감정 이해해 줄 수는 없어. 이번 기회에 좀 친해져 보면 안되냐? 저번 사건 이후로 좀 나아진건가 싶었는데... 무슨 사춘기 소년들이냐, 니들이?"
종현은 민호의 등을 탁, 때려주고 일행을 따라 대기실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버렸다. 가끔씩 종현이 저렇게 진지하게 나오면 싫어도 그 말을 듣게 된다. 차라리 버럭 소리를 지르면 같이 맞받을 수는 있겠는데, 목소리 깔고 저러면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모르지 않기에 민호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불만인 건 변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 자제하고 있던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빼 물며 검붉은 벨벳 커튼 쪽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담배에 불은 붙이지 않았다.
"자자, 우리 팀원들- 유아독존 최민호 선배 신경쓰지말고 조사 하자구요. 오랜만에 리자드 팀장님한테 칭찬 좀 들어야죠."
아하하하, 하고 밝게 웃은 기범은 팀원들을 나누어 구역을 배정해주었다. 민호는 그런 기범의 밝은 태도에 의미 모를 조소를 보내며 막을 거두고 어두운 무대 뒤 쪽으로 발을 딛었다. 무대 뒤 쪽은 의외로 복잡했다. 계단식으로 쳐져 있는 막 때문에 어두우면 길을 잘못 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무대 조명만으로는 잘 보이지 않아서, 보조등과 손전등까지 켜야 했다. 이곳저곳을 비춰 보며 살피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민호는 돌아보지 않았다. 누군지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어우, 여기 왜 이렇게 어두워요? 으으... 공단 냄새...."
"넌 바닥이랑 도르래 쪽 보고 오지, 여긴 왜 기어들어와."
기범이 퉁명스러운 민호의 말에 입을 삐죽이며 손에 들고 있던 손전등을 하릴없이 돌렸다. 민호의 옆을 지나쳐 막 뒤의 벽을 톡톡 두드리며, 기범이 말을 받았다.
"참 나, 선배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거긴 나중에 봐도 되네요. 전 왠지 이 쪽에 더 흥미로운 게 있을 것 같아서 말이죠..."
"흥미로운 거?"
"그래요, 이를테면... 선배의 과거 애인 이력이나 여성 편력 정도?"
"......입 좀 다물어라."
민호는 그러면 그렇지,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기범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막 뒤를 계속 살펴보고 있었다. 하얀 면 장갑을 낀 손이 벽을 여러 번 더듬기도 하고, 두드리기도 했다. 막의 도르래 줄은 무대 천장까지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줄이 쇠로 만들어져서, 성인 남자 한 명 정도를 매달아 끌어올리기에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저 쪽에서 아저씨를 매달아서 이 위까지 끌어올린 모양이네요. 물론 도르래를 끌어올린 건 기계의 힘이겠지만. 어떻게 대기실에 있었던 범인이 아저씨를 다시 여기까지 데려올 수 있었던 걸까요?"
"좀 소설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다면 대기실에서 이 쪽으로 통하는 공간이 있을지도. 마치... 우리 고등학교 무대 시설처럼 말이지."
민호의 말에 기범이 뒤 쪽을 확 돌아다보았다. 그의 짙은 동공은 놀랍다는 느낌을 가득 담고 있었다. 기범의 처음 보는 시선에 좀 머쓱해진 민호는 얕게 헛기침을 하며 기범의 시선을 피했다. 기범은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탄성을 뱉었다.
"오오... 선배 대단한데요? 역시 CSI 최고의 두뇌... 일리있는 생각이에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 뒤에 뭐가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러게요. 선배는 이 쪽을 좀 봐주세요. 전 여기 마저 살필테니까."
기범의 감탄이 진심인지 그냥 하는 말인지 판단하려다가, 곧 기범이 그럴 필요가 없게 만드는 솔직한 사람이라는 걸 떠올린 민호는 갑자기 이상해지는 기분에 미간을 좁혔다. 기범의 말대로 반대쪽 벽을 살피는 민호의 손 끝이 조금 느슨해졌다. 벽을 더듬어가던 민호의 손이 멈추었다. 감촉이 이상했다. 주변 벽은 콘크리트, 그와 조금 떨어진 부분부터는 텅, 소리가 났다. 테두리를 따라 내려가자, 크지 않은 걸쇠가 잡혔다.
