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설정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실제 그것들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 한국경찰과학수사팀(한국 CSI : KPSI) 수사과
제 2지부(경기) 팀장 : 김종현(30)
주 팀원 : 최민호(29) 김기범(27) 이태민(26)
* 국립과학수사연구소(NISI)
검시관 : 법의학자 겸 외과의 이진기(32)
[쟤, 귀신 아줌마 자식이래.]
......그만......
[정말로? 와 씨, 완전 재수털린다. 왜 저런 게 우리 town에 살고 난리야, 무섭게?]
[용케도 여기서 살아왔네, 음침하게. 근데 사내새끼가 야하게도 생겼다, 안 그래, Tom?]
그만, 왜...... 나한테 왜 이래......
[아 나, 허여멀겋게 생긴 게 계집애도 아니고...... 벗겨볼까? 있을 건 제대로 있긴 한가?]
그만 둬, 하지 마. ......날 그냥 내버려 둬, 싫어...... 싫어......!
"싫어!!!"
Morality EP.7 추모사(Memorial Address) (上) written by. Rosetta
"...하아, 하......아...... 또야, 제기랄 놈의 꿈......"
맑은 땀방울이 또옥, 떨어져 이미 흥건한 연분홍의 베갯잇 위를 더 적셨다. 입고 있던 박스티의 목과 등은 축축했다. 기범은 벌떡 몸을 일으킨 후로 한동안 고개를 푹 숙인 채 침대에 앉아있었다. 가쁜 숨 때문에 곧고 마른 등이 오르락 내리락 했다. 기범은 파드득, 하고 천 부벼지는 소리가 날 정도로 시트를 움켜쥐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기범은 침대 밖으로 하얀 다리를 내려놓았다. 하얀 두 발이 보들보들한 러그를 디뎠다.
타박, 타박, 주방으로 걸어가 유리컵에 가득 찬물을 채운 기범은 한 숨도 쉬지 않고 컵을 비웠다. 식탁에 컵을 내려놓은 기범은 얇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손톱이 손바닥 살을 눌러내릴 만큼 주먹을 쥐었다 편 그가 다시 침대로 가지 않고 발코니 창에 기대었다. 주르륵, 하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한여름, 새벽의 도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직도..."
물로 축여진 반들거리는 입술이 달싹였다. 오늘따라 밝기만 한 달빛에 뽀얀 얼굴이 더 빛났다. 기범은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내리깔았다. 모아 세운 무릎에 턱을 묻은 그는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일곱 발자국 정도만 가면 콘솔 위의 휴대폰에 닿을 수 있겠으나, 기범은 미미한 움직임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가끔씩 밤이 되면 시달려 왔던, 12년 전의 기억에 기범은 아직도 발이 묶여 있었다. 악몽은 주기적으로도 아니었다. 1년 365일 어느 때도 상관없이 산발적으로 터져 그를 괴롭혔다. 이번이 얼마 만이었지, 마지막으로 같은 꿈을 꾼 지 네 달 되었을까.
언제쯤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요근래 악몽을 꾸는 텀이 길어졌길래, 내심 안도하고 있던 기범이었지만 이렇게 막상 꿈을 꾸면 다시 불안해졌다. 이 어린 날의 기억이 뭐길래 스물 일곱의 김기범까지 옥죄어 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그를 잠식했다. 기범은 고개를 깊이 파묻었다.
"......선배..."
기범의 눈이 콘솔 위의 휴대폰으로 향했다가, 힘없이 떨구어졌다. 그가 보고 싶었다. 잘난 얼굴도, 마음을 누르는 목소리도, 서늘한 손의 감촉도. 하지만 그 뒤에 숨겨진 다정함도. 그라면 정처없이 흔들리는 자신의 정신을 잡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얇게 얼어버린 살얼음처럼 위태로운 불안을 털어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보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그의 오피스텔로 달려가고 싶을만큼.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이런 걸로 그를 성가시게 하긴 싫었다. 게다가 이 악몽의 시작과 내용은 그가 몰라야 하는 것이었고, 기범 자신마저 제 뇌를 잘라내서라도 없애고 싶은 기억이었으니까. 이 악몽을 꾸고 난 후 절대로 다시 잠에 드는 일이 없는 기범은, 평소처럼 현관에 놓인 두 개의 신문 박스에서 가장 위의 것을 하나씩 집어왔다. 거실의 불을 켠 그는 침대 위에 올라앉아 두 부의 신문 -누구라도 알 수 있을만큼 정치색이 다른- 을 펼쳤다. 기범의 눈이 신문으로 떨어지기 전, 자그마한 속삭임이 먼저 떨어졌다.
"......보고 싶어요."
푹푹 찌는 사무실 안, 태양이 작열하는 밖. 어느 쪽이 더 나을까? 아직 오전인데도 사무실 안의 사람들은 축 늘어진 빨래 마냥 책상에 널브러져 있었다. 심지어 책상에 살갗이 닿는 것도 소름끼쳐하는 이들은 이미 만원인 에어컨 앞에서 흐물거렸다. 전기 아깝다며 11시에 에어컨을 튼 종현은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 부채질이나 하고 있었다. 아무리 단비같은 에어컨이라도 켠 즉시 시원해지지는 않았지만, 사무실 사람들은 어찌나 더웠던지 켜자마자 그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종현은 가볍게 혀를 차며 저렇게 약해서야 원, 하며 남이 들으면 발로 한 번 차주고 싶은 소리나 해댔다. 그의 눈이 데구르르 구르다가, 어느 한 곳에 뚝 멈추었다. 눈이 커지고 입까지 떡 벌어진 종현의 얼굴이 심히 웃기긴 했으나, 지금 그에겐 별로 중요한 문제가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미쳤냐, 기범아?"
"미쳤다뇨, 팀장님. 어떻게 소중한 인재에게 그런 말씀을...... 후르륵."
종현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기범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범은 이 가마솥 같은 사무실에서, 에어컨 바람이 제대로 다 들지도 않은 이 답답한 사무실에서 태연하게 컵라면 -당연히 뜨거운- 을 먹고 있었다. 땀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채, 이 푹푹 찌는 7월 중순의 여름에.
종현은 그 기이하다 못해 경악스러운 광경을 보고만 있어도 더워지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옆자리의 민호는 이미 기범이 컵라면을 뜯을 때부터 달관한 얼굴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덥긴 한지, 이따금씩 코발트블루의 반소매 셔츠를 펄럭거리면서.
"잠깐 부활 좀 해 봐요, 다들. 오늘은 경찰청에서 전국 KPSI로 내려 온 중대 발표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해야하니까."
종현은 두 손을 모아 입 가까이 가져다 대어 나팔 모양을 만들고 말했다. 그 목소리에 죽은 듯 쓰러져 있던 사무실 사람들이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들의 눈은 반쯤 풀려있었다. 종현은 손뼉을 두어 번 친 다음 팔짱을 꼈다. 왠지 아까와는 달리 그의 눈이 생기로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종현의 말이 끝난 후, 약 3초 정도 후에 사무실은 괴성과 물건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 찬 난장판이 되었다.
"크흠, 음...... 2지부 수사과와 형사과 팀원들은 오늘부터 7월 31일까지에 한해 3박 4일의 휴가 일정을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현의 말이 끝난 그 다음 날, 이 다섯은 팀장과 주 팀원들, 의사라는 직책과 책임을 고이 땅에 묻었다. 쉽게 말하자면 다른 팀원들이 휴가 날짜를 생각할 때 빛의 속도로 짐을 꾸려 속초로 날랐다는 말이다. 팀원들의 편의를 우선? 그런 건 아오안. 산소같은 휴가, 크롬의 비늘같은 숨막히는 사무실 대신 환상적인 바다의 습격이 기다리고 있거늘 책임? 그게 뭐임?
종현은 알아서 문자로 휴가 날짜 찍어 보내라는 말만 남기고 사무실을 떴다.
"에브리바디 부처해엔-썸!!! 우리 바다가요, 바다!!! 호오- 호!"
"야, 김기범!!! 빨랑 기어들어와, 쪽팔려 진짜!!!"
"으하하하하, 풋쳐 핸즈업!!"
"악, 기범이 선배! 그렇게 창 밖으로 몸 내밀면 안돼요!!"
"......"
