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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 발푸르기스의 밤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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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etta. 2010. 10. 17.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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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설정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실제 그것들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 한국경찰과학수사팀(한국 CSI : KPSI) 수사과

  제 2지부(경기) 팀장 : 김종현(30)
  주 팀원 : 최민호(29) 김기범(27) 이태민(26)
 

* 국립과학수사연구소(NISI)

  검시관 : 법의학자 겸 외과의 이진기(32)






Morality EP.8 발푸르기스의 밤 (上) written by. Rosetta





[......벌써 두 번째 일어난 살인 사건에 경찰은 연쇄 살인으로 수사 방향을 전환했으며, 이번에 발견된 20대 여성의 시신은 4월 3일에 발견된 윤모 양과 마찬가지로 얼굴이 훼손된 채......]



"훼손이라...... 지껄이기 좋아하는 언론도 '얼굴 가죽이 벗겨졌다' 고는 말 못하는 모양이지?"


"가쉽도 잠잠해요, 평소같았으면 여기까지 쳐들어왔을텐데......"


"경찰은 내내 뭘 하다가 이제서야 우리 쪽에,"



종현은 평소 사건이 일어났을 때 보다 더 구겨진 인상을 펼 줄을 몰랐다. 제 2지부의 사무실 역시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했다. 언제나 느슨하던 기범 역시 지금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막 뉴스가 흘러나오는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었다. 종현이 머리를 마구 긁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2주일 전인 4월 3일. 서울 동작구에서 20대 여성의 시신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여자는 자신의 집과 약 500m 떨어진 골목에서 살해되었으며, 발견 당시 그녀의 얼굴은 살가죽이 한꺼풀 벗겨져 붉은 근육이 비치고 있었다. 요리용 칼로 깨끗하게 베여 나간 목 부근에서 시뻘건 피가 쿨럭거리며 쏟아져 나온 모양인지, 어두운 골목 바닥은 빨간 페인트라도 쏟은 듯 난장판이었다. 이상한 것은, 머리 부분의 심한 손상을 제외하고 그녀의 몸 어디에도 상처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 사건에 거의 전부의 서울 경찰이 수사에 뛰어들었으나, 그녀의 신분증을 비롯한 소지품으로 신원과 사망 시간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수사 결과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무슨 고집인지 이런 엽기적인 사건에도 서울 경찰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의 도움만을 받았을 뿐, KPSI에 수사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번, 4월 17일에 다시 서울 관악구에서 이와 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나자, 부랴부랴 연쇄 살인으로 수사 방향을 전환하고 KPSI 서울과 경기 지부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하여튼 그 윗분들이 문제있다니까, 아주 그냥 혼자 다 드시려고......"


"김기범아, 쉿."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팀장님."


"밥줄 끊기고 싶냐? 난 인재 하나 잃는 거 못 본다."


"아, 그래도......"



종현이 입술에 검지를 펴 가져다 대며 눈을 살짝 찡그렸다. 기범은 뭔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얇은 입술을 쭉 내밀고 있었지만, 그 다음에 나온 종현이 작게 소근거린 말에 그 입을 다시 들여보내고 말았다.



"최민호랑 사내 커플 그만두고 싶으면 그렇게 하던지."


"헐...... 팀장님, 사랑해요. 절 인재로 인정해 주시고 계셨군요."



어떤 단어에 반응을 보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민호의 숙이고 있던 고개가 슬쩍 들렸다가 기범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시선이 책상으로 내리꽂아졌다. 민호는 다물린 입술 사이에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꾹 문 채 사건 현장에서 찍어 온 사진들과 자료를 보고 있었다. 기범이 아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곤 민호의 뒤로 가 고개만 빠꼼히 그의 어깨 너머로 내밀었다.



"어때요?"


"...모르겠는데."


"모르겠다구요?"



뜻밖의 민호의 대답에 기범이 반색을 했다. 오늘이 두 번째 사건이 터진 지 이틀 째였다. 대강 전반적인 것이라도 대답할 줄 알았던 민호가 덤덤한 얼굴로 모르겠다는 말을 내 놓았기 때문이었다. 기범은 충북에 내려갔다가 어제 온 터라 아직 자세히 자료를 보지 않고 텔레비전과 신문만 보았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지 못했다. 민호는 지포 라이터를 켜 담배 끝에 불을 붙이더니 제 책상에 있던 종이 꾸러미들을 기범 앞으로 밀었다.



"이상해, 꼭 묻지마 살인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살해당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것도 연관된 부분이 없어. 사는 곳이 서울이고, 여자인 것 외에는 전혀 눈에 띄는 것이 없어. 너 이거 가져가서 좀 보고 와 봐."


"선배가 모르는데 제가 어떻게 알...... 어디 가요?"


"국과수."



민호는 차키를 집어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종현에게 말을 해둔 것인지, 종현은 별다른 말 없이 태민이 가져다 준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범이 갑자기 국과수에 간다는 민호의 말에 그를 휙 쳐다보았다.



"직접 가야하는 거예요?"


"전화나 서면으로는 설명하기가 곤란하시다던데."


"치, 진기 형 너무하다. 내가 가는 건 싫은가 봐요."



짐짓 토라진 얼굴을 한 기범을 보며 민호는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물론 기범이 농으로 한 소리란 것을 민호가 모를 리 없었는데도.



"먼 거리 올라오신 누구 피곤하실까봐 그러셨다."



기범은 말갛게 웃으며 자료를 모아쥐고 민호에게서 돌아섰다. 역시 장난이었는지 싱글싱글 웃는 모습이 밉지 않았다. 그러나 기범이 본의 아니게 종현의 성질을 건드리게 되는 그의 해맑음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었다. 기범은 돌아섰다가, 다시 민호를 보며 몇 마디 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하하하, 아- 저도 진기 형 마음 알아요. 마음 부들부들한 진기 형과 달리 ......오자마자 숙제나 내 주는 선배 미워서 그런 건데."


"......"



민호는 또 기범에게 놀림 당한 걸 알자 조용히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저 버릇을 어떻게 고치지.

 

 

 


기범은 약 반 시간 동안을 책상 앞에 붙어서 민호가 넘겨 준 자료만 보고 있었다. 마지막 사진인 윤강희와 이현경의 떨어진 핸드백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기범이 눈두덩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사진을 내려놓았다. 사실 민호가 보고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면 기범도 결과가 비슷할 것이라는 건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기범은 자신의 단정한 금발을 헝클어뜨리며 다시 고민에 잠기기 시작했다.



"다른 장소, 다른 시간, 다른 핸드백 속의 물건, 다른 사람...... 대체 연관된 게 뭐지? 정말 묻지마 살인이라도 되는 건가......?"



아무리 세상에 싸이코 패스같은 사람들이 있다고는 하나, 실제로 묻지마 살인 따위의 일이라면 골치가 아파지는 건 이 쪽이다. 일정한 패턴도 뭣도 없이 비우발적으로 터지는 사건을 미리 알고 막기에는 솔직히 버거웠다. 게다가 살인 형태가 같아 보이는 연쇄적인 살인이기에 이대로 두 손 놓고 있는다면 앞으로의 피해자 수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기범이 선배."


"이 싸이코 같은 자식이......"


"네?! 서, 선배 왜 그러세요?!"



하도 답답한 마음에 중얼거렸던 말을, 하필 태민이 왔을 때 한 모양이었다. 멀쩡히 있다가 싸이코 소리를 얻어들었으니 태민으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울상이 되어버린 태민을 본 기범이 아, 하는 낮은 탄식을 냈다. 자기도 멋모르게 뱉은 말이라 잠시 상황 파악을 한 기범은 안 그래도 흰 얼굴이 아예 질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헐! 태, 탬...... 아니야! 너한테 한 소리가 아니라......"


"기범이 선배 너무해요...... 속으로 내내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엄마한테 이를거야."


"아, 탬! 아니라니까- 응? 누군지도 모르는 범인때문에 정신을 놓......"


"기범아, 태민아!"