"...아무래도, 다른 공간이 있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에, 정말요?"
민호는 걸쇠를 천천히 잡아당겼다. 덜컹, 하고 문이 열리며 어두운 복도 같은 길이 손전등의 희미한 불빛에 드러났다. 폭이 넓지는 않은 복도 옆으로 공연 부자재 같은 것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거의 쓰지 않는 곳인 듯 했다. 민호는 먼지 냄새가 매캐한 복도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기범 역시 뒤를 한 번 돌아다보고 민호의 뒤를 따랐다. 복도는 길지 않았다. 한 30초 조금 넘게 걷자 다른 문이 나왔다.
"어디로 연결된 문이지...?"
"...선배가, 열어봐요."
"......답지않게 어디에 숨어. 떨어져."
민호가 어느 새 자신의 등 뒤에 쏙 숨은 기범을 돌아다보며 냉정하게 내뱉었다. 기범이 칫, 하더니 빼꼼히 몸을 옆으로 뺀다. 민호는 앞에 보이는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은 의외로 소리없이 열렸다. 열린 문 틈으로 두런거림과, 희미한 불빛이 어렴풋이 보였다. 확실히 어딘가로 통하는 문임에 틀림없었다. 문 앞에 드리워진 때가 묻은 발을 젖히자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민호와 기범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이곳에 계셨던 분들을 제외한 나머지 관계자 분들의 알리바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고..."
다름아닌 종현의 목소리였다. 이 의심스러운 복도는 바로 대기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민호와 기범은 동시에 생각했다. 대기실과 연결된 이 복도를 통해 막 뒤에서 살인이 일어났던 것이라고. 새롭게 드러난 사실에 둘은 잠시 각자 생각에 잠겨있다가, 동시에 뒤로 돌아섰다.
"선배도 같은 생각인가요?"
"인정하긴 싫지만... 아마도. 팀장님한테는 사무실로 돌아가서 다시 말씀드려야겠지. 팀장님이 알아낸 진술과 맞는 것이 있는지도 살펴보고."
"그럼... 우린 무대와 도르래 쪽을 마저 조사해요."
*
1차 조사를 끝내고 제 2지부로 돌아온 종현의 팀은 사무실에 둘러앉아 한창 이야기 중이었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아까 전 조사가 진행되고 있었을 때, 놀랄만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앞으로, 한 통의 편지 봉투가 배달되어었었다. 발신자도 수신자도 적혀있지 않은 흰 봉투 안에는, 정필언의 이마에 있었던 나비와 같은 피 묻은 흰 나비가 두 마리 들어있었다. 그 나비들은 암수 하나씩이었으며, 서로의 몸을 겹친 채 붙어있었다.
아마 지금 이런 상황으로 보아 퇴근은 힘들 것처럼 보였다. 진기는 국과수의 일이 바쁜지,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다들 들었겠지? 아까 정필언 씨에게서 발견된 것과 동일한 흰 나비 한 쌍이 배달되었다는 거. 발신자도 수신자도 없었다니, 범인이 직접 놓고 갔을 확률도 있어."
"나비의 종류는 배추흰나비. 말린 나비의 날개에 정필언 씨의 피가 묻어있었고 암수 둘이 붙은 모양으로 있었다네요."
"확실히 그 나비와 이번 사건이 밀접한 관련이 있네요. 어쩌면 살인의 동기가 될 수도 있어요."
"우선, 공연장에서 조사를 끝냈을 때까지 전 출연진과 관계자들 중에서 대기실에 없었고, 알리바이가 불분명한 사람은 마을 사람 역을 맡은 조연 둘과, 나비부인의 하녀 스즈키 역을 맡은 신가람 씨 그리고 나비부인 초초상 역을 맡은 이가예 씨의 매니저 강윤수, 이 넷이었어. 하지만 앞의 조연 둘은 사건 당시 무대 아래에 있었던 것이 방금 확인되어서 용의선상에서 제외. 문제는 나머지 둘이야."
종현이 글이 잔뜩 적힌 수첩을 넘기며 말을 정리했다. 테이크 아웃된 아메리카노를 만지작거리던 태민이 말을 꺼냈다.