창문을 끝까지 내려 아예 상체를 밖으로 뺀 기범이 옆 차선의 차를 보고 두 팔을 휘저으며 소리소리쳤다. 달리는 차에서 그 생진상을 떨고 있었기에 시원한 바람은 원없이 맞을 수 있었을 것이다. 기범의 부드러운 금발이 바람에 마구 휘날렸다. 아마 옆 차선에서 테러 아닌 테러를 당한 운전자는 외국인이니 생각했는지 창문 밖으로 손만 내밀어 흔들어 주었다. 더 참지 못한 종현이 조수석에서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요만큼도 신경쓰지 않는 기범을 보고 진기는 깔깔거리며 같이 외치고 있었다. 이게 어딜 봐서 스물 일곱과 서른 둘이란 말인가.
태민인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결국 둘에 휘말려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니 의외로 골머리 썩는 건 종현이다. 민호는 아까부터 구겨져서 펴지지 않는 인상으로 묵묵히 운전만 하고 있었다. 셔츠 소매를 걷어올린 팔의 마른 근육이 경직되어있는 걸 보니, 무언가를 상당히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전년 휴가 때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휴가가 무산되었던 터라, 이번 휴가는 다섯 명 모두가 유난히
들떠있었다. 외곽순환 고속도로를 지나 속초로 접어드는 서춘(서울춘천)고속도로로 진입했을 때, 속 편하게 푹 퍼져 자고 있던 넷이 한꺼번에 일어나 아우성이니, 혼자 수원부터 운전만 4시간을 하는 민호로써는 굉장히 피곤하다 못해 짜증이 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차마 이 들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어서, 이를 악물고 있던 그는 참다못해 뒷좌석 창문을 올려버렸다.
"악! 선배 나 죽이려고 그래요?!!!"
하마터면 창문 사이에서 허리가 똑 부러질 뻔한 기범이 기겁을 해선 민호를 흘겨보았다. 민호는 백미러로 기범의 눈을 보며 억누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너무 착 가라앉아서, 종현까지 민호의 눈치를 슬쩍 볼 정도였다.
"......불만있으면 내려."
하지만 이런 거에 주눅 들 인간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건 김기범이 아니겠지. 기범은 가볍게 대꾸해주고 흥, 하며 완전히 닫힌 창문을 반 정도 다시 내렸다.
"헐, 나 담배 끊은 거 몰라요? 있는 걸 달라셔야지......"
"......"
민호가 품은 살기와 수습되지 않는 정적을 깬 종현이 아오, 저걸 그냥!!! 하며 분노했을 때, 진기는 깔깔 웃음을 터뜨리며 막 던지지 말라는 말과 함께 기범의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태민은 팍 일그러진 민호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민호의 저런 얼굴을 보는 게 대체 얼마 만이었던가. 역시 저렇게 할 수 있는 재주도 기범만이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속초 해변은 이런 마음까지 단번에 날려주었다. 탁 트인 해변과, 펼쳐진 공간을 사이좋게 나누어 가진 하늘과 바다는 눈이 부실 정도로 새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금방이라도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철썩, 하고 들리는 파도 소리가 청량하기 그지없었다. 일부러 사람이 없는 팬션과 상당히 떨어진 곳으로 왔건만,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태양빛에 데워 진 부드러운 모래가 발을 따끈하게 감쌌다.
갑작스레 정해진 여행이니만큼 급히 잡은 펜션에 짐을 던져놓기만 하고 해변으로 다시 달려나온 다섯은 오랜만의 휴가에 잔뜩 들떠있었다. 오후 3시의 강한 태양빛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진기와 민호가 간단히 챙겨 온 물건들을 정리하는 동안, 종현과 태민, 기범은 벌써 바다 속에 있었다. 대강 정리를 끝내고 크지 않은 아이스 박스에서 물병을 꺼내 든 민호에게, 진기가 하얀 박스티를 팔랑거리며 말을 건넸다.
"으와, 시커먼 남자 다섯이서 오니까 기분 되게 이상하다. 그치?"
"그것 때문에 마지막 밤에 클럽 간다면서요."
"푸핫, 다들 딴 생각하는데 여자가 눈에 들어오겠냐만은...... 그 생각을 접게 해 줄 여자가 있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겠다."
"......네?"
민호는 물병 뚜껑을 따다 말고,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는 진기를 쳐다보았다. 진기는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새파란 바다에서 노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저럴 때는 꼭, 김기범 같다. 속을 알 수 없는 웃는 얼굴과 어디서 튀어나오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 말들도. 갑자기 둘이 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 형!!!"
바닷물에 흠뻑 젖은 기범이 민호와 진기를 향해 마구 두 손을 흔들었다. 저런 모습을 보면 진짜 애가 따로 없다. 사건 조사를 할 때 그렇게 웃으면서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모습도 참 아이러니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이런 무거운 일을 하는 사람이 저렇게 '기쁘다' 외에는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웃음을 지을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저게 매력이라면 매력이겠지.
진기는 기범을 보고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리 오라는 손짓을 하는 기범을 보고 진기가 막 달려가려다가, 민호 쪽을 돌아보았다.
"저런 모습에 반한 거 아니야?"
"......!"
민호는 진기가 환한 얼굴로 던진 질문에 애써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진기가 바닷물로 들어가자마자 그 표정이 무너지고 말았다. 물을 마시지도 못한 채 들고만 있던 민호가 한 쪽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대체, 언제부터......? 종현이 형도, 진기 형도 다 알고 있던 걸까?
병원에서 종현은 기범 때문에 민호가 바뀌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둘의 관계를 예상했던 게 아닐까. 오히려 원래 성격이 직설적인 종현보다 더 직설적으로 말한 진기의 태도에 놀랐다. 평소의 진기는 이런 문제는 언제나 머리가 아플 정도로 돌려말하곤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직구를 던지는 걸까.
민호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물병을 내려놓고 천천히 바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별로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간단히 마무리짓는 것도 김기범의 영향일까 하면서도, 막상 종현과 진기가 둘의 사이를 안다고 해도 별로 신경쓰이지는 않았다. 처음 이런 질문을 들었을 때야 당황했었더라도 말이다.
훤칠한 키에 길게 뻗은 다리가 질투날 정도로 잘났다. 이 해변에 있던 여자들이 한 번쯤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푸른 체크셔츠를 벗어 허리에 묶은 민호는 흰 나시 차림으로 바닷물에 발을 들였다. 습기를 적당히 머금은 바닷바람이 수면 위를 매끄럽게 흘러가며 민호의 갈색 머리카락도 흔들었다. 그 때, 차가운 물방울이 그의 얼굴과 상체로 튀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인상을 찌푸린 민호에게로 밝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아, 최민호 저거 바다에서 X폼 잡고 화보 찍네! 야, 너 잘난 거 아는데, 빨랑 안 오냐!"
"누가 화보를 찍어요, 참 나."
다 죽었어, 속으로 생각한 민호는 이미 바닷물 속으로 집어 넣은 손에 물을 움키고 있었다.
*
그들은 정신없이 물을 튀기며 놀다가, 저녁 6시가 좀 넘어서야 쌀쌀함을 느끼고 펜션으로 돌아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허기를 느끼고 그랬다는 게 더 옳았다. 삼겹살을 구워 먹고 마무리로 라면까지 해치운 다섯은 또 방방 뛰며 -남들이 보았다면 평균 연령 28.8세라는 걸 믿지 못할 정도로- 놀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진기가 숨을 몰아쉬며 으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좋다...... 우리 이렇게 놀러 온 게 대체 얼마 만이야."
"저번에 스키장 가고 안 갔으니 반년은 되었을걸요- "
태민이 진기의 다리를 베고 누운 채 고개만 틀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종현이 바닥에 찰싹 엎드려 있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심심한데 자기 어릴 때 재밌는 얘기 있으면 한 사람씩 하자."
"재미있는 얘기...? 어릴 때?"
"우와, 해요 해!"
종현의 말에 일어난 넷은 유일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그대로인 기범을 보았다. 태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팔을 이마 위로 올리고 있는 기범을 톡톡 건드렸다.
"기범이 선배? 자요? 피곤하신가......"
태민의 부름이 끝나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난 기범이 '짐짓'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까 바다에서 놀 때 아주 중요한 걸 떨어뜨린 것 같아."