종현이 기범의 억울함이 가득한 설명을 끊고 그와 태민에게로 걸어왔다. 조금 올라간 목소리의 종현이 설명도 않고 기범과 태민 앞에 황갈색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그걸 받아든 기범이 종현의 얼굴을 한 번 살피더니 아무것도 묻지 않고 봉투를 열었다.



"국과수에서 부검 시에 찍은 사진과 검시한 카르테야. 확인해 봐. 사망자 둘에게 소소한 것이지만 공통점이 있었어."


"공통점이요? 그럼 패턴 같은 게 나올 수도 있을까요?"



태민이 장난치느라 지었던 짖궂은 얼굴을 싹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종현에게 물었다. 종현이 작게 고개를 젓고 입을 열었다.



"확실하지는 않아. 일단 그 공통점이라는 게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그것이 꼭 패턴과 연결된다는 보장은 없거든."


"......Plastic Surgery...... 성형수술이 둘의 공통점이라는 건가요?"


"윤강희 씨는 코, 이현경 씨는 광대뼈를 수술했어. 얼굴을 성형한 것도 같다면 같겠지. 아직 부검과 관련한 자료가 다 넘어오지 않았어. 나머지는 민호가 가지고 올 거야. 우린 수사 방향이 잡힐 때까지 더 이상의 희생자가 없도록 치안에 전력을 다 해야 해. 평소같으면 경찰이 했겠지만 이번만큼은 양수리 연쇄 살인 사건보다도 더 철저히 수사를 해야 돼."


"타겟이 무작위일 걸 대비해서겠죠, 팀장님?"



태민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종현은 그런 태민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마 종현도 오랜만에 긴장한 상태인 것 같았다. 이 곳에서 일하면서 이런 대형 연쇄 살인 사건은 처음이었던데다, 지금은 범인의 정보는 커녕 살인 패턴도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기에 더했다. 기범은 카르테와 사진들을 다시 보며 예의 그 나른한 얼굴로 하품을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하품이 잘도 나오겠다며 종현이 작게 타박을 하긴 했으나, 이게 원래 기범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기에 잠자코 있었다. 기범은 그는 서류 봉투를 만지작거리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직 뭔가 하나 더 필요해......"

 

 

 

 

한 시간 반쯤이 더 지나고, 민호가 돌아왔다. 그는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종현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곧장 기범의 책상으로 갔다. 기범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젠가(jenga)를 책상 위에 쌓아올리고 있었다. 그는 막 14층의 젠가 블록을 놓고 있었다.



"......"



남이 보면 참 한가하고 할 일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민호가 생각하기엔 그게 기범에게 더 잘 어울렸고, 가장 김기범다웠다. 급한 연쇄 살인 사건이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저런 한가로운 행동이, 정신이 어떻게 됬나 하는 생각까지 들게 했지만 왠지 기범은 이질적이게도 저 느긋한 모습이 어울렸다. 행동이야 한가로웠지만 저 작은 머리통에서는 이번 사건과 관련한 모든 자료를 통째로 집어삼키고 제 나름대로 엄청 복잡한 함수식에 넣어 짜 맞추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창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는 사무실의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과 판이하게 대비되는 김기범의 모습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일테다.


하얀 손 끝으로 블록을 집어 올려놓는 모습을, 민호는 꼭 뭐에 홀린 듯이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히 눈치가 빠른 기범이라면 아무리 젠가 쌓기에 집중하고 있더라도 제 뒤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느낄 만도 하건만, 기범은 일부러 모른 척 하기라도 하는 듯이 줄곧 시선을 젠가의 14층 마지막 블록을 쌓는 데 붙박고 있었다. 민호는 기범이 18층짜리 젠가를 쌓을 때까지 그냥 기다리고 있었다. 저 젠가 탑이 완성되었을 때 이번 사건의 실마리가 함께 기범의 머리에서 완성되었을 것 같았다. 마침내 기범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젠가 탑을 완성시켰을 때, 민호가 입을 열었다.



"......네 결론이 뭐냐."



기범이 민호가 온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인지, 놀라지도 않고 슬쩍 고개를 틀어 민호를 바라보았다. 기범은 다시 시선을 젠가 탑으로 옮기더니, 9층의 젠가 블록을 하나 뽑아, 탑 가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어, 7층의 블록을 다시 하나 뽑아 올려놓기를 한 번 더 했다. 그러고 나서야 기범의 입이 열렸다.



"일단 하나는...... 팀장님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사망자 둘이 모두 얼굴에 성형 수술을 받았다는 거예요."


"블록을 두 개 뽑았으니...... 나머지 하나는 네가 내린 결론이겠지."



기범이 아하하, 하고 짧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민호를 아주 보고 섰다. 기범은 웃는 얼굴로 편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민호는 기범이 어떤 말을 할까 조금 기대를 하고 있었다. 직감 하나는 여자 못지않게 뛰어난 기범이었으므로. 어쩌면, 증거가 없는 이런 직감이라도 이것이 초직감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막연한 믿음으로만 보기에는 기범의 능력이 그보다 더 높았다.



"그래요, 제 짧은 소견으로...... 그 두 분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이 되어 있다는 거예요. 두 분이서 직접적으로 알고 있던, 간접적으로 알고 있던, 아니면...... 두 분은 전혀 서로를 모르고 만난 적이 없지만, 제 3의 무언가가 이 두 분을 알고 있다던가."



기범의 차분한 답에 민호가 가만히 그걸 듣고 있었다. 민호는 잠시 뭘 생각하는 듯 하다가, 기범이 쌓은 젠가 쪽으로 다가가, 10층의 블록을 하나 뽑아 기범이 쌓은 두 개의 블록과 교차되게 놓았다. 민호는 제가 가져 온 서류 봉투를 기범에게 내밀었다. 기범은 그걸 받아들고 안의 내용물을 꺼내보았다.



"국과수에서 가져 온 자료 중에...... 좀 이상한 게 있었어."



민호의 말에 기범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경찰 쪽과 KPSI의 자료는 보았으나 아직 민호가 가져 온 국과수의 자료는 보지 못한 기범은 민호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뭔가 있겠구나 생각을 하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민호는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여자의 시신 부검 때 외형 조사를 했어. 진기 형이 나보고 오라고 한 것도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였고."


"어떤 여자요? 윤강희 씨 아니면......"


"둘 다."


"그래요."



기범의 대답에 민호가 그를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져 있었다. 꼭 송아지 같은 그의 눈에 기범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송아지 중에서 저렇게 잘나게 생긴 놈이 있을까. 기범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민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왜요, 선배.



"......알고 있었어? 그 둘의 몸에서 같은 향수를 사용했다는 결과가 나온 거."



미소를 띠고 있던 기범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기범은 젠가 탑이 쓰러지지 않도록 조심 조심 제 책상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었다.



"......전혀 몰랐는데요. 난 그냥 선배가 그렇다니까 그렇다고 대답한 것 뿐이에요."


"진기 형이 나중에 보내 준 자료에는 윤강희 씨의 경우 손목과 귀 뒤, 이현경 씨의 경우 손목과 스커트 안 쪽에서 그 향수 입자가 검출되었고, 그 향과 성분이 같다고 나와 있어. 우연의 일치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사소한 것도 그냥 넘기면 나중에 골치 아파지니까."


"같은 향수를...... 핸드백 속에 향수병 같은 건 발견되지 않았었나요?"


"어제 우리도 가서 조사했었잖아, 그 때 확실히 둘 다 없었어."


"향수에 의해 중독이라도 되었던 걸까요? 신경성 독처럼...... 정신만 흐릿하게 하는. 그래서 정신이 느슨해지는 틈을 노려 여자를 살해했다, 뭐 이런 거요."