"강윤수 씨는 그 시간에 출연자 대기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를 본 사람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어요. 신가람 씨는 분장실에서 분장을 고치고 늦을까봐 대기실 반대편의 무대로 올라와 연기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했구요. 역시 신가람 씨를 본 사람은 없었어요. 둘 중에 누가 더 심증이 가는 것 같으세요?"
"무대 반대편이라고? 그 반대편에도 조사된 것과 같은 다른 통로가 있었어?"
"아, 그렇구나. 민호 선배가 말씀하신 그 다른 통로가 있고 그게 연결된 거라면... 신가람 씨가 그 곳을 통해 옮겨갔을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직 몰라요. 미처 통로 여부를 조사하지 못했거든요... 내일 당장 가서 조사해 볼게요."
"통로가 서로 연결되어있다면... 신가람 씨가 범인일 가능성이 조금 더 짙어지겠군. 아니라면 다시 원점이겠지만."
종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넘기던 수첩을 접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큰 눈이 피곤한듯 느리게 깜박이다가, 기범 쪽으로 굴러갔다. 기범은 점심 때 읽고 있던 민호의 잡지를 다시 보고 있었다. 하여튼, 정말 예측하기도 어렵고 알 수도 없는 녀석이라고 종현은 생각했다. 다들 심각하게 브리핑 중인데 저는 한가롭게 오페라 잡지나 읽고 앉아 있으니. 막 기범에게 한소리 하려던 종현은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그 생각을 접고 말았다.
"네, CSI 제 2지부 수사팀 팀장 김종현입니다."
[어, 종현아. 나야, 진기.]
"아, 형. 어떻게 됬어요?"
종현이 의자에 늘어져 있던 몸을 발딱 일으켜 세우자, 다른 세 명의 시선이 종현에게 쏠린다.
[정필언 씨가 연기할 때 썼던 가발에서 시간을 두고 서서히 독이 퍼지는, 극약 성분이 발견되었어. 아마 그 가발을 쓰고 연기를 하던 중에 독이 퍼져 사망한 것 같다. 같은 성분의 독이 피해자의 머리카락과 두피, 얼굴 경계에서 검출되었고.]
"그럼, 중독되어 죽어가는 사람 배를 칼로 스물 일곱 번을 찌르고, 목까지 매달았단 말야? 완전히 미쳤구만..."
[가평 성당에서 있었던 것 만큼은 아니어도, 꽤 충격적이야. 더군다나 인지도 있는 국내 오페라 배우를 이렇게 살해했으니... 복부의 자상은 칼로 낸 게 맞아. 길이 25cm 정도의 요리용 칼이었어. 두께는 0.2mm 정도로 얇은 편. 그런데... 칼로 새긴 것 처럼 보이는 알파벳 'P' 가 오른쪽 옆구리에서 발견되었어. 이거 혹시... 핑커톤을 의미하는 거라도 되는 걸까?]
진기와 통화를 마친 종현은 자신이 전한 그대로를 팀원들에게 전해주고, 내일 오전부터 다시 조사를 나오라는 말만을 했다. 사건일 때에는 거의 숙소에서 지냈는데, 이번엔 그 예외에 해당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베테랑인 종현이라도 하루에 몇 십 명을 일일히 대화로 상대하려니 많이 피곤했을 것이다. 그리고 종현은 무엇보다도 다른 팀원들이 걱정되었다. 왠지, 내일이 더 혹독한 수사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테다.
팀원들이 각자 퇴근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를 지켜보던 종현은 무언가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용의자가 쉽게 좁혀지는 경우가 있었던가. 왠지 무언가에 속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브리핑 때, 유난히 집중을 안 하는 기범의 태도도 신경쓰였다. 마치 그 대화들이 사건을 잘못 짚고 있다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이. 사실 종현은 김기범이라는 존재를 아직도 잘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기범은 한 없이 샐샐거리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완전히 반대로 돌변한다. 그리고 그가 알지 못하는 기범 만의 신비한 느낌이라던가... 아마 민호 역시 그와 비슷한 걸 느꼈기에 둘이 유난히 상성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치, 기범의 사건에 대한 반응이 나침반 같다고나 할까...