"으잉? 그게 뭔데?"
"해변에 아직 있나 찾아보고 올게요! 놀고 계세요- 금방 다녀올테니!"
"네? 지금이 몇 시인데요! 이렇게 어두운데 어떻게 찾는......"
"괜찮아, 괜찮아, 김기범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유니크한 존재라 다 찾을 수 있어."
손을 휘적휘적 흔들며 현관으로 가는 기범의 뒷통수에 대고 종현이 소리쳤다.
"당연히 유니크 해야지, 니가 세상에 더 있으면 신의 저주다! 괜한 일 하지 말고 내일 찾어- 새우잡이 배에 끌려가면 어쩌려고? 우린 너 풀어 줄 돈 없다? 밤바다가 얼마나 위험한데!"
"아우, 잔소리 좀 그만 해요, 팀장님. 그렇게 걱정되시면 30분 후에 데리러 오세요, 아하하하. 팀장님 나 너무 좋아하시네."
"갈까보냐!!!"
종현의 외침을 뒤로 하고 기범은 무엇에 쫓기는 듯한 걸음으로 현관을 나갔다. 민호는 현관문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되돌렸다. 기범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갔지만, 민호는 꺼림칙함을 지울 수 없었다. 저렇게 한순간에 위태해 보이면 괜히 불안해지는 그였다. 민호는 먼저 시작한 진기의 이야기를 반쯤 듣고 반쯤 흘리면서, 찾으러 나가봐야겠다는 생각과 저렇게 나간 기범에 대한 오만가지 생각이 함께 들었다.
또, 무슨 일이지.
기범이 나간 지 반 시간이 되지 않아, 민호는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웬만해선 잘 흔들리지 않는 자신이 기범의 행동 하나하나에 민감해지는 건, 결코 좋은 것 만은 아니었지만 할 수 없었다. 걱정이 되는 걸 민호 자신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으니까.
작게 드는 조급함에 서둘러 현관문을 밀고 나와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나무 문을 통해 펜션 밖으로 나왔다. 민호는 펜션 마당에 서 있는 작은 정원등을 지나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땅으로 시선을 내렸다. 막 발을 딛은 그의 발 밑에, 이상한 것이 줄 지어 기어가고 있었다. 그것들은 펜션 마당을 지나, 뒤 쪽에 또 한 채 있는 다른 펜션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잡은 일정이라 펜션도 해변과 떨어진 곳을 잡았기에, 이들 뒤 쪽으로는 펜션이 단 한 채 밖에 없었다.
개미라고 하기엔 컸고, 이상하리만치 빠른 속도로 기어가고 있었다. 홍수라도 나려나, 왜 이러지 하는 생각을 한 민호는 조금 허리를 숙여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그 정체를 파악한 민호의 미간이 좁혀졌다.
"송장벌레......?"
쏴아아아......
기범은 국방색 나시 위에 미색의 얇은 셔츠만 입고 해변가에 서 있었다. 한순간도 끊임없이 밀려들었다가 부서지는 하얀 파도에만 시선을 꽂은 채 미동이 없었다. 달빛을 받아 파리하게까지 보이는 기범의 얼굴이 물 그림자에 일렁거렸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금빛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고, 뽀얀 얼굴을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언젠가 누군가의 손길처럼.
어릴 적 이야기...... 기범에게는 피하고 싶은 주제라는 걸, 그 외에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입을 연 적이 없었으니까. 어머니가 무속인이라는 것, 날 때부터 고아라는 것은 나중에 알려져도 그냥 가슴에 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봐요-! 저기요!"
"......?"
갑자기 그의 고요를 깬 굵직한 목소리에 기범이 소리가 난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달을 보고 서 있어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기범에게로 뛰어오며 물었다.
"혹시 여기 선글라스 떨어진 거 못 봤어요? 레이벤 보잉인데, 갈색 렌즈...... 어?"
"......!"
그의 얼굴이 보일 정도로 그가 가까이 왔을 때, 기범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기범의 컨버스화가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얇은 입술이 꽉 다물려 미미하게 떨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그 꿈이 이런 일을 당할 예지몽이었다면...... 기범은 여기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김...기범?"
"......안녕."
잠시 굳었던 얼굴을 풀고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어보였다. 어째서 눈 앞의 남자가 10여 년 전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건지, 참으로 지랄맞은 기억력이었지만 기범은 이렇게 만난 걸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가 잘못한 게 없는데, 도망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오히려 잘못한 쪽은 기범이 아니었으니까.
"오랜만이네."
"어? 어. 여행 온 거야? 진짜 오랜만이네...... 뉴욕에서 보고......"
"그래, 여행왔어. 너도?"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얼굴의 기범이 그의 말을 잘랐다. 절대로 그 쪽으로 화제가 빠지는 건 두고 보기 힘들었다. 최대한 그 날의 기억을 상기시키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가 눈치없이 그 일과 관련된 말을 꺼낸다면 당장에 그의 목을 조를지도 몰랐다. 기범의 물음에 그가 좀 굳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대화는 퍽퍽했고, 말에 온통 가시가 돋아나 목구멍에 걸려 움직이질 않았다. 기범은 말을 할 때마다 그 가시가 목구멍을 할퀴는 기분이 들었다.
"응, 어제 친구들이랑...... 잘 지내? 한국은 언제..."
"말하자면 복잡해, 한국으로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왔다가... 다시 이 곳으로 왔거든."
그는 기범의 웃음이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원래 저렇게 웃는 녀석이었나, 하는 의문이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기범은 그걸 보며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 쓰레기만도 못한 새끼. 너도 날 이렇게 만든 것들 중에 하나란 게 역겹고 더러워.
기범은 그의 곁을 지나치며 짧게 말을 흘렸다. 더 이상 이 곳에 1초라도 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짐을 싸 수원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선글라스는 못 봤어. 나 이만 들어가 볼게. 놀다 가, 잘."
"......더 이뻐졌네. '그 때' 보다 더."
그를 지나쳐 세 걸음 정도 떨어졌을 때, 기범은 우뚝 멈춰섰다. 미색 셔츠를 펄럭이는 바닷바람이 왜 그리도 싸늘한 건지. 입술 밖까지 욕이 터져나올 뻔했다. 갑자기 치미는 구역질에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저 얘기만큼은...... 저것만큼은 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 날과 관련된 어떤 말도, 설령 그와 관련이 없다 해도 저런 말은 생각하는 것 조차 소름끼쳤다.
기범은 대꾸하지 않고 다시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어놓았다. 다시 두 걸음 쯤 내딛었을까, 이번에는 손목을 강하게 잡아오는 힘에 휙, 하고 몸이 돌려졌다. 그의 역겨운 얼굴이 코 앞에 들이닥쳤다. 쿡쿡거리는 웃음소리와 미끈한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김기범, 왜 애써 잊으려고 해? 절대 잊을 수가 없을텐데......?"
기범은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지만, 속에서 치미는 어지러운 울분을 꾹꾹 눌러내리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야스러운 눈이 아래로 살짝 처졌다. 그 얼굴을 본 남자는 얼굴이 싸하게 굳었다. 어떻게 나를 저런 얼굴을 하고 볼 수가 있지?
그가 정말로 딱하다는 듯, 기범은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웃었다. 정말로, 너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왜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넌 내 인생에서 네 양심만큼도 비중이 없는데."
"......너 따위가 누굴 무시해...!!!"
남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기범의 얼굴로 주먹을 날리자, 그는 가볍게 몸을 틀어 그 마구잡이의 공격을 피했다. 조금 벌어진 입이 호선을 그렸다.
"네가 먼저 시작하셨어요."
주먹을 내지르느라 한 쪽으로 균형이 쏠리고, 반대편 몸이 비어버린 그의 틈으로 기범의 긴 다리가 가볍게 날아들었다. 옆구리를 걷어 찬 기범이 그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몸을 돌려버렸다. 아랫입술을 씹으며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마구 달렸다.
토할 것 같았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화를 내고 싶었다. 울고 싶었다.
"...왜... 제기랄, 왜......!!!"