"그것도 있고, 뿌린 향수에 들어있던 분자에 의해 일종의 아나필락시스(anaphylaxis, 과민증) 현상을 일으켜 두 여자 모두 쇼크사라도 했다면 이해가 가.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둘 모두 향수를 뿌린 부위가 아니라, 오른손 엄지와 검지가 꼭 독에 중독된 것처럼 색이 변해 있었어. 확실한 중독이었지. 사용된 독은 비소야. 그런데 향수 분자에는 독 성분이 될 만한게 아무것도 없었고, 그렇다면 그로 인해 중독된 것은 아니야. 이상하지 않아? 손가락의 색만 변한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정말 이상하네요. 손가락의 색이 변한 건 왜...... 손가락에 향수를 덜어 발랐다면 바른 부위도 색이 변해야 하는데, 왜 손가락만이 변했을까요."


"손가락으로 독을 만진 건 확실한데...... 과정이 애매해. 왜 뜬금없이 중독이 되냐는 거지."



민호가 말을 끝내고도 기범은 여전히 책상에 기대어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민호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는 기범을 흘긋 쳐다보았다. 한 손으로 둥글게 주먹을 말아 입가에 댄 채 생각에 빠진 기범은 상당히 무방비해 보였다. 평소처럼 방방 뜬 것도, 날 선 것도 아닌 약간 몽롱하게 보인달까.



"......너도 같은 생각이냐, 어쩌면 이게 세 번째 연결고리가 될 것 같다는 거."



괜히 마음이 물렁해지는 것 같아서 일부러 딱딱하게 말했더니, 기범이 평소의 장난스런 얼굴로 돌아왔다. 민호를 보고 아하하하, 하고 청량한 웃음을 터뜨린 기범은 민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물론 선배 생각이죠."


"......"



민호는 하마터면 숨 삼키는 소리를 낼 뻔했다. 아까 민호 자신도 기범을 생각하지 않았던가. 혼자 느끼는 민망함에 민호는 말을 잃었다. 저런 농담으로도 자신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걸 보니, 아마 김기범은 최민호를 가장 빨리 파악한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답지 않게 오만 생각을 다 하는 민호를 아는지 모르는지, 기범은 어깨를 으쓱하며 제 말을 수습했다.



"나 서운하게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농담이었어요. 선배가 말했던 대로 같은 향의 향수를 쓴다는 것도 중요한 내용이 되겠네요. 그리고 그 손가락 색의 변화... 아무래도 의심스러워요. 그 두 여자분의 집에서 그 향수병이 있나 찾아봐야겠어요."



기범은 당장 찾아나서기라도 할 것처럼 젠가를 등지고 의자에 걸어두었던 니트를 집어들었다. 민호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기범을 보고 있었다. 기범이 그를 돌아보며 아직 말이 남았냐, 고 묻자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 향수, 향이 뭔지 알아?"


"글쎄요, 맡아보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는데......"


"달맞이 꽃(Evening primrose)."


"......달맞이 꽃이라구요?"


"그런데 지금은 4월이야, 달맞이 꽃은 7월에나 피는 꽃이니까...... 아마 그 전에 만들었던 걸 쓴 모양이야. 어쨌든 생각 외로 단순한 향을 썼던데...... 향수병을 찾을 수 있다면 범인은 곧 밝혀지겠지."



기범이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놓으며 말했다.



"손가락의 중독 이유가 향수 때문은 아닌 것 같고, 게다가 향수에서는 어떤 독 성분도 검출되지 않았잖아요. 그러면 조향사는 아직 무혐의예요, 어떤 증거도 없고. 화장품 제조자를 찾아가야 하나요, 찍어바르는 건 파운데이션이 더 확실한데."


"그 쪽도 가야한다면 가야지. 그러라고 있는 게 우리잖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대답하는 민호가 꼭 달관한 승려같다고 생각한 기범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냐는 듯이 쳐다보는 그에게 기범은 그저 혼자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민호는 내심 드는 약간의 불쾌함에 조용히 인상을 찌푸렸다.

 

 

 

 

4월 20일.


수사를 한시라도 빨리 진전시키기 위해, 그리고 사건이 사건이니만큼 그들은 행동을 서둘렀다. 언제 다시 살인이 일어날 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서울 주 도심의 골목은 이미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다. 먼저 종현과 태민이 이현경의 집으로 가고, 민호와 기범은 윤강희의 집으로 가서 향수병을 찾아보기로 했다. 저녁까지 수사가 계속 될 예정이었기에, 그녀들의 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 집을 비워달라 했기에, 갔을 때는 이미 집은 텅 비어있었다. 혹시 몰라서 향수병 외에 손가락을 사용하는 모든 화장품도 함께 가져오기로 했다.


종현은 흰 화장대를 찾아보았으나, 이상하게 향수병은 있지 않았다. 보통 향수와 같은 화장수를 비롯한 것들은 화장대에 올려놓기 마련인데, 어디 있는지 보이질 않았다. 태민은 옷장을 열어보고 있었는데, 종현의 눈에 침대 옆의 콘솔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면장갑을 낀 손을 몇 번 털고 콘솔 쪽으로 갔다.



"여기도 없으면 답이 없는데... 나 참."



중얼거리며 콘솔 서랍을 연 그는 다이어리, 휴대폰 충전기, 손거울들 따위의 잡다한 물건들을 걷어내며, 왠지 여기에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태민이 옷장 문을 닫고 종현 쪽으로 와 콘솔 서랍 안을 들여다 보았다.



"어, 형! 저기저기, 서랍 왼쪽 구석에 유리같은 거 있어요!"


"엉? 어디! 아...... 찾았다."



태민의 방방 뜨는 목소리에 종현이 눈을 크게 뜨고 서랍의 왼쪽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건들을 옆으로 치워내고 보니, 확실히 크지 않은 유리병이 보였다. 연한 노란색의 액체가 담긴, 달맞이 꽃이 새겨진 병이었다. 병의 마개에는 루비처럼 보이는 빨간 보석이 박혀있었다. 아마 병 값만도 꽤 될 것 같았다. 루비가 진짜라면.



"우와, 병 되게 이쁘네요...... 그 향 맞아요, 형?"


"아니, 일단 그냥 가져가는 게 좋아. 함부로 맡았다가 잘못되면 답이 없다. 하지만 병 모양이나 그런 거 보니까 얼추 맞는 것 같은데."


"아, 그렇구나! 그래요. 민호 선배랑 기범이 선배한테선 연락 없어요?"


"......닭짓이나 안 했으면 좋겠다만... 만약 일하면서 연애하면 가만두지 않을테다."



종현은 묘하게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반응에 태민은 푸하하, 웃고 말았다. 태민의 웃음에 종현도 슬그머니 웃었다. 종현의 저 반응은, 워낙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민호는 그렇다 치고, 기범의 경우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안 그러는데 유독 종현 앞에서 민호에게 '애교' 를 부리기 때문이었다. 물론 악의는 섞이지 않았고, 기범도 아주 잠깐 그러는 거라서 종현도 이해하고 있었다. 일부러 화내는 척 하는 것일 뿐.


그 때, 종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민호인가, 하면서 받은 종현은 반대편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굽히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어, 진기 형!"


[찾았어? 절대 냄새 맡아보지 말고 비닐에 잘 넣어-!]


"엉? 어, 그렇게 했어. 근데 형 왜 이렇게 방방 떠, 목소리가?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니, 어!]



종현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아니! 아니, 어! 라니...... 저게 뭔 말이여.



"무슨 말이야, 형?"


[무슨 일? 너 몰라? 방금 또 일어났잖아, 살인!! 벌써 세 번째야!]



전화기 밖까지 흘러나오는 진기의 목소리에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종현 뿐 아니라 태민의 얼굴까지 굳어졌다. 태민은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종현이 한순간 아찔해지는 정신을 추스리고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같은 방식......?"




안방부터 샅샅이 찾던 중, 기범이 윤강희의 화장대 작은 서랍에서 손바닥 길이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유리병을 찾아내었다. 달맞이 꽃의 탐스러운 꽃봉오리가 돋을새김으로 새겨 진 유리병에는 꽃의 색처럼 밝은 노란색의 액체가 가득 담겨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아마 한 두번 밖에 쓰지 않았다고 생각될 만큼, 거의 새 거나 다름없었다. 기범은 일단 함부로 병에 손을 대지 않고, 면장갑을 낀 손으로 병의 몸체를 들어 비닐 주머니에 담았다. 찾았다며 민호를 부르고 막 병을 추려 일어나려는데, 화장대의 서랍 바닥에 무언가가 납작하게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명함?"