종현은 괜한 생각이라고 단정지으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좀 알 수 없는 녀석이긴 해도, 김기범은 좋은 녀석이란 사실은, 기범이 이 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이제껏 그를 보아 온 종현이 몸으로 알고 있었다.
*
그리고 다음 날, 2차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오전 중에 다시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앞으로 편지가 온 것이다. 첫 번째 편지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고, 종현이 그 안의 내용물을 꺼냈을 때, 역시 나비가 털어져 나왔다. 이번엔 날개 한 쪽이 뜯긴 암컷 나비만이 들어있었고, 나비의 하나 남은 날개와 몸통에는 정필언의 피가 묻혀져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수사팀은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두르다가 중요한 단서를 놓칠 수가 있었기 때문에 현재 두 명으로 좁혀진 용의자 중, 우선 신가람을 의심해 보기로 했다.
무대 반대편에서 민호와 기범이 발견한 것과 같은 통로를 발견한 것이 그 근거였다. 게다가 두 통로는 얇은 판자로 만들어진 문 만을 사이에 둔 채 연결되어 있었다. 만약 대기실에 숨어있다가 죽어가는 정필언을 그 통로를 이용해 끌고 나갔다면, 시간이 없어 반대편 무대로 올라가 연기를 했다는 신가람이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최대한 취조식으로 하지 않으려 했던 종현과 민호는 난감한 상황에 부딪히고 말았다.
"아, 글쎄요!!! 전 정말로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전 그저 막이 올라가기 전에 어떻게든 시간을 맞추려고 반대편 무대로 통하는 길을 이용한 것 뿐이지, 정필언 씨를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제발 믿어주세요!!! 저 좀 살려주세요, 네?!!!"
"...신가람 씨, 그럼 반대편 무대로 가기 전에는 분장실에 계셨다는 게 확실합니까?"
"그래요!!! 전 흘린 땀 때문에 분장이 조금 지워져서, 대기실처럼 반대편 무대와 이어진 분장실에 있다가 급하게 나온 거라니까요?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세요! 텀이 2분 남짓인데, 대기실을 거쳐서 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실 거 아니에요! 당연히 급한대로 저처럼 하셨을 거라고요!"
"하지만 신가람 씨께서 분장실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범인이 잡힐 때까지 신가람 씨의 알리바이는 없는 것이고, 따라서 용의선상에서도 벗어나지 못하십니다. 지금의 진술은 어디까지나 '주관적' 인 말씀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는 말입니다."
신가람은 거의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종현과 민호가 신가람을 마주보고 앉아있는 테이블 주위에는 잔뜩 긴장한 듯 보이는 관계자 전원과 이가예의 매니저 강윤수까지 둘러 서 있었다. 기범은 관객석과 무대를 다시 둘러보러 대기실에는 없었고, 태민은 조사를 위해 팀원들과 분장실에 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연륜과 언변이 있는 종현과, 필요한 대답만 추려 말하도록 질문하는 민호가 신가람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신가람은 살인 사실에 대해서 완강하게 부인했다. 증거도 없어 가슴 터지도록 답답한 본인은 계속 자신은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수사에 진전이 없는 건 당연했다. 이대로 그냥 강윤수로 넘어가야하나, 하는 생각이 종현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태민은 분장실을 꼼꼼히 둘러보고 있었다. 분장실은 꽤 넓은 편이었다. 신가람의 말대로 반대편 대기실과 연결되어있는 간이 통로도 확인하면서 왔다. 구석구석을 다른 팀원들과 함께 조사하며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섯 개의 분장대를 하나씩 살펴보던 태민이 세 번째 화장대 아래에서 반짝이는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엇? 동전이다!"
신나서 허리를 푹 접고 화장대 아래의 구석을 자세히 살펴본 태민의 말간 얼굴이 곧 실망감으로 흐려졌다. 동전인 줄 알았던 것은, 여성용 파운데이션의 뚜껑에 박힌 큐빅이었다. 작은 유리 보울에 들어있어야 할 황색의 분이 뚜껑이 열려있는 바람에 바닥에 쏟아져 있었다. 태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은 더블 파운데이션도 이렇게 막 섞여 나오나...? 왜 허연 게 섞여있지?"