인상을 잔뜩 구긴 채 펜션으로 올라가는 길을 빠른 걸음으로 걷는 기범은 짧은 욕을 뱉고 있었다. 해변에 나오지 말 걸, 왜 나왔을까 하는 후회가 더 그를 서럽게 했다. 최악의 기억, 최악의 남자, 최악의 친구. 어째서 12년 전 일을 악몽으로 꾸며 시달리는 자신에게, 왜 그 악몽이 현실로 나타난 것일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자신이 죄를 지은 게 있던가.
이제 돌아가서 자기도 무서웠다. 오히려 더 생생하게 그 악몽이 자신을 지배할 것만 같았다. 오늘도 거실에서 우두커니 잠들지 못할 걸 생각하니 더 화가 났다. 그 새끼가 대체 뭔데 이제 와서 자신을 이렇게 만드는지, 기범은 너무 화가 났다. 이렇게 열 받는 일은 그 사람과 오해가 생겼을 때 이후로 없었다.
"......돌아갈까... 아, 제기랄...!"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기범의 뒤에서, 누군가의 손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기절할 정도로 놀란 기범은 여기까지 쫓아 온 남자에게 본능적으로 주먹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은 허망하게 서늘한 손바닥에 의해 막혔다. 기범의 손을 막은 훤칠한 키의 남자는 손을 풀며 기범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달빛과 가로등에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기범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흘렀다.
"......선배..."
"......왜."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선배는... 설마 나 걱정되서 나온 거예요? 팀장님이 날 열렬히 좋아하시길래 팀장님이 나오실 줄 알았는데, 아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기범이 팬션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민호는 쉽게 놔주지 않았다. 굳이 몸으로 기범을 붙잡지 않더라도, 그는 말로만으로 기범을 가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속일 사람을 속여."
"에......?"
"그런 얼굴로 있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그런 얼굴이라뇨, 선배도 참..."
"누가 거나하게 휘저어 놓은 얼굴인데."
민호는 그렇게 말하고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진 기범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가로등 빛 때문에 더 하얗게 빛나는 민호의 반소매 셔츠가 눈이 부셨다. 민호는 요새 기범과의 대화에서 오래 생각하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막말을 한다는 게 아니라, 기범의 다음 반응이 무엇인지 뻔히 다 아는 상태에서 말을 한다고 느껴진달까. 오히려 기범이 민호의 말에 대답할 말을 생각하고 말하느라 받아치는 게 더뎌졌다. 그런 것 조차도, 가끔씩 분할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자신이 난감할 때.
"아하하, 선배, 그런 거 아니에요."
기범은 절대로 말 못했다.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잤다는 거야 그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그건 성인이 되었을 때 이야기고, 더 먼 이야기를 그가 알 리는 없었다.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 악몽과 관련한, 더 끔찍한 과거의 일을.
기범은 오늘은 오만 일이 다 꼬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필 최민호가 나올 게 뭐란 말인가. 하지만 그대로 다 말할 수는 없었기에,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최대한 아무 말 하지 않고 넘어가고 싶었다. 기범은 웃으며 그의 단단한 팔을 꾹 잡았다.
"오늘 같이 잘래요?"
보통 연인이라면...... 이렇게 대 놓고 노골적인 동침 요구를 한다면 이성이 흐려질 법도 하건만, 민호는 그러지 않았다. 연인이 맞기는 한 걸까 하는 괜한 생각도 들었다. 기범이 잡은 제 팔을 빼낸 민호는 무심하게도 휘적휘적 먼저 오르막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기범은 급 시무룩해진 기분에 짜증까지 났다. 가뜩이나 저기압인데, 이런 마음도 몰라주냐, 진짜......
투덜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 올라가던 기범이 갑자기 민호가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그의 등에 콩, 하고 이마를 찧고 말았다. 원래부터 짜증이 좀 나 있었던 차에, 민호까지 그 열을 더해서 기범은 상당히 예민해져 있었다. 그는 그걸 구실로 크게 투덜거렸다.
"아, 진짜! 갑자기 그렇게 멈추면 어떡해요!!! 눈도 왕왕 크고만 앞도 제대로 못 봐요?! 하여튼 선배는 키만 크고 얼굴만 잘......"
민호는 딱, 하고 기범의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입 좀 다물라는 듯 민호의 긴 손가락이 아주 잠깐 기범의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리 세게 때리진 않았지만, 무방비 상태에서 갑자기 당한 공격에 찌르르한 고통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고 신음소리도 제대로 못 낸 채 고개를 숙인 기범은 눈만 치떠 민호를 노려보았다.
기범이 뭐라 한 소리 하려 입을 열었을 때, 그보다 먼저 민호의 저음이 그의 귓가에 감겨들었다.
"널 휘저은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내게 그닥 기분 좋은 일은 아니야."
*
휴가 2일 째.
태민은 비교적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반쯤 뜬 눈을 이러저리 굴려 주변을 확인했다. 사망자가 있나 없나 하고. 주위를 확인하고 다시 이불 위로 쓰러지려던 태민이 누가 이불에 압정 세례라도 퍼부어 놓기라도 한 듯 다시 벌떡, 튕겨올랐다. 어제 거하게 먹고 놀다가 거실에서 쓰러져 잠들었는데, 이상하게 제 주위에는 둘 뿐이었다. 잠결에 태민이 인형인 줄 알고 끌어안고 잤던,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려 덮고 꿈나라에 있는 진기, 제 옆에서 베개를 발에 베고 요를 덮고 자는 종현.
"잉......? 민호 선배랑 기범이 선배는......? 아차, 어제 기범이 선배 안 들어오셨던 것 같은데......?"
태민은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종현의 말간 얼굴을 바라보았다. 차마 요를 덮고 자는 그를 내버려두고 갈 수가 없어서, 낑낑 그의 몸을 굴려 요 위로 원위치 시키고는 제 이불을 끌어다 그 위에 덮어주었다. 그리고 그의 발 아래 놓인 베개를 가져다 그의 머리를 안아들어 그 위에 놓았다. 세상 모르고 자는 연장자 둘이 왜 이리도 귀여워 보이는지. 진기를 보고는 저렇게 자면 숨 막히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이 한 둘이 아니건만, 자기는 저게 편하다는 진기를 보고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요즘 아가들도 저렇게 자서 많이 큰 일을 당한다고 하던데......
"......형."
태민이 종현의 꾹 감긴 눈을 내려다보며 조그맣게 그를 불렀다. 곤히 잠든 종현의 얼굴이 오랜만의 휴가라 그런지 한층 편안해 보였다. 태민의 목소리는 너무나 작아서, 신경을 바짝 세우고 듣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비겁하게 회피하려고 하는 것도 힘들지만.... 형 힘든 건 더 보기 싫어요...... 나 확실하게 하고 싶어요."
"......"
"우유부단해서 미안해요. ......이제 솔직히 말씀 드릴게요."
태민은 종현의 머리카락을 살짝 만져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호와 기범이 돌아왔다면 방에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태민이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자, 머리 끝까지 덮여 있던 진기의 이불이 스르륵, 내려갔다. 진기는 눈을 감은 채, 복잡함이 섞인 듯한 가벼운 한숨을 입 밖으로 내쉬었다.
"......어떤 결정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진기는 마지막으로 중얼거리고 다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썼다.
"좋은 거라면 행복하고...... 나쁜 거라면, 너무 아프지는 말아줘."
태민은 2층에 두 개 있는 방 중 가장 자신과 가까운 방문 앞에 섰다. 똑똑, 하고 노크를 했는데 아무 대답이 없다. 아직 자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들어오기는 한 걸까? 태민은 걱정이 되어 어쩌나, 하다가 현관의 신발을 보면 되겠다는 생각에 제 머리를 탓하며 몸을 돌렸다. 막 몸을 돌려 2층 계단을 밟으려는 때였다.
"......아, 깜짝이야.....!"
작기는 했지만 분명히 기범의 목소리였다. 아침이라 평소보다 허스키하긴 했지만 은근히 '섹시함' 이 섞인 독특한 목소리는 기범이 분명했다. 태민은 어? 하며 다시 뒤돌아섰다. 아, 오신 건가? 근데 왜...... 누구한테 말하는 거지? 전화하나?
태민은 왠지 이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동하는 호기심에 가만가만 발걸음을 죽이고 노크했던 방이 아닌 더 안 쪽의 방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맙소사, 문이 좀 열려 있었다. 태민은 문 틈으로 살그머니 몸을 붙였다. 그리고 그의 동그란 눈은 신세계를 접하고 말았다.