"찾았어?"


"네, 선배. 그런데......"



민호가 기범의 옆에 서며 그의 시선이 붙박혀 있는 곳으로 허리를 조금 숙였다. 기범은 손을 뻗어 조심스레 바닥에 있는 직사각형의 빳빳한 종이를 집어들었다. 온통 검은색인 명함에는 어떠한 무늬도 없이 금박을 입힌 글씨로 [per fumum, 4월 30일] 이라는 가게 이름과, 전화번호만이 적혀 있었다.



"......4월 30일? 이게 가게 이름일까요? 향수 가게 같긴 한데."


"나름대로 특이한데. per fumum...... 이거 향수 perfume의 어원이야."


"라틴어네요. 근데 주소도 없고...... 그래도 전화번호라도 있으니 다행인 건가요."



민호는 조금 난감한 듯 눈썹을 뉘었다.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가게로 가 보고 싶지만...... 너무 늦었으려나. 하지만 지금 한시가 급한데..."


"일단 전화라도 해 보죠. 혹시 가게 안에서 조향을 한다면 아직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민호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막 휴대전화 폴더를 젖혔을 때, 전화벨이 울리며 열려진 화면에 '버럭쫑' 이라는 발신자가 떴다. 민호는 잠깐 멈칫 하더니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민호가 전화기에 귀를 가져다 대기도 전에, 발신자 이름과 어울리는 고함이 터졌다.



[최민호!!! 너 들었어?!!]


"......팀장님은 왜 통화하실 때마다 소리를 지릅니까."


[임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세 번째 살인이 일어났단 말야!]


"뭐라구요?"


[지금 사무실로 돌아 와, 향수병 찾았어?]


"네, 찾았는데......"


[자세한 이야긴 오면 얘기할 테니까 얼른 복귀해!]



순식간에 끊어진 통화에 민호조차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기범은 별 말 없이 향수병과 명함을 챙겨 방을 먼저 나섰다. 민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범의 뒤를 따라 나섰다.


벌써, 세 번째라고?

 

 

 


"어떻게 된 겁니까, 대체 언제......"


"사망 추정 시간은 약 9시 40분이야. 우리가 수사를 시작한 게 오후 3시 쯤이었는데...... 지금이 10시 23분이니까, 얼마 되지 않아서 일어난 거지. 세 번째 사망자는 27세의 윤경은 씨. 강동구에서 발견되었어. 팀원들이 먼저 발견해서, 거기서 진기 형이 검시를 한 모양이야. 우리는 실마릴 찾느라 먼젓벗 사망자들의 집에 있었으니까 서울 KPSI에서 대신 한 거겠지."


"목격자는 없었답니까?"


"이상한 일은, 이번에는 별로 외지지도 않고 가로등도 있는 골목이었는데도 살인이 일어났다는 점이야. 목격자는 역시 없었어. 그 인근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봤는데, 비명도 몸싸움도 없었던 듯,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고 하던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조용히 죽일 수 있는 걸까."



종현이 착잡한 듯 손톱을 깨물었다. 기범은 아무런 표정 없이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민호가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그의 눈꺼풀에는 피곤이 몇 겹씩 내려앉아 있었다.



"......역시 같은 패턴이고, 같은 달맞이 꽃 향이 났습니까?"


"......그래."


"아무래도 그 가게를 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 가게?"



민호의 말에 종현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기범이 내내 만지작거리던 명함을 종현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종현이 명함을 확인하고 둘을 쳐다보았다. 입을 연 것은 기범이었다.



"그 그로테스크한 가게 이름이, 달맞이 꽃 향수를 만든 곳 같아요. 그 향수병과 함께 들어 있었거든요. 그 향수를 만든 곳이 아니라, 예전에 갔던 향수 가게라면 다시 원점이겠지만요. 한 번 가 보는게 낫지 않겠어요?"


"지금까지의 희생자들이 모두 같은 향을 쓰고 있었다면, 확실히 의심스러워요. 저 방금 진기 형이 보내주신 걸 봤는데요, 윤경은 씨도 턱을 깎는 성형 수술을 받았다고 하셨어요. 얼굴을 성형한 것도 전의 두 분과 같고, 분명 관계가 있을 것 같아요."



태민이 급히 들어 와 기범의 이야기까지 끝날 때까지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셋의 시선이 모두 태민에게 쏠렸다. 태민은 살짝 미소를 짓고 말했다.



"그리고 진기 형도 같이 오셨어요. 지금 뭣 좀 정리하시느라 회의실에 계신데 곧 오실 거예요."


"얼굴을 성형한 것까지 같다면...... 아니, 근데 성형 수술을 받은 병원은 다 다르다고 했잖아. 그럼 남은 건 한 가지이긴 한데..."


"그러니까 향수 쪽으로 생각을 해 봐야겠죠......"



마침 회의실에서 온 진기는 정신이 없는지, 종종종 뛰어와 후다닥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이 허둥대는 어린아이 같아서 민호를 제외한 셋은 웃음을 힘껏 참아야 했다. 종현은 기범에게서 건네 받은 명함을 다시 보곤, 자신의 휴대전화를 들었다.



"일단, 이 가게를 좀 가 봐야겠다. 한꺼번에 다 가면 수상하다고 생각할테니, 진기 형하고 기범이가 수고 좀 해 줘. 진기 형은 혹시나 그 향수에 뭔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좀 부탁할게."


"우와, 나 오랜만에 형이랑 데이트하네? 아하하하."


"으허엉, 보고 싶었어, 우리 기범이...... 어? 잠깐잠깐, 나 향수병 조사도 해야 하는데? 괜찮아, 나 빠져도?"


"우리도 간단한 건 할 수 있으니까 걱정말고 다녀 와, 김기범이 좀 유별나긴 해도 형은 지킬 수 있을거야."


"헐? 그거 대체 무슨 뜻이에요, 팀장님!"



진기가 향수 가게 [4시 30분]에 연락을 해 보니, 다행히 아직 사람이 있었다. 지금 가면 좀 의심을 살 수 있었기에, 평범한 구매자처럼 꾸며 가게 위치를 알아내었다. 위치는 일산이라 멀지 않았다. 종현은 진기가 통화를 마치자 내일 진기와 기범이 먼저 가서 가게를 보고, 주인과 이야기를 해 보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후에 종현과 민호, 태민이 가서 사망자들의 얕은 정보부터 세세한 것을 알아보기로 했다.



"벌써 세 번째야. 범행 텀이 2주였다가 순식간에 사, 나흘로 바뀌었어. 하지만 이 살인이 텀을 두지 않고 목표 대상이 나타날 때마다 일어난다면 그 기간도 예측하기 어려워. 일단 경찰청이 서울 전 지역 사람들에게 절대 8시 이후로는 밖에 나가지 말라는 특별 경보를 내렸으니, 이렇게라도 사망자를 막을 수 있다면 막아야겠지."


"대체 앞으로 얼마나 더 죽이려고 들까요."


"알 수 없지, 아무도. 나 참, 세상 흉흉해서 이거......"

 

 

 

 

*

 

 

 


4월 21일.