태민의 기억으로는 더블 파운데이션은 다른 색이면 분리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이 파우더형은 황색과 흰색이 섞여있었다. 좀 미심쩍은 얼굴을 하던 태민이 검시용 비닐 주머니에 파운데이션 통을 통째로 담았다. 장갑 낀 손으로 바닥에 있는 것까지 쓸어담지 않도록 위에 쌓인 것만 덜어내 주머니에 넣은 태민은 어이쿠쿠,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없나 기웃거리며 화장대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겨우겨우 신가람의 조사를 마친 종현과 민호는 잔뜩 지친 얼굴로 차에 올라탔다. 결국 내일로 강윤수의 조사가 잠정 결정이 났다. 신가람의 아니라는 대답밖에 얻은 게 없는데다, 태민이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는 바람에 더 조사할 것도 없이 이래저래 일진이 꼬인 듯 했다.
"태민아, 배는 좀 어때? 아직도 많이 아파? 체한 거 아니야?"
"팀장니이이임... 배 아파 죽겠어요오..."
"아이고... 어쩌냐, 얼른 병원가자 우리 태민이."
종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차에 시동을 거는 순간, 뒷좌석에 앉아 태민을 돌보고 있던 민호가 이상한 허전함에 종현을 불렀다.
"팀장님, 뭔가 좀... 허전한 것 같은데요."
"뭐가? 지금 바빠! 태민이 아파 죽으려고 하잖아, 어서 병원 가야지."
민호는 인상을 찡그리며 관자놀이 부근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종현이 왜 그러냐는 듯 재촉하자 민호가 체념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김기범 없어요."
망할, 김기범 죽었어.
민호는 태민이 때문에 먼저 갈테니 둘이 택시타고 오라는 종현의 뒷통수에 몰래 주먹감자를 먹이며, 기범에게 온갖 욕을 다 쏟아붓고있었다. 물론 태민이가 아팠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잘 이해하는 민호였기에, 더더욱 기범에게 향한 욕이 늘어가는 것은 당연했다. 졸지에 가장 껄끄러운 인간 베스트와 택시타고 와야 한다니. 민호는 이를 악물고 대공연장으로 보폭을 크게 해서 걸었다. 대체 어디서 뭘하고 자빠졌어, 이 대책없는 게.
민호는 통로 조명과 무대 조명만 켜진 어두운 대공연장으로 들어왔다. 분명 아까 관객석과 무대를 둘러본다고 했으니, 여기부터 찾아보는 게 빠를 것이다. 여기도 없으면 어딜 간 거지. 뒷좌석부터 빠르게 훑어보던 민호의 시선이, 중앙 좌석 F열에서 멈추었다.
꽤 밝은 편인 무대 조명 덕분에, 좌석에 걸터앉아 대담하게도 다리를 앞좌석 등받이에 걸치고 있는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반짝거리는 노란 머리통이 눈에 확 들어온다. 민호는 버럭 소리라도 지를까 하다가, 그냥 포기하고 기범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도 기범은 눈을 감은 채 뜨지 않고 있었다. 꼭 잠이라도 든 듯한 평온한 얼굴. 민호는 잠깐 기범을 한 대 쳐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민호는 기범이 앉은 의자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범은 정말로 자는 것인지, 고른 숨소리까지 색색 내며 미동이 없었다. 텅 빈 무대를 응시하며, 민호는 등받이에 깊게 몸을 묻었다. 어제 오늘 정신도 몸도 좀 혹사시켰더니, 묵지근한 피곤이 전신을 덮쳐왔다. 어차피 사무실로 돌아가면 다시 일해야 할 텐데, 아예 한숨 자고갈까 생각하고 있는데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서인지, 평소보다 더 허스키한 기범의 목소리가 민호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초초상, 바다 건너 온 남자들은 믿으면 안 돼요... 버림받고 말 거예요..."
"...이제 오페라도 도전할 생각?"
"멋있겠네요, 오페라라..."
순간 미성을 낸 기범이 소름끼치게 여자같다는 생각을 해서, 민호는 한 박자 늦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절대 목소리가 여자같다는 건 아니었다. 단지 기범이 읊은 그 대사에 배어있는 뉘앙스가 나비부인이 아플까봐 걱정하는 하녀 스즈키와 닮아서, 정도. 민호는 흘긋 기범의 옆 얼굴을 보았다. 기범은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말을 하고 있었다.
"민호 선배."