"아침부터 안기지 마, 시간이 몇 시인데......"
"어차피 어제 내내 노느라 계속 꿈나라일텐데......"
"나이가 들수록 잠은 없어지는 법이지."
"설마, 탈진한 영감 둘이 지금 일어나시겠어요...... 아 졸려..."
"진기 형은 몰라도 종현이 형은 안 돼."
둘 다 아니니 전 괜찮은 건가요? 태민은 너무 놀라서 숨까지 못 쉬고 있었다. 아니, 사무실에서는 그렇게 말도 없고 그러더니...... 지금 제가 본 것을 믿을 수가 없는지,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방 안의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이 어떻고 저떻고가 아니라, 일단 정말 의외의 사람 둘이 저런 사이였다는 것에 대해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태민이 본 장면은 간단했다. 옆으로 보이는 퀸 사이즈 침대에 기범이 누워있고 그 위에 민호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이었으나, 덮치듯 누른 민호와 아무렇지도 않게 손목이 잡혀 눌린 기범을 보니 더했다. 흰 셔츠의 앞섶이 반쯤 풀려나간 민호는 무심한 얼굴로 장난기가 가득한 기범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기범이 민호에게 또 장난치다가 저렇게 된 것 같았다.
"아무리 내가 안기는 게 싫어도 그렇지, 선배 말대로 아침부터 덮치지 마요. 놀랐네......"
"......먼저 시작한 게 누군데."
"그래서, 하겠다구요?"
민호는 기범의 면 티 안으로 손을 넣다가, 갑자기 올라간 옷을 잡아내렸다. 그의 행동에 놀란 건 기범 뿐이 아니었다. 느릿하게 구른 민호의 눈이 정확하게 문 틈 사이의 태민에게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호는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말했다. 여전히 눈은 태민을 보고서.
"......손님이 있어서 곤란하겠는데."
기범의 고개마저 문으로 향하고, 이내 기범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야- 이태민! 들어 와, 임마!"
"서, 선배!!!"
"......예상 외의 사람이 먼저 알았네."
태민이 문을 밀치고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들어와 앉으라는 말에 반색을 한 태민이 아, 아니에요!!! 를 외치며 냅다 도망가버렸다. 바보, 내려가면 볼 텐데 왜 도망쳐? 아우, 순진하기는. 기범은 태민의 얼굴에 내내 끅끅거리는 웃음을 터뜨리느라 침대를 구르고 있었다. 민호는 별말 없이 벌어진 앞을 추스리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버렸고.
*
정작 들킨 당사자 둘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우연히 엄청난 -태민에게는 그랬다, 종현과 진기는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었으므로- 광경을 목격한 태민은 혼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진기가 어디 아프냐고 물어 올 정도로. 간단히 차린 아침 식사를 끝내고 해안 공원을 가기 위해 준비를 했다.
하지만 결코, 이 휴가가 조용히 넘어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네? 실종이요?"
종현 뿐만 아니라, 나머지 넷의 얼굴도 황당한 표정이 역력했다. 아니, 신나서 준비 다 하고 나가려는데, 뜬금없이 찾아 와 사람을 찾아달라니. 이젠 예감을 했는지, 민호는 묵묵히 들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아침부터 들이닥친 사람들은 이 펜션 바로 위의 펜션에서 묵는 사람들이었다. 여자 둘과 남자 하나였는데, 그들은 꽤나 뛰어다녔는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한 여자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덥썩, 제 앞에 있던 태민의 팔을 붙잡았다.
"네! 저희 좀 도와주세요, 경찰을 불렀긴 했는데 기다릴 수가 없어서...... 찾는 것 좀 도와주세요!"
"일단 진정하시구요... 저희가 경찰이긴 한데...... 정확히 어디서 실종된 건가요?"
"정말요? 정말 경찰이세요? 다행이에요! 저, 어제 술이 부족해서, 민재 혼자 사러 나갔는데 오늘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았어요!"
흥분한 듯한 여자가 태민의 팔을 꼭 잡은 채 외치자, 종현이 태민의 반대쪽 팔을 잡아 뒤로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여자가 붙잡은 태민의 팔이 빠져나갔다. 이들이 어떤 상황이고 어떻게 관련된 사람들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접촉했다가 의심스러운 것이라도 묻으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 때 다른 사람들은 뭘 하고 계셨습니까?"
"저희는 모두 술에 취해 있어서...... 민재가 가게로 가는 것만 봤지 돌아오는 걸 못 보고 다들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 보니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어요. 무슨 일을 당한 게 분명해요."
"알겠습니다, 우선 그 민재라는 분...... 술을 많이 드셨습니까?"
"모르겠어요, 그치만 적게 먹진 않았을 거예요, 길에 쓰러진 걸까요?"
"우선 좀 찾아봐야겠습니다. 수사팀을 요청할 테니 일단 그 펜션에 계셨던 분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그 안에서 대기 해 주십시오."
종현은 자신의 친구들의 손에 의해 진정하려고 애쓰는 여자를 보며 말했다.
"일행은 여기 계신 분들이 전부입니까?"
"아뇨, 원래 남자 두 명이 더 있어요. 그런데 그 중 민재는 사라졌고... 민겸이는 주변을 찾아보러 갔어요."
종현의 물음에 여자를 부축한 남자가 대답했다. 전체 일행이 남자 셋에 여자 둘이었다는 소리다. 고개를 끄덕인 종현이 펜션에서 대기 해 달라는 말을 덧붙이고, 일단 그들은 돌아갔다. 휴가 중에 찾아 온 끔찍한 소식 -사건- 에 다섯은 표정이 밝지 않았다. 왠지 기범은 더 했다.
"어휴, 이제 보니 사건이 우릴 따라다니나 보네. 아우--- 이게 뭐야! 모처럼 제대로 휴가 왔나 했더니...... 어쨌든 2지부에 연락하자, 강원은 경기권에 소속되어 있으니... 이번에도 우리 팀원들이 수고 좀 해야겠다. 진기 형이랑, 너희들도."
"아, 드디어 휴가를 즐길 해인가 했는데...... 이래저래 안 도와주네."
"힝, 날을 잘못 잡았나봐요......"
"......민겸..."
푸념을 하고 있는데, 기범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걸 멈추었다. 거의 듣기 힘든 기범의 저음에 넷의 시선이 동시에 기범에게로 쏟아졌다. 그의 악문 이 사이에서 작게 까득, 하는 소리가 났다. 놀란 진기가 기범의 어깨를 잡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범아?"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괜찮아? 왜, 아는 사람이 있었어?"
"아하하하하. 아니에요, 헷갈렸어요. 아는 사람이랑."
기범은 손을 내저으며 평소처럼 웃었다. 다른 사람은 그러려니 넘겼지만, 민호는 어제 혼자 바다에 나갔다가 좋지 않은 얼굴을 하고 온 기범을 떠올리곤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있다, 이번에는. 종현은 연락을 마쳤는지 휴대폰 폴더를 닫고 말했다.
"급한 일이긴 하지만 무턱대고 행동할 수는 없으니...... 일단 속초 해안 지구대에 연락해서 사람을 풀어보고, KPSI와 경찰이 오면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가자. 우린...... 그 펜션에 있던 사람들을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어. 자고로 이런 휴가를 와서 벌어진 사고엔 뭔가 있을 확률이 있으니까."
"우린 대학 동창이에요, 민재도 그렇구요......"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
"음... 그저께요. 오늘이 사흘 째예요."
"그럼 민재 씨는 이틀 째에 사라지셨다는 거죠. 첫 날에는 뭘 하셨습니까?"
"그 날은 오후 3시 쯤 도착해서 해변에 나와있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간식거리와 술을 사러 갔죠."
"그리고 어제 술을 드시고...... 그런 일이 있었던 거군요."
"네......"
종현은 차분하게 질문을 이어 가다가, 거실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나중에 합류한 이민겸이라는 남자는 강민재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어젯밤에 밖으로 나갔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가 나갈 때는 모두가 함께 있었고, 술에 취하지 않아 맨정신인 상태였다. 이민겸이 나가고 난 후 강민재가 나간 건 모두가 보았다고 했다. 그 후 다들 술에 취한 상태에서 강민재가 술을 사온다며 펜션 밖으로 나갔고, 그 길로 사라졌다고 했다.