진기와 기범은 오전 10시, 다소 한산한 시간대를 골라 문제의 향수 가게, [per fumum, 4월 30일]을 찾았다. 초행이라 좀 애를 먹긴 했으나, 다행히 오래 걸리지 않아 가게를 찾아낼 수 있었다. 가게는 명함처럼 온통 까만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샵이었다. 입구에 드리워진 모조 루비와 수정을 섞어서 엮은 주렴(珠簾)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은은한 향수 향기가 코에 끼얹어졌다. 가게의 벽을 따라 가득 채운 유리 진열장 안에 빼곡히 채워진 향수병들이 늘어 서 있었다. 빛깔도 가지각색이었고, 향도 그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하지만 기범은 들어서자마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온갖 향기가 다 섞이니 예민한 편인 그의 후각이 좀 둔해지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지나치게 깔끔한 샵의 내부는 꼭 에르메스 정장에 구두라도 신고 들어와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향수의 향 때문에 그런 것일지는 모르지만, 상당한 안은 몽환적이었다. 기범은 왠지 이 분위기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머,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나긋나긋한 여자의 목소리가 진기와 기범을 맞았다. 진기는 예의바르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녀 역시 자리에서 일어서, 허리를 굽혔다. 안의 인테리어와 기이한 장식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던 기범은 진기가 그를 꾹 찌르고서야 정면 카운터에 앉은 여자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기범은 그녀를 향해 살짝 허리를 굽혔다. 그녀는 한 30대 중후반으로 보였으며, 고불고불한 머리카락은 한 쪽 얼굴을 가리며 내려와, 상당히 기품있어 보였다. 꽤 예쁜 얼굴이었고 분위기가 묘했다. 몸은 마르지 않았지만 뚱뚱하지도 않았다. 기범은 별다른 감흥없이 그녀를 보았다. 살인을 저지를 것 같지는 않았으나, 어차피 사람 얼굴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건 애저녁에 버렸다. 판단 후의 갭이 얼마나 큰지 기범이 제일 잘 알았으니까. 그런 기범과는 달리, 그와 눈이 마주친 그녀의 눈은 크게 떠졌다.



"어머...... 이렇게 매력있게 생기신 손님은 처음이네요, 보통 향수의 매력에 끌려 오신 분이 많은데..."



그야 향수의 매력이 아니라 범인의 매력에 끌려 온 손님이니까 그렇습니다, 하고 속으로 대답한 기범이 감사합니다, 하고 작게 말했다. 기범은 가게에 들어 온 후부터 시종일관 미소 띤 얼굴이었다. 물론 민호가 본다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게 뻔했지만, 이미 이런 습관이 굳어진 기범은 그녀가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웃음을 팔 각오가 되어 있었다.



"미인이세요, 두 분 다."


"네? 으하하... 감사합니다."



진기는 당황했다가 기범이 쿡 옆구리를 찌르자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기버마, 이 여자 좀 무서워, 나 가고 시퍼...... 라고 전음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진기였다. 하지만 진기는 기범 못지 않은 타고난 붙임성으로 한 발짝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하, 제가 어제 저녁에 전화드린 사람입니다. 늦은 시간에 전화드려 죄송했습니다."


"네에? 어머, 아니에요. 어차피 조향하던 중이라서 상관없었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다행이에요- 아는 분이 쓰시는 향수의 향이 좋아서 여쭤봤더니, 달맞이 꽃 향수라고 하시더라구요. 저도 하나 사고 싶어서 어디서 사신 거냐고 여쭤보니 여기 명함을 주시길래 전화드렸습니다."



진기는 침착하게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기범은 진기가 여자의 시선을 끄는 동안, 유리 진열장 안의 향수들을 살펴보는 척 하며 가게 내부를 훑어보았다. 카운터 뒤 쪽으로 문이 없는 공간이 하나 있었는데, 아무래도 뒤로 통하는 것 같았다. 2층인지 지하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푸른 수정으로 엮은 주렴이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보니 분명 사용하는 곳이 따로 있으리라 생각했다. 기범은 혹시 밖에서도 통하는 문이 있을까 해서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하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진기가 잘 해주리라 믿으며.



"아, 그 향수는 직접 만드신 건가요?"


"그 향수...... 아, 달맞이 꽃이요?"


"네, 달맞이 꽃 향수요."



그녀는 살짝 미소를 띠며 말했다.



"사실 이 향수의 이름은 '달맞이 꽃 향수' 가 아니랍니다. '발푸르기스의 밤' 이라는 향수예요. 음, 이 이름의 뜻은...... 다음에 오시면 가르쳐 드릴게요. 특별히 미인이시니 가르쳐 드리고 싶네요. 다른 손님들께는 가르쳐 드리지 않았거든요."



"와, 정말요? 원래 이름이 따로 있었구나, '발푸르기스의 밤'. 뭔가 굉장히 분위기 있는데요? 하하. 향기가 굉장히 좋던데...... 그런데 지금은 달맞이 꽃이 필 시기가 아닌 것 같은데, 작년에 만들어 두신 건가요?"


"네, 그래요. 작년에 따서 말린 달맞이 꽃을 첫 노트로 했죠. 달맞이 꽃에 오렌지 블럿섬을 넣어서 더 청량한 향이 나도록 했답니다. 그것 말고도 바닐라 앱솔루트도 함께 넣었어요. 여기 맡아보세요, 부드러울 거예요."



그녀는 카운터 아래 진열장에서 종현과 태민, 민호와 기범이 각각 찾아 낸 같은 형태의 향수병을 꺼냈다. 그녀가 꺼낸 것은 시향용이었다. 마개를 열고 손바닥으로 살짝 바람을 일으켜 주었다. 그러나 진기는 숨을 참고 있었다. 아직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방비로 노출되면 일이 난다.



"미들 노트는 타임(백리향)을 넣었어요, 너무 가라앉으면 곤란하니까요. 어때요? 베이스에 딥 머스크를 넣으니, 굉장히 섹시하지 않나요? 이래서 여성분들이 이 향수를 많이 선호하신답니다."


"정확한 용어는 잘 모르겠지만, 느낌은 정말 그러네요. 우와, 어떻게 조향을 하시면 이런 향수가 나오나요? 퍼퓨머들은 참 대단하신 것 같아요."



그녀는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 감탄하는 진기가 동생처럼 귀여웠던지,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발푸르기스의 밤은 4월 30일까지만 판매할 예정이에요."



그녀의 대답에 진기가 고개를 들었다. 4월 30일......? 이 가게 이름과 관련이 있는 건가?



"네? 아니 왜요? 더 많이 파시면 좋을텐데......"


"5월부터는 다시 조향 공부를 하러 프랑스로 떠나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일주일 하고도 이틀 더 팔고 갈 생각이에요."


"아, 그러시구나...... 아쉬워요, 전 이제서야 겨우 알았는데. 가시기 전에 저도 하나 사야겠......"



차르륵.



"조향 끝났어, 빨리 와서 가......?!!"



촤륵!!!



난데없이 들린 걸걸한 목소리에 진기가 깜짝 놀라 푸른 수정 주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목소리는 진기가 자신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다시 주렴 안 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진기도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다시 얼굴을 되돌렸다. 그녀가 그런 진기에게 웃어보이며 말했다.



"함께 조향하는 사람이에요, 저 분도 같이 조향 공부를 하시러 프랑스로 간답니다."


"네? 아, 네에... 그런데 왜 다시 들어가셨죠...? 인사하고 싶었는데..."



 
"원래 사람을 대하는 걸 좋아하시지 않아서 그래요. 이해해 주세요."

진기는 갑작스레 등장한 사내의 모습에 놀란 가슴을 추스렸다. 아니, 웬 목소리가 저렇게 걸걸하담... 하도 미성인 애들하고만 있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하는 중에 기범이 돌아왔다. 여자는 기범을 보자 활짝 웃었다.



"화장실이 어딘지 몰라서 한참 헤맸어요...... 으아."


"어머, 정말요? 이 건물 나가시면 바로 있는데... 찾으셨어요?"


"네, 제가 원래 길 하나는 잘 찾아요. 아하하하."


"호호, 이리 오셔서 향 좀 보세요. 달맞이 꽃 향수를 보러 오셨다면서요."



여자는 기범에게서 눈을 뗄 줄을 몰랐다. 진기는 슬쩍 그녀를 보고 기범이 그녀의 취향인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미인' 을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자신이 미인인 것은 모르겠으나 -아직도 이진기씨는 자신의 외모에 대한 자각이 없는 게 분명하다- , 확실히 김기범은 미인상이라고 생각했다. 시종일관 기범을 바라보며 웃는 그녀를 보고 진기는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걔 품절남이라고.