"...여기서 뭐하고 자빠졌어. 팀장님이 너 때문에 나까지 버린 건 알긴 아냐."
"나비부인, 날게 해 주고 싶지 않아요?"
"무슨 헛소리야..."
"평생을 서로 사랑할 줄 알았던 핑커톤이, 나중에는 다른 여자와 초초상을 찾아오잖아요, 잔인하죠. 초초상은 나비처럼 아름답게 날 수 있는 여자였는데... 핑커톤 같은 남자때문에 하늘을 나는 것도 한 때가 되어버린 비운의 여자예요."
"네가 그 여잘 날게 할 수는 있냐."
"못 하죠. 초초상은 절 사랑하는 게 아니니까. 초초상이 다시 날 수 있으려면, 핑커톤 말고 다른 사랑을 찾아야할 것 같네요. 근데 선배는 가능할 것 같아요."
민호는 기범의 얼굴 쪽으로 아예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 잘 하는 건 알고 있지만,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기범은 민호가 저를 쳐다보는 걸 모르는 건지 알고서도 그냥 있는 건지, 눈만 살짝 뜬 채 무대만 바라보고 있었다.
"초초상이 반할 수 있을 정도로 잘생겼잖아요. 아아, 선배는 핑커톤 같은 남자는 되지 않길 바라요. 나비부인이 되어버리는 여자들이 있으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 에 대한 김기범의 하찮은 감상... 이라고 하면 선배 또 화낼거죠? 그래요, 선배. 나 그냥 선배가 질투나게 잘생겨서 좀 놀려본 거예요. 솔직하게 말했으니까 화내면 안돼요."
민호는 그저 헛웃음밖에 나오는 게 없었다. 다시 기범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기범의 얄미운 목소리는 계속 민호의 귀를 괴롭혔다.
"오늘까지 배달된 나비 있죠. 전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려요. 지금까지의 나비 네 마리를 순서대로 늘어놓아보면요... 묘하게 오페라 이야기와 얽혀있는 것 같거든요."
"첫 번째는 온전한 모습에 피가 묻은 수나비. 두 번째는 역시 온전한 모습에 피가 묻은 암나비와 수나비였지. 하지만 세 번째는 날개가 뜯긴 암나비였어. 아마, 첫 번째는 핑커톤인 정필언 씨를 뜻한 것 같고... 두 번째는 핑커톤과 초초상을 뜻한 게 아닐까."
"그럼 세 번째는 핑커톤이 떠나간 초초상이었을까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정필언 씨를 죽인 건 과연 누구였을까요. 아니, 핑커톤을 죽인 건 누구였을까요. 아마 이번 사건에는 멋진 작품이 숨어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왠지 알아요?"
"왜일 것 같은데."
"출연진들로부터 재미있는 이야길 들었어요. 정필언 씨의 예전 애인이 이가예 씨라는..."
민호가 급히 상체를 일으켜 기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적잖이 놀랐는지, 눈이 크게 떠져있다.
"너 설마... 이가예 씨가,"
"성급하게 결론짓지 마요. 이가예 씨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존재하잖아요. 다만... 범인과 정필언 씨, 그리고 이가예 씨가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건데, 선배한테 처음 말하는 거예요."
기범이 진정하라는 듯 한쪽 손을 들어, 민호의 가슴팍을 살며시 눌러내렸다. 민호는 다시 등을 기대며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리고 잠깐 생각을 하는 듯 하다가, 고개만 조금 돌려 기범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넌 왜 그런 이야길 나한테 하는 거지? 같은 팀원이라서?"
"아뇨. 난 선배가 좋아서 그런건데요."
민호는 다시 말을 잃었다. 너무도 순진한 얼굴로 '니가 좋으니까' 식의 발언을 한 기범이 어이가 없었다. 오히려 너무도 담담하게 말을 해서, 민호는 오히려 자신이 창피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저런 이야기를, 아무리 선배로서 좋아한다는 말이지만 표정하나 달라지지 않고 할 수 있는걸까. 김기범 특유의 당당함인걸까. 민호는 한쪽 손을 펴 얼굴을 감쌌다. 무게감 있는 한숨을 쉰 민호는 얼굴에서 손을 떼고 기범을 보았다.