기범은 가만히 이민겸 쪽을 쏘아보다가 물었다. 평소의 기범처럼 가벼운 목소리가 아니었다. 종현이 갑자기 나온 기범의 질문에 흘긋 그를 쳐다보았지만 말리지 않았다. 기범이 저러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민겸 씨는 다시 들어오셨을 때 강민재 씨가 계시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전 몰랐습니다, 다시 왔을 때에는 친구들이 민겸이는 술을 사러 나갔다고 말해주어서, 그런 줄 알고 저도 걱정하지 않고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많이 취해서 그대로 잠들었죠."
"어제 나가서 뭘 하셨죠."
기범이 그렇게 묻자, 민겸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행동에 기범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의 친구들이 의아하게 그를 쳐다 볼 정도였다. 민겸은 싱긋 웃으며 기범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기범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그건, 기범이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어젯밤에 나랑 같이 있었으면서......"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종현이 기범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다른 사람들도 뜻밖의 말에 놀란 눈치였다. 기범과 이 남자가 아는 사이였다니... 왜 일찍 말하지 않았던 걸까, 하는 의문도 드는 그들이었다.
"김기범, 너 이민겸 씨와 아는 사이야?"
"아하하하, 뭘 그리 심각하게 물어요. 그냥, 친구예요. 아주 오래 된, 그렇지만 만나지는 않은."
"아니 그게 아니라......"
"그래요, 어제 이민겸 씨를 만나서 아주 잠깐 이야길 하고 헤어졌어요. 분명 그 순간까지는 제가 같이 있었다고 증명할 수 있지만, 돌아오는 동안이나 해변으로 오는 동안은 제가 증명할 수 없죠.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면 크게 단서는 되지 않아요."
민호는 가만히 기범과 민겸을 번갈아 보았다. 어제 상태가 그랬던 것도 저 남자 때문이었을 거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종현은 마침 걸려 온 전화를 받아 어떤 이야기를 주고 받더니, 전화를 끊고 입을 열었다.
"이민겸 씨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어제 저녁 8시 30분경 부터 지금까지 이민겸 씨가 갈 수 있는 거리까지를 조사했지만 어떠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게다가 술이 취한 상태에서는 더더욱 갈 수 있는 거리가 멀지 않습니다. 그런 고로, 조금 더 수사에 협조 해 주셔야겠습니다."
"팀장님,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아무 행방을 찾을 수가 없으니...... 실종 신고를 확대해야 하나요?"
"차로 이동했을 경우를 생각 해 봐야지. 그 부분은 경찰에게 맡기고, 우리와 팀원들은 이 주변과 가게까지를 다시 보도록 하자. 이 분들은...... 기범아, 네가 함께 있을래? 이민겸 씨와는 아는 사이고 하니......"
"김기범은 저와 따로 알아 볼 것이 있습니다. 수사과 분들에게 맡기도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팀장님."
"둘이......? 아 뭐,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해."
종현은 의아해 하다가 이내 피식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민호는 자신에게로 향하는 기범의 놀란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기는 국과수로 돌아가려다가, 혹시나 해서 종현의 부탁으로 전반적인 수사가 끝날 때까지만 있기로 했다. 기범은 민호의 뒤를 따라 나가면서 민겸을 싸늘하게 내려다보고 시선을 돌려버렸다.
"선배!"
"......"
뒤따라나온 기범이 언제 심각했냐는 얼굴로 웃으며 민호를 불렀다. 그러나 민호는 별 반응 없이 기범을 바라 볼 뿐이었다. 펜션 뒷 마당으로 향하는 길목에 서 있었다. 이민겸과 같은 자리에 없을 수 있어서 내심 민호가 고마웠던 기범은 한 걸음에 그에게로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웬일로 마주 깍지를 껴 오는 그 때문에 되려 놀란 건 기범이었다.
"선배......?"
"너라면 알 것 같아서 그러는데......"
"뭘요?"
"이거."
민호의 고개가 땅으로 떨어졌다. 그의 시선을 따라 땅으로 시선을 옮긴 기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을 확인한 기범의 고개가 들리더니 민호와 시선을 맞추어 왔다. 민호는 기범의 입이 열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아... 이거...... 송장벌레 아니에요? 이게 왜 이렇게 많지, 여기......?"
"왜 많을 것 같냐."
"죽은 동물의 사체가 있거나... 그걸 유충이 먹고 있거나 하는 이유가 있겠죠. 설마...... 선배 말은 여기 시체라도 묻혀있다는 건 아니죠?"
"그거야."
마치 개미가 죽었어, 하는 것과도 같은 민호의 담담한 대답에 기범은 잠깐 그를 쳐다보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네요, 정말 그럴 수도 있겠어요. 그럼...... 얘들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뒷마당 쪽에 뭔가가 있을 거야."
민호와 기범은 뒷마당으로 더 들어갔다. 펜션의 바닥은 땅에 완전히 붙어 있지 않았다. 지형 상 뒷 부분이 좀 들린 형태로 지어졌기 때문에 아래에 아주 낮은 공간이 있었다. 송장벌레의 목적지는 그 공간이었다. 그 공간이 사람 하나를 눕혀 밀어넣을 수 있을 만한 넓이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둘의 얼굴은 잠깐 굳어졌다. 민호도 어제의 막연한 예측과 이 펜션에 들어오면서 다시 송장벌레의 행렬이 뒷마당으로 이어지는 걸 보고 뭔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예측이 들어맞는 것 같자 좀 놀란 얼굴이었다. 기범은 민호를 보며 작게 웃음을 냈다.
"역시 최민호 선배라니까...... 관찰력은 정말 알아주네요. 어때요, 선배. 밑져야 본전...... 여길 파 보는 게 어때요?"
"...이래서 내가 널 데려온 거다."
"내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선배 말을 믿을 것 같아서요?"
"아니."
"그럼요?"
민호는 기범의 금발에 손가락을 넣어 가볍게 헝클며 담담히 대답했다.
"내가 생각만 해도, 넌 그걸 알고 행동으로까지 옮겨주거든."
민호가 기범의 곁을 지나쳐 먼저 마당을 빠져나갔다. 기범은 가만히 그 자리에 선 채, 여름의 짙은 풀 향기와 섞인 민호의 청량한 멘솔 향이 코 끝에 감도는 것을 느끼며 자그마한 미소를 지었다. 왠지 심각한 사건인데도, 웃음이 나왔다. 모든 것이 투명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즐거움이었다, 그건.
민호와 기범의 뜬금없는 소리에 종현이 뭐? 를 세 번 연발한 후에야 뒷마당을 팔 수 있었다. 갑자기 둘이 나가더니 다시 들이닥쳐 뒷마당을 파라는 소리를 하니, 종현이 황당한 것도 절대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종현은 짧게 요약한 이야기를 듣고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펜션 주인과 인부들의 도움을 받아 뒷마당이 파헤쳐졌다. 그 곳을 들락날락하던 송장벌레들이 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지고, 어떤 녀석들은 삽에 떠진 흙에 파묻혀 다른 곳으로 떨어졌다.
그 곳을 파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부의 목소리가 크게 터졌다.
"뭔가 있어요!!!"
"잠깐만요, 거기서부터는 아주 조심히 파 주세요!"
"알겠습니다!"
인부들이 삽질이 조심스레 바뀌었다. 그리 깊지 않게 묻은 모양인지 부드러운 흙을 마저 떠내자, 안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났다. 그 모습에 옆에서 그걸 지켜보던 종현들과 팀원 몇이 놀라 말을 잃었다. 민호와 기범은 가만히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솔로 얇게 얹혀진 흙을 털어내자, 흙투성이가 된 흰 천으로 덮인 것이 나왔다. 인부들은 들것에 그 물체를 조심스레 옮겨 실었다. 진기가 검시용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레 천을 벗겨냈다.
"......윽...!!!"
"진기 형!"
"아냐아냐, 좀 놀랐을 뿐이야."