 

 

 


[per fumum, 4월 30일]을 나선 진기와 기범은 곧바로 사무실로 돌아갔다. 진기는 기범이 나가 있었을 때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해주었다. 이 향수의 원래 이름이 '발푸르기스의 밤' 이며, 이것이 4월 30일까지 팔리는 것이고, 5월 1일에는 이들이 프랑스로 갈 것이라는 것, 얘기 중에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진, 얼굴도 보지 못한 조향사라는 남자의 이야기까지.



"발푸르기스의 밤......?"


"분명 그렇게 말했어. 원래 이름이 발푸르기스의 밤이라고."


"발푸르기스의 밤...... 어디서 많이 들어봤어요, 게임 잡지에서도 본 것 같고...... 잠깐만요!"



태민이 동그란 눈을 굴리다가 노트북을 제 앞으로 당겼다. 잠깐 검색을 하던 태민이 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여기 있어요, 발푸르기스의 밤. 동부 유럽에서 메이데이의 전날 밤, 즉 4월 30일을 발푸르기스의 밤이라고 생각했고...... 독일에서는 악마가 마녀들을 슈바르츠발츠(검은 숲)의 최고봉 브로켄산 위에서 소집한다고 믿었다고 하네요."


"4월 30일이라고? 그 날까지 향수를 판다고 하지 않았어? 아무래도 좀 수상해...... 가게 이름도 그렇고, 금방 사라졌다는 남자...... 이들이 4월 30일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거지? 그 날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다는 걸까?"


"아, 그리고 달맞이 꽃의 꽃말... '기다림' 이에요. 저녁에 피었다가 아침에 지는 꽃이고...... 만약 이것도 관련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뭘 기다리고 있는 거죠? 프랑스로 떠날 날? 하지만 그런 거에 이렇게 복잡한 의미를 붙이는 것도 이상해요."



확실히 정보는 혼란스러웠고, 맞추기가 매우 힘들었다. 분명 이 사건과 그들이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은연중에 굳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했고, 무엇보다도 그 살인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킬 고리가 상당히 약했다. 그렇다고 처음 만난 그 사람들에게 지금 죽은 세 명의 여자의 이야기를 꺼내면 의심을 살 게 뻔했다. 그 와중에 진기가 진지하게 덧붙인 말은 심각한 상황에 있던 넷을 빵 터지게 하기 충분했다.


"아, 그리고 거기 가게 주인 아줌마가 기범이를 너무 좋아하던데? 그냥 두면 프랑스로 잡아갈 거 같아...... 무셔......"


"엥?! 푸하하하하, 아 진짜, 마성의 김기범!!! 이젠 아줌마까지 꼬시냐?! 잘 하면 수도자도 꼬시겠다?"


"아니, 그리고 거기 주인 아줌마가 상당히 미인이셔서......"


"아하하, 기범이 선배 인기남이네요, 완전!"


"내가 좀 인기남이긴 한데...... 아줌마가 날 너무 좋아하시더라고. 나 품절남인데. 아하하하하, 보는 눈이 좀 있으시더라니까!"


"......"



민호는 종현과 진기가 기범의 자기자랑에 발로 한 대 차는 시늉을 하는 상황에도 잠시 그 가게를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 가자니 기범이 불안하고, 가자니 그 '아줌마' 가 불안했으므로.


진기가 난데없이 덧붙인 말에 마성의 김기범에 대해 웃어제끼고 기범을 살짝 마사지 해 준 그들은 종현이 이제 수사하자는 말을 꺼내고서야 다시 원래의 심각한 분위기를 잡았다. 그러나 자꾸 웃음이 터지는 진기 때문에 한 차례 잔잔한 파도가 지나간 후 수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서울은 잠잠했다. 연이어 세 번째 살인 사건이 터지더니, 4월 26일인 오늘에도 무사히 하루가 마무리 되고 있었다. 국민들은 뉴스에서 터지던 연쇄 살인 사건 때문에 심한 불안에 떨며 경찰을 맹비난하다가, 이제 좀 잠잠해 지는 것 같아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특별 경보는 아직 거두어 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경보로 인해 사람들이 밖으로 안 나오다 보니 더 이상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런 위태로운 평온이 경찰들에게는 더 긴장되었다.

 특히 KPSI는 4월 30일이 다가오는 것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 [per fumum, 4월 30일]에 다녀 온 종현과 민호는 아무래도 그 푸른 수정의 주렴 안 쪽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거의 조향 작업을 거기서 하는 것 같고, 영업 시간이 끝나도 조향은 밤 늦게까지 계속되었으므로 함부로 조사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아직 주렴 안의 남자의 모습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가장 수상한 사람이 바로 그 남자였다. 어쩌면 가게의 여주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연막일 수도 있었다. 오히려 아무런 범행 없는 사람을 앞에 두는 편이 더 안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희생자인 윤경은 씨 이후로 다른 희생자는 나오지 않고 있어. 하지만 우리는 30일까지 어떤 긴장도 늦추어서는 안 돼."


"범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는 이런 사건 없었으면 좋겠어요. 세상에,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아직 젊은 여자들인데......"


"아 맞아! 너희 향수병 조사한다는 거 어떻게 된 거야?"



진기가 퍼뜩 생각났는지 고개를 휙 돌리며 네 명을 돌아보았다. 진기의 말에 넷은 멍청한 얼굴로 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맙소사, 까맣게 잊고 있었다.



[으허엉, 보고 싶었어, 우리 기범이...... 어? 잠깐잠깐, 나 향수병 조사도 해야 하는데? 괜찮아, 나 빠져도?]


[우리도 간단한 건 할 수 있으니까 걱정말고 다녀 와, 김기범이 좀 유별나긴 해도 형은 지킬 수 있을거야.]



"......미안요, 형."


"그, 그게!!! 그게 언제적 일인데!!! 거의 일주일이 다 되어가잖아!! 니들 정신 어디다 두고 온 거야아--!"



진기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울부짖고 있었다. 정말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간단한' 일이라던 걸... 어쩌면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는 향수병을 근 일주일 동안 내버려두고 있었다니. 진기가 포효할 만도 했다. 종현은 난감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고, 기범은 먼 산을 보고 있었다. 어찌할 줄을 모르던 태민만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진짜아... 줘 봐, 내가 하고 올게. 김종현 너는 팀장의 책임을 지고 나 좀 따라와."



갑자기 돌변한 진기의 모습에 종현은 깨갱, 하고는 그의 뒤를 따라나갔다. 그 모습을 본 기범이 허어, 하는 탄식을 뱉었다. 천하의 김팀장님이 여리여리 물렁물렁한 이진기 박사한테 쩔쩔매다니... 역시 연장자의 힘이란, 하고 기범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진기는 약 40여 분이 흐른 다음 검시실을 나왔다. 종현도 마침 타이핑을 끝낸 문서를 출력하고 있었다. 종현은 심각한 얼굴로 진기에게 다가왔다.



"조사 안 했으면, 수사고 뭐고 다 접어버릴 뻔 했네."


"그러게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종현은 씁쓸하게 웃고 진기의 어깨를 두드렸다.



"설마 병 마개에 비소가 있었을 줄은...... 마개를 열 때 엄지와 검지를 사용해서 여니, 거기 묻은 독이 손가락에 옮겨 가 중독이 된 거군. 마치 중세의 양가죽 장갑 같네. 독을 적신 장갑을 선물로 주어 그 상대가 서서히 죽게 하는...... 아마 비소를 이용해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을 흐릿하게 했겠지."


"향수병의 향수가 거의 새 것에 가까웠다는 건......"


"아마 그 가게에서 나가기 전, 한 번 뿌리고 나가라고 권했겠지. 그래서 그들은 향수병 마개에 자신들의 손가락을 대었고. 그리고 오후까지 희생자들을 붙잡아 놓을 수 있는 핑계가 많잖아, 향수 가게니까. 향수에 약한 여성들을 오랫동안 그 가게에서 시간을 끌도록 했을테고, 저녁에 온 손님이라면 대환영이었겠지. 시간을 별로 끌지 않아도 될 테니까. 날이 저물 때 쯤, 그 때 묻은 독에 중독이 되어 가게를 나선 희생자들을 따라 가 살해했다...... 너무 치밀한데, 기분 나쁠 정도로."