"...아무리 선배로서 좋아하는 거라도, 그런 식으로는 말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선배로서요? 아아- 그렇지. 선배 노멀이었지."
"뭐?"
"난 선배로서 좋아하는 게 아니고요, 최민호를 좋아하는 건데요. 동경이 아니고, 좋.아.한.다.구.요. 그렇다고 곤란해하지는 마요. 숨기기엔 좀 아까워서 털어만 놓는 거니까. 솔직히 선배가 받아주면 그건 더 쇼크일거라구요, 아하하하."
거의 넋이 나간 듯한 민호의 표정이 웃긴지, 생글생글 웃으며 고백을 해 오는 기범의 하얀 얼굴이 장난꾸러기같이 갸웃거린다. 기범은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지 않고 민호의 눈 앞에 두 손을 쫙 펴 흔들었다. 여보세요? 아아, 여보세요오- 선배 충격먹었어요? 아, 선배 귀엽다. 아주 혼자 재잘재잘 잘도 떠든다. 남은 거의 혼이 나갈 지경인데. 민호는 놓았던 너갱이를 다시 붙들었다. 그리고 눈 앞에서 얄밉게 휘젓는 기범의 손목을 잡아내렸다. 은근히 말랐다. 한 손에 두 손목이 다 잡힌다.
"내가 좋아?"
여유있던 기범의 얼굴에 조금 당황한 빛이 스쳤다. 처음보는 기범의 표정 변화에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은 민호는 기범의 손목을 의자 팔걸이에 누른 채 그에게로 상체를 숙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채 허리를 숙인 민호는 기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슬쩍 눈을 내리깔아 시선을 기범의 왼쪽 가슴께로 주었다.
"......이렇게 하면... 여기가 뛰고 그래...?"
"......비켜주세요."
"왜? 너도 이런 거 한 번쯤은 생각해 본 적 있을 거 아냐. 내가 여자에게 하는 것들 같은..."
민호는 머리로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이런 말이 기범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인 것 같았다. 남자를 좋아해본 적이 없기에 자세히는 모르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을 할 수록, 기범의 야스러운 눈이 점점 누그러지는 것 같아서... 매번 진심이든 거짓이든 웃고 있던 눈이 좀, 이제야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제 입을 다물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범의 얼굴이 점차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민호는 위험함을 감지했다. 그래서 숙였던 허리를 펴고 기범에게서 떨어졌다. 생각과는 다르게 말이 차갑게 나갔다.
"......그러니까 너도 나한테 좋아한다느니, 이런 장난 하지마. 막상 들이대면 피할 거면서."
기범은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로 아무 말도 없었다. 평소같으면 샐샐 웃으며 넉살좋게 넘어갈텐데, 그런 반응도 없다. 이런 침묵이 처음인 민호는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해야할 지 몰라 그냥 뒤돌아섰다. 공연장을 서둘러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발짝 걸음을 내딛었을 때, 기범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민호를 잡아끌었다.
"...장난처럼 웃으면서 좋아한다고 하니까 정말로 장난인 줄 아시나 본데요..."
"......김기범."
"난 선배와 달라요. 그런 말, 장난으로 들었다 놓았다 하지 않습니다. 선배는 그게 장난이었겠지만... 적어도 나 만큼은 진심이었어요. 말도 안되는 거 알았어도 진심이었다구요."
"......"
"최민호 선배는, 핑커톤보다 더 나쁜 남자네요."
기범은 민호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을 끝낸 후, 반대쪽으로 방향을 틀어 공연장을 나가버렸다. 붙잡을 수도 없었다. 너무 빨리 나가버려서... 민호는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선 채, 기범이 나간 공연장 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범과 아까 했던 이야기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나는 건... 기범이 자신에게 좋아한다고 진심으로 고백했다는 것, 자신은 그걸 장난으로 넘긴 것... 그리고 기범이 그것에 화가 났다는 것. 그 세 가지만이 머릿속에 떠돌았다. 일 문제든 여자 문제든 언제나 이성적으로 깨끗하게 정리된 최민호의 머릿속을, 처음으로 김기범이 온통 어질러놓고 떠났다.
"아, 씨팔... 살다살다 같은 거 달린 놈한테 고백받기는 또 처음이네... 근데 왜 이렇게 골치가 아프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