진기는 천을 벗겨내다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똑바로 하고 천을 마저 벗겨내자, 훅- 하고 짙은 흙 냄새와 시체 썩는 냄새, 그리고 지독한 국화 향기가 한꺼번에 진기를 덮쳤다. 그 냄새들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강했다. 3분의 1 정도 천을 벗겨 낸 상태에서 드러난 것은, 남자의 시신이었다. 정수리에 아직도 적갈색의 피가 흥건히 말라붙어 있었다. 눈도 감지 못한 채 열려진 두 눈구멍에는 뜯어 낸 국화의 꽃송이가 넣어져 있었고, 이를 치워내자 핏발이 선 안구가 드러났다. 뭉개진 국화 다발이 시신의 가슴 위에 놓여져 있었다. 시신은 숨이 끊어져 몸이 굳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였다. 그러나 여름이라 습한 날씨와 더운 기온, 습기 찬 흙 속에서 초기긴 했으나 이미 부패가 진행되고 있었다. 게다가 갈 만한 모든 방향을 뒤진 후여서 이를 찾은 건 오후 3시 경.
"미, 민재야!!! 강민재!!! 강......"
"수연아, 진정해! 수연아!!!"
"민재야, 네가...... 왜 여기... 대체 누가!!!"
그 남자의 신원이 강민재라는 걸 안 그의 친구들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친구인 한 여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말을 잃었고, 수연이란 여자는 정신을 잃고 친구인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고, 그녀를 부축한 그는 가라앉은 얼굴로 강민재의 흙과 피, 국화꽃으로 범벅이 된 모습을 보고 있었다. 민겸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시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종현은 씁쓸한 얼굴로 강민재를 지켜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기 형은...... 시신 검시 좀 해 주고, 친구분들께선 거실에 계십시오. 어디도 가셔서는 곤란합니다. 그리고 민호, 기범이, 태민인...... 나랑 본 수사에 들어가야겠다. 팀원들은 강민재 씨의 시신이 나온 이 곳에 단서가 없는지 확인 해 주십시오. 그리고 펜션 안과 마당도 수사에 들어가겠습니다."
"어떻게 된 것 같아요, 팀장님......? 분명 범행은 어제 강민재 씨가 사라진 8시 30분부터 길어야 30분 남짓이에요. 이민겸 씨가 자리를 비우고 기범이 선배와 있었던 시간에 맞춘다면 말이죠."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면, 분명 모두가 술에 취하고, 이민겸 씨가 자리를 비운 사이 강민재 씨를 따라나가 살해했겠지. 외부인이었다면 그가 속초로 여행을 올 걸 알고 대기하고 있다가 그가 혼자가 될 때를 기다려 살해했을테고. 안 그래도 범인이 외부인일 걸 대비해서 이 펜션 근처에 이들이 온 날과 같은 날에 있었던 차를 본 목격자가 없는지, 속초로 렌트해 온 차가 없는지 확인하고 있어."
"그 친구들 중 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조사하실 거예요?"
기범이 민호의 담뱃갑을 탁자 위에서 굴리며 물었다. 기범의 시선은 담뱃갑에만 붙박혀 있어서, 얼핏 보면 혼잣말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시선을 들어 종현을 보자, 종현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너 누굴 머리에 두고 있냐, 김기범. 네 예감이 지독하게 잘 맞아서 벌써부터 무섭다."
"아직 아무것도 확증된 건 없어요, 팀장님. 그저 그들 안에 범인이 있다면 어떻게 조사를 하실 거냐는 말을 물었을 뿐인걸요, 아하하하하."
"......이민겸 씨랑 무슨 사이야, 너."
"......누구요?"
종현의 말에 기범의 눈이 치켜올라갔다. 기범의 그런 반응이 처음이었던지라, 그냥 물어 봤던 종현마저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담뱃갑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일 정도였다.
"너 설마......"
"......솔직히 친구라고는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에요. 우연치 않게 건너건너 알았을 뿐이고...... 이번 사건과 저, 이민겸 씨와는 아무 상관 없어요, 팀장님. 용의자들과 연관되면 골치 아파진다는 거, 팀장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기범아......"
"......"
민호는 기범의 하얀 손에서 구겨지는 자신의 딱한 담뱃갑을 거두어갔다. 구겨진 담뱃갑에서 담배를 빼 문 그는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깊숙히 연기를 빨아들인 민호는 펜션 아래로 보이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
휴가 3일 째.
"이게 누구야...... 시원하게 한 대 차고도 모자라, 볼 일이 또 남았어?"
"착각하지 마, 지금은 경찰로서 온 거니까."
기범의 얇은 입술이 비스듬히 말려올라갔다. 그 웃음에서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낀 민겸이 한 쪽 눈썹을 구겼다. 민겸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친구의 죽음에 꽤 충격을 받았는지, 볼이 핼쓱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모양이었다. 펜션 마당의 벤치에 걸터 앉은 민겸의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기범이 나른하게 입을 떼었다.
"강민재 씨와 이수연 씨, 둘이 뭔가 있는 사이였던 것 같은데...... 단순한 친구였어?"
"언제 또 봤대...... 있었지, 뭔가가."
"......?"
"하지만 둘은 단순히 친구야. 중간에 작은 문제가 있었긴 했지만, 어쨌든."
"어떤 문제인데...?"
"별 건 아니었어. 그런데 그건 왜?"
"아... 일말의 가능성을 만들어 두는 거야, 언제 어디서 실마리가 잡힐 지 모르거든......"
기범은 말꼬리를 흐리며 민겸을 흘긋 쳐다보았다. 의미심장한 기범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민겸이 조금 격앙된 목소리를 냈다.
"그건 무슨 뜻이야? 지금 날 의심하기라도 하는 거야?"
"흥분하지 마, 그러면 꼭 네가 '범인이에요' 하는 것처럼 들려."
"김기범......!"
"굳이 그렇게 불러주지 않아도 내 이름 안 잊어버리니까 걱정 마. 예전에는 귀신집 자식이라고 부르더니, 왜 갑자기 이름을 부를 생각이 들었어?"
기범은 미소 띤 얼굴로 이른 오후의 햇살을 받아 더 희게 빛나는 자신의 피부를 내려다보았다.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차분하게 말을 잇는 그의 모습이 민겸은 불쾌하다 못해 소름끼치기까지 했다. 기범은 그런 민겸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자기 할 말을 계속 하고 있었다.
"그 문제가 뭐였는데?"
"그런 걸 내가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어?"
민겸은 처음의 고분고분하던 태도와는 달리 기범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 기범 특유의 나른함이 그의 약을 올린 것 같았다. 그런 그를 가만히 내려다 본 기범은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대답을 거부하면 수사 집행 방해죄가 추가되는 경우가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네가 범인이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어리석은 행동이 될 수도 있지. 어릴 때와 변함없이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모양인데, 지금 내 앞의 네 처지에 대해서 조금의 생각이라도 하고 허세를 부리지 않겠니?"
"이 새꺄, 막말하지마! 이게 경찰 나부랭이 좀 한다고 진짜, 사람을 뭘로 보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내 알 바 아니야."
"하, 그런 식으로 해 봐, 어디! 나도 빈 손은 아니야, 네 과거도 알고 있는데 말야...... 곤란하지 않겠어?"
기범은 민겸의 비틀려 올라간 입꼬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해 봐, 어디. 이제 두려울 것도 없는데 뭐."
당당한 기범의 말에 오히려 할 말을 잃은 건 민겸 쪽이었다.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기범은 그것이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지나치게 냉정했고 지나치게 당당했다. 민겸은 제 눈 앞의 김기범이 그 12년 전의 항상 움츠려 있었고 연약했던, 이쁘장하게 생긴 남자아이가 맞는지 의심했다. 기범은 황당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민겸을 흘긋 보며 혀를 찼다.
"어떻게 날 똑바로 보고 얘기를 할 용기가 남아 있는 걸까...... 참 너란 앤, 아하하하."
기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민겸의 친구들이 있을 펜션으로 들어가버렸다. 어차피 그의 입에서 정확한 이야기를 들을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이미 강민재와 이수연을 의심하기 시작한 처음부터 그의 친구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을 계획이었다. 그저, 저 뻔뻔한 낯을 보고 있으려니 잠잠했던 속이 꼬이는 기분이어서 건드려 본 것일 뿐.