"결국 그녀들은 향수 한 번 뿌리고 목숨을 잃은 거나 다름없었네."



진기는 자꾸 손톱을 깨물었다. 아름다움에 약할 수 밖에 없는 여성들을 이런 식으로 이용해서 살해를 저지르다니...... 그리고 얼굴 가죽은 무엇때문에 벗겨 간 것일까. 종현은 제 손을 물고 있는 진기를 슬쩍 보았다. 워낙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분명 안타까워하고 있을 게 뻔했다. 저러면서도 강할 때는 참 강한 사람. 존경심마저 들 때도 있었다.


종현은 손을 뻗어 애꿎은 씹힘을 당하는 진기의 손가락을 구해주었다. 이거 김기범도 이래서 민호가 싫어하던데...... 직접 보니 그렇긴 하네, 하고 종현은 생각했다. 진기의 손을 잡아 내린 종현과 놀라서 고개를 든 진기의 눈이 마주쳤다. 괜히 분위기가 이상한 것 같아서 종현은 진기의 손을 잡고 있다가 떨어뜨렸다.



"소, 손톱에 세균맨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먹고 있어."


"어? 아, 응...... 세균맨만 있는 거 아닌데...... 짤랑이도 있는데."



종현은 빤히 진기를 바라보았다. 형 올해 몇 살? 아직도 빵빵돌이 호빵맨 볼 나이? 종현은 손톱에 세균맨 짤랑이 키우는 게 자랑이다... 하면서도 그런 진기가 나이와 다르게 순수한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얼른 애들한테 말해주러 가자."


"어, 어. 형, 미안해 내가 정신 똑바로 차렸어야 했는데......"


"아냐, 아깐 괜히 한 소리야, 수사는 항상 꼼꼼해야 하니까...... 다음엔 더 잘 하라구."


"푸하, 알았어. 형, 매번 고마워. 진짜, 형 없으면 우리 수사 어떻게 하냐. 우아, 형 그냥 우리 수사팀에 들어오면 안되나?"



종현은 웃음을 터뜨리고 진기를 덥썩 안아주었다. 종현이 그냥 친한 형으로서 이런 행동을 한 것이라도, 진기는 온 몸이 경직되는 것 같았다. 정말 종현은 자신의 마음을 전혀 모르고 있는 걸까...... 내가 이렇게까지 티를 안 내는 성격이었나, 하는 생각이 진기의 마음을 처지게 했다. 아무리 태민과 잘 정리가 되었다고 해도, 금방 마음이 돌아설 리 없을텐데, 조금씩 기대하는 것 같아서 진기는 자신이 싫었다. 결국 진기는 마주 안아주지도 못하고 종현이 자신을 놓아 줄 때까지 멍하게 있었다. 시원한 그의 샴푸 향기가 어떤 향수보다도 더 진기를 떨리게 했다. 종현은 진기를 놓고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 왜 이렇게 몸이 굳었어? 힘들어?"


"아냐...... 아무것도. 가자."


"......"



진기는 말을 얼버무리며 사무실로 나가려 발을 딛었다. 종현은 입을 다문 채 있다가, 진기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덕분에 앞으로 내딛던 발을 다시 물러 원위치가 되어 버린 진기는 흠칫, 하며 종현을 돌아보았다.



"왜?"



애써 담담하려는 목소리가 떨렸다.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떨리는데...... 어떻게 말을 해, 좋아한다고. 종현은 잡은 팔을 놓지 않고 가라앉은 시선으로 진기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형, 내가 불편해?"


"......뭐?"



종현의 뜬금없는 질문에 진기는 멍해졌다. 편하지는 않다, 솔직하게. 아직 태민이 그 마음에 남아 있는지도 궁금했고, 자신을 그냥 형으로만 생각하는지도 궁금했고, 만약 자신이 마음을 내비친다면 종현의 반응이 어떨지도 궁금했다. 진기는 그 궁금증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입 안을 가득 채워버려서, 그걸 다시 아래로 아래로 눌러내리려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 가장 안돼보이는 사람이 자기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으로 가장 힘든 사람이 자신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어느 순간인지는 모르겠는데, 형이 날 피하고 있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


"그랬어."


"그렇지 않다니까, 별 일 아니야."


"나한테는 별 일이야."



다부지게 말을 받아치는 종현이 꼭 엄마에게 대드는 어린아이 같아서, 진기는 뭐라고 대답을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진기는 한숨을 쉬었다. 종현은 제가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진기를 놓아 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너까지 왜 이래."


"너까지......?"


"나 지금도 복잡하니까,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돼? 솔직히 요즘 힘든 거 맞는데, 말하고 싶지는 않아......"



진기는 그렇게 잘라말하고 종현의 손에서 제 팔을 빼내었다. 또 물러섰다. 또 벽 뒤로 숨었다. 종현이 제 마음을 알지 못하길 바랐다. 종현의 마음에 일단 발을 딛을 용기가 쉽사리 나지 않았다. 그 한 걸음이 나아가게 될 지, 뒤로 물러나게 될 지 몰랐다. 게다가 뒤는 낭떠러지다. 마음을 보이고 나서 뒷걸음질 치게 된다면, 그대로 시커먼 계곡이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미안해, 하지만 정말 별 일 아니야. 곧 괜찮아질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난 형인데!"



진기는 웃으면서 종현을 살짝 안아주었다. 이걸로 의심을 푼다면 그럴 수 있었다. 비록 종현을 가볍게 안아주려 팔을 뻗은 것만으로도 몸이 아파오긴 했지만. 진기는 자신의 괜찮다는 말에도 아무 반응이 없는 종현의 등을 몇 번 토닥여주고 뒤로 물러났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제 허리를 감싸 꼭 안은 종현만 아니었다면.



"잠깐......만...! 종ㅎ......"



진기는 종현을 밀어내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나 끄덕도 않는 종현은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요즘 형 진짜 위태로워 보여. 난 부모님도 형제도 애인도 아니지만, 이런 나도 보일 정도로 형 위태로워. 그거 보는 민호랑 기범이, 태민이, 다른 팀원들 생각도 좀 해 줘. 평소처럼 웃고 있어도 힘든 게 다 보인단 말야. 좀 기대면 안 돼? 형도 좀 김기범이랑 비슷해, 모든 일 혼자 다 끌어안으려고 하는 거."


"......"



종현은 곧 진기를 놓아주고 웃음을 터뜨렸다. 진기도 기분은 가라앉았지만 왠지 웃음이 터졌다.



"형이니까, 이진기라서 이런 찐한 포옹도 해 준다. 푸하하. 힘내, 형."


"......알았다!"

 

 

 

 

*

 

 

 


4월 28일.



기범은 [per fumum, 4월 30일] 앞에 서 있었다. 혼자서. 오늘이 이 가게의 조향사들과 '발푸르기스의 밤' 에 관한 이야기의 끝을 마무리 질 생각이었다. 이미 종현 쪽에는 여길 다녀오겠다고 했으니,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알아서 올 것이다.


갑자기 살인이 잠잠해진 이유. 살인이 멈추었을 때는 기범과 진기가 이 가게에 찾아 온 다음이었다. 무언가가 있었다. 현재는 도통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산발적으로 늘어서 있어서, 수사하기에도 갈피를 못 잡고 있지만, 이들이 만약 범인이라면 진실이 나올 것이다.


왜 성형 수술을 하고 '발푸르기스의 밤' 을 산 여자들만 죽인 것인지, 향수병에 비소를 묻혀 치밀하게 계획된 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누구인지, 그녀들에게서 거두어 간 얼굴은 어디에 썼는지, 가게의 두 명이 모두 범인인지, 아니면 한 사람만 범인인지.