기범은 들어가자마자 그들에게 한 명씩, 잠시의 대화를 부탁했다. 무언가가 있다, 그의 감이 말해주고 있는 것은 그것 뿐이었다. 다른 둘은 사실 이렇다 할 이야기가 없었다. 둘 다 취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고, 기억난다 하더라도 단편적인 것과 그리 사건과 관련이 없었다. 가장 나중에 대화를 한 것은 이수연이었다. 그녀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강민재의 충격적인 죽음에 적응하는 것이 상당히 더딘 상태였다.
"좀 괜찮으세요?"
"......네에."
"많이 놀라셨겠어요, 충격이기도 하실 테고. 그런 분에게 이런 양해를 구하게 되어 유감입니다. 하지만 강민재 씨를 위해서라도 범인을 빨리 찾아야겠죠. 그러니...... 지금부터 제 말에 상세히 답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기범은 턱을 괴었던 손을 내리고 차분하게 수연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다가, 기범의 눈을 보고는 마음을 다잡은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곧 그녀의 입이 열렸다.
"네, 알겠습니다."
기범은 옅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편안한 얼굴이었다. 불안에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수연은 한다는 질문을 하지 않고 자기만 바라보고 있는 기범이 이상했던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기범의 눈은 편안하다 못해 지독하게 고요했다.
수연은 그 다갈색 동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물에 가라앉은 침전물처럼 가슴이 묵직해졌다. 일렁거리던 온갖 감정이 잠시 잠든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저 눈을 보고만 있었는데도 말이다.
"좀, 괜찮아지셨나요?"
"아, 네...... 문제 없어요."
"강민재 씨와는 친구 사이라고 들었는데...... 혹시 그 외의 사실 말고도 말씀해 주실 수 있는 것이 있나요?"
기범의 단도직입이라면 그럴 수도 있는 질문에, 수연의 안색이 변했다. 제대로 찌른 모양이었다.
"다, 다른 사실이요......? 어떤......?"
"이수연 씨, 이미 강민재 씨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게다가 누군가의 손에 죽임을 당한 억울한 사람이구요. 괜찮으시다면 친구를 위해서라도 절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절대 황색 르뽀들처럼 그걸 이슈화 하지는 않으니 염려 마세요. off-the-record와 같은 방식이죠. 지금부터 말씀하시는 모든 것들은 저와 수연 씨 둘 밖에 듣지 못하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수사하는 저희 다섯과, 수연 씨 친구분들 이외는 모릅니다."
기범은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여유있게 설명까지 덧붙였다. 그러나 수연은 아직까지도 망설이고 있었다. 무언가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기라도 한 듯. 기범은 그녀가 준비가 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다소 오래 걸리더라도, 그녀의 말에서 무언가 발견할 것이 있을 것이란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기범은 사실 이민겸과 이수연을 제외한 다른 둘의 이야기보다도 이 여자의 이야기가 가장 결정적이라 판단했다.
"강민재 씨의 시신을 보셨을 겁니다. 범인은 단순히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판단됩니다. 치밀하게 계획된...... 그것이라는 말이죠. 시신 위에 범인이 놓았을 것이 분명한 국화와 눈에 있었던 꽃송이가 그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수연 씨, 그 이유를 알고 범인을 잡은 뒤에 강민재 씨를 편하게 보내드리는 게 어떨까요."
"......민재는, 제 가장 친한 친구였어요."
"......네."
수연은 차마 기범의 눈을 보지는 못했다. 앞에 놓여진 커피가 든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이야기를 풀어갔다.
"2년 전 쯤이었을 거예요. 민재가 사랑하던 애가 있었어요. 둘은 아주 깊이 사귀었고,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였어요. 그런데...... 그 애가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어요."
"......유감이네요."
"아, 아니에요...... 어쨌든 그 애가 그렇게 떠난 후 민재는 많이 방황을 했죠, 정말로 사랑하던 사람이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버린 걸, 인정을 하질 못했어요. 거의 1년 반을 그렇게 힘들어 했어요. 가장 친했던 저는 민재 곁을 떠날 수가 없었어요, 눈을 떼었다간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았으니까요. 민재도 제게 의지를 많이 했죠, 하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민재는 불안해했고, 그 아이처럼 저도 사라지면 어쩌나 하는, 일종의 과대 망상과 비슷한 것도 앓았어요.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제게 집착하는 면도 조금 보였어요. 물론 우리는 그런 민재를 이해했죠."
"실례지만... 수연 씨는 민재 씨에게 이성으로서의 마음은 들지 않았던 거죠."
"그래요, 전 그저 친구로서 민재를 좋아했어요. 민재도 마찬가지였구요. 어쨌든... 저와 민겸이, 정아 그리고 수혁이는 겨우겨우 마음을 조금 추스른 민재를 데리고 이 곳으로 여행을 왔어요."
수연은 식어버린 종이컵을 손에서 놓지를 못했다. 기범은 그렇다고 더 물을 부어주지도, 커피를 더 넣어주지도 않았다. 그녀의 마음이 흘러가는 걸 깨면 난감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둘째 날 저녁(제 2지부 휴가 1일 째), 그러니까 민재가 죽은 날이에요. 저녁을 먹고 친구들과 술을 마셨어요. 민재는 마음이 좀 진정되고 오랜만에 바다에 놀러와서인지 내내 즐거워 보였어요. 하지만, 술이 문제였어요, 민재가 기분에 취해서 좀 많이 마셨나 봐요, 워낙 겉으로 티를 잘 안 내는 애라 저희는 몰랐죠, 게다가 다들 몇 잔씩 마신 터였고......"
"......"
"민재가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제게 좀, 그러니까...... 취중에 키스를 했어요...... 아, 그러니까 그게..."
"괜찮습니다. 천천히 말씀하세요."
"네에...... 당연히 저는 놀라서 그 애를 밀어냈죠. 다른 친구들도 돌발행동에 좀 놀란 눈치였어요. 이제껏 보호 의식이 좀 강하긴 했어도 요새 들어 그런 게 덜했고, 평소의 민재와 거의 가까워진 상태였으니까요. 하지만 술이 들어가니 감정이 자극되었었나봐요. 그런 행동을 한 걸 보면...... 어쨌든 그런 당황스러운 일이 있고 난 후, 술을 사오겠다며 밖으로 나갔어요. 분명 본인도 뭘 했는지 모르는 걸로 보아 술에 취한 게 분명했지만, 걱정은 되었어도 차마 따라나갈 수가 없었어요."
수연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기범은 말없이 옆에 놓인 티슈 상자에서 티슈 몇 장을 뽑아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수연은 무거워진 눈물 한 방울을 똑, 떨어뜨리고 급히 티슈를 말아 눈가에 대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그녀가 이제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따라 나갔었더라면...... 민재가 그렇게 되는 일은 없었어요, 제가......!!! 같이 가지 않아서... 그 애 옆에 있지 않아서 민재가 죽은 거예요...... 제가 나빴어요, 술에 취해 한 행동 때문에 그게 무서워서...!"
"자책하지 마세요, 수연 씨 잘못은 하나도 없습니다. 수연 씨가 범인이 아닌 이상은 말이죠."
"전 정말, 민재를 다시 볼 수 없을 거예요! 분명히 취중에 그 애 생각이 나서 제게 그랬던 걸 거예요. 제가 친한 친구였으니까, 가장 오래 된 친구였으니까...... 그런데 저는...... 7년 우정을 그런 식으로 배신했어요......"
"수연 씨가 잘못한 게 아니에요,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이었고, 당황하신 건 당연한 겁니다. 그리고 모든 일의 시초는 범인의 손에 있어요. 수연 씨는 그 범인을 똑바로 보셔야 합니다. 가장 소중했던 친구를 죽인 그를 생각하지 않으시고 수연 씨 자신을 자책하시면 곤란해요. 민재 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 거라고 믿어요."
"꼭 찾아주세요, 민재를 죽인 사람...... 대체 왜 죽였는지, 왜 이런 건지...!"
( 계속)
EP.8 발푸르기스의 밤 (上) (0) | 2010.1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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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 추모사(Memorial Address) (下) (0) | 2010.10.17 |
EP.6 마음이 부서진 인형의 노래 (下) (0) | 2010.10.17 |
EP.6 마음이 부서진 인형의 노래 (上) (0) | 2010.10.17 |
EP.5 비틀린 우정 (0) | 2010.1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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