"안녕하세요."


"어머, 오랜만이에요- 이상하게 미인 두 분이서 다녀간 후로 남자 손님들이 또 다녀가셨어요. 그 분들도 참 잘 생기셨던데...... 그래도 그 쪽이 가장 반갑네요. 어서 와요."


"네, 잘 지내셨죠?"


"그럼요."



그녀는 기뻐하며 금방 차를 내 왔다. 기범은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잠깐 향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기범은 더 이상 끌면 때를 놓칠 것 같아 슬쩍 그녀를 떠 보았다.



"어휴, 큰일이에요."


"어머, 왜요?"


"하나뿐인 여동생이 성형을 하고 싶다고 하지 뭐예요. 전 여자애 얼굴에 칼 대는 거 싫은데...... 멀쩡한 얼굴을 왜 아프게 하는 건지......"



기범은 천연덕스럽게 고민인 척 하며 말을 던져놓고, 그녀의 반응을 재빨리 살폈다. 솔직히 성형 수술에 대해서 기범은 좋다 나쁘다의 인식이 전혀 없었으나, 그녀를 떠 보려면 이렇게 나와야 했다. 그녀의 미소 띤 얼굴은 별다른 미동이 없었다. 오히려 그게 진심으로 함께 고민하는 얼굴이어서 잘못 짚었나, 하는 허탈함이 기범의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이러면 의심은 수정 주렴 뒤의 조향사에게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역시 말려야겠죠?"


"본인이 원한다면 해야죠, 물론 안 하는 것도 괜찮지만...... 아름다워지는 것은 여자의 자연적인 욕구 아니겠어요?"


"음, 그래요. 전 아무래도 가족이다 보니 좀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일단 얘기를 더 해 봐야겠어요. 여기 향수를 하나 사다 줄까요, 그러면 좀 더 여성스러워지려나. 아하하하."


"그 여동생이라는 분, 그 쪽과 닮았나요?"


"네, 조금. 절 닮아서 예쁘긴 하죠, 아하하하."



기범이 일단 떠 보는 것을 그만두고 소리내어 웃었다. 없는 여동생을 만들어서 예쁘다고 하려니 아주 몸이 간지러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기범에게 빙긋이 웃어주었다. 이렇게 보니 좀 젊어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역시 미인이에요, 당신은."


"아하하, 감사합니다. 아, 그런데 안 쪽에 계시는 조향사 분은 언제 뵐 수 있나요? 5월 1일에 떠나시는데... 분명 멋진 향수를 만드시는 분일 거라고 생각해요. 뵙고 싶어요."


"글쎄요, 저 분은 정말로 사람 만나는 것을 불편해하시는 분이시라...... 저도 처음에 적응을 잘 못했답니다. 하지만 정말 좋은 분이에요. 조향에 있어서도 아주 뛰어나시고. 미안해요, 그 부분은 제가 어찌할 수가 없는 것 같네요."



기범은 괜찮다며 더 이상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녀와 이야기를 한동안 더 나눈 다음, 기범은 가게를 나섰다. 벌써 날이 저물고 있었다. 휴대전화 시계를 확인하자 저녁 7시. 그는 나오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풀리지 않는 사건은 처음이었다. 당장 가게로 다시 쳐들어가 주렴 뒤의 사내를 끌어내보고 싶었지만, 지금 그럴 수는 없었다. 결정적인 단 한 가지가 부족했다.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들을 한 번에 연결시킬 수 있는 다리가, 바로 이 살인의 동기. 할 수 없이, 내일 강제로라도 저 안을 조사 해야 했다. 의심스러운 4월 30일이 가까워 오는 상황에 더 이상의 시간 끌기는 최악이었다.


기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걸음을 옮겨 가게 뒤 쪽으로 향했다. 혹시나 해서 쓰레기를 내 놓는 곳을 기웃거렸다. 종이 꾸러미와 폐수 등이 담긴 통도 보였다. 그리고 빈 향수병들도 상자에 차곡차곡 담겨져 놓여있었다. 기범은 쭈그리고 앉아 향수 상자를 뒤적였다. 그 때, 상자를 뒤적이던 기범의 손이 멈추었다. 그의 하얀 손에서 잡혀 나온 것은, 작지 않은 빈 플라스틱 통이었다. 그러나 냄새가 특이했다. 향수처럼 맵고 고소한 냄새가 아니라, 메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멀찍이 통을 두고 손으로 바람을 일으킨 기범은 미간을 찌푸렸다.



"......포르말린(Formalin)......?"



기범은 통 안의 물질의 정체를 확인하고 경악했다. 포르말린? 어째서 조향사가 포르말린을? 기범은 입술을 꾹 다물고 통을 내려놓았다. 옆에 있던 종이 꾸러미를 서둘러 헤쳤다. 벌써 어둑한 밤이 밀려오고 있었다. 휴대전화 불빛으로 종이를 살피던 기범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성형수술을 할 수 있는 정도?] [성형수술을 하려면] [얼굴이 곪는 병은 나을 수 없을까]



그 종이 꾸러미는 잡지 기사였다. 간간히 신문에서 오려 낸 것들도 눈에 띄었다. 기범의 입이 벌어졌다. 성형 이야기를 꺼냈을 때 담담하던 여자...... 모든 게 연막이었다. 종이들은 모두 성형, 아니면 얼굴이 곪는 병에 대한 것이었다. 이제서야 생각이 났다. 얼굴 한 쪽을 길게 내린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있었던 여자의 모습이. 어떤 심각한 병이 있었길래 성형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리고 주렴 뒤의 조향사와 카운터에 나와 있던 조향사인 여자 둘 다 역시 범인이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 때였다. 담담하고 오싹한 목소리가 기범의 목덜미로 떨어져 내린 것은.



"......미인은 호기심이 많은 법이죠, 프쉬케처럼 말이에요."



기범은 어찌할 새도 없이, 입을 막아오는 약을 묻힌 수건 때문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기범은 그녀의 말대로 호기심에 경솔했던 자신의 태도를 탓하며 의식의 끈을 놓기 전, 마지막으로 딱 한 사람의 얼굴을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범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민호를.

 

 

 


한편, KPSI 사무실에서는 서울 수사팀까지 와서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기범이 밤 11시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의자 측에 의해 기범이 무슨 일을 당하기라도 하면 골치가 아파졌다. 종현은 애꿎은 주먹만 꽉 쥐었다. 손톱이 살에 박힐 정도로 꽉. 민호는 창가에서 담배만 네 개피째 태우고 있었다.



"안 되겠어, 가야 돼!"


"이진기 박사님, 함부로 경찰을 이끌고 들어가면......"


"지금 그게 문제입니까! 지금 사람이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데!"



오히려 종현이 담담하고 진기가 열을 내고 있었다. 태민은 불안한 얼굴로 계속 전화기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민호가 네 개피째의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고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이상할 정도로 세 번째 살인이 일어난 후 8일 동안이나 잠잠했습니다. 이건 처음 이진기 박사님과 김기범이 그 가게에 다녀온 후부터 입니다. 범인은 그 가게의 조향사들인 것이 분명하고...... 김기범을 보자마자 관심을 보였던 그 여 조향사...... 아마 그를 마지막 희생자로 정했던 거겠죠."


"뭐어?!"


모여있던 사람들 몇이 뜨악한 얼굴을 했다. 종현과 태민, 진기는 씁쓸한 얼굴로 민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민호는 이 상황에서도 담담한 얼굴이었다. 종현은 속으로 제 애인이 끌려갔는데도 저럴 수 있나, 독한 놈 하면서도 기범이 걱정되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민호는 무어라 반박을 하려는 팀원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희생자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한 '발푸르기스의 밤'은 달맞이 꽃으로 만든 향수입니다. 달맞이 꽃의 꽃말은 '기다림' 이고......"



민호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빈 담뱃갑을 책상 위로 던졌다.




"그들은 마지막 희생자인 김기범을 기다린 겁니다. 어떤 이유로 그를 선택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발푸르기스의 밤' 을 위